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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현, 손흥조, 임기반 어떠한 이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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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시간 삼인에 대하여 배웠다. 이응현, 손흥조, 임기반 어떠한 이들인가? 하나님이 낸 인물들이다. 삼인방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삼인으로 이 나라에 복음이 태동되도록 함에 있어서 일등 공로자들이다. 우리들이 그러한 조상을 지니고 있는데 지금 우리들의 형편 처지와 몰골이 어떠한가? 너무 처져 있다. 저들이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라면 이제 마지막 지상 역사와 이 나라의 운명의 열쇄를 지니고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 자들이 되어야 하겠는가? 자신이 생각할 때에는 똑 같은 유형의 사람이 되어야 되리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 동일하다.

  오늘은 이 나라에 복음이 태동되던 시기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가를 잠시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역사의 키를 쥐고 있음에 대하여 언급하려고 한다. 1904년이다. 그때는 러일 전쟁이 발발되었던 때이다. 전쟁 하면 무엇을 생각하는가? 민심이 흉흉하다. 사는 일이 예사롭지 않다. 이민의 길이 열려 있었다. 한국 사람의 살아온 풍습으로는 해외 이민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던 때이다. 우리 민족은 같은 혈통을 중시하였고 함께 사는 민족이지 가족을 떠나 머나 먼 타국이니 타향이니 하는 생활이 몸에 베지 않았다. 그런 데도 워낙 살기 어려운 시절이고, 신식 문화가 밀려오는 시점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려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형편은 일본의 관여로 한국을 조여오고 있었다. 또한 열강들이 한국을 노리고 있었다. 나라의 국운이 쇠하는 풍전등화의 시기이다.

  우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위치하여 있다. 양 자 사이에서 영향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는 중국에 기대어 살아왔다. 일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일본이 먼저 서구문명을 받았다고 해서 찝적거리기 시작하였다. 일부 나라의 대신들이 일본의 문명과 문화를 받아드리기 위하여 개혁 정치를 단행하면서 일본을 국내로 끌어드리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여러 사건들이 터진다. 운양호 사건, 갑신정변 연이어 민비 살해사건이 생겨나고 또 그 이전에는 임오군란과 동학란이 생겨난다. 나라가 망할 징조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하여 눈여겨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복음이다. 그 중에서 우리는 무엇에 눈을 떠야 하는가? 재림교회의 역사이다. 1885년부터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문을 두들기다가 언더우드(장로교)와 아펜젤라(감리교)가 알렌의 도움으로 장로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선교사들이 자기 발로 와서 선교의 문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그럴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대총회 조직이 1863년이다. 세계 선교의 기구가 동양쪽으로 방향을 틀기에는 멀어만 보였던 때이다. 중국 홍콩쪽으로는 아브람 라루라는 문서전도인이, 일본에서는 힐즈버그 대학장이 자진하여 선교사로 부부가 왔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11년이 앞섰다. 중국은 이보다 더 빨랐다.

  그러던 때인 1904년 이응현, 손흥조 양인이 신자된 입장에서 이민 신청에 나섰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재림교회의 간판을 보고 쿠니야 히데 목사를 만났다. 한 사람은 이민으로 미국으로 갔고, 한 사람은 탈락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에 임기반 씨가 합세하여 재림교회를 퍼뜨리게 되었다. 1904년에 5월에 이러한 일이 터진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져 일본으로 도항이니 배를 타고 이민을 가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끝이 났다. 일본과의 적대 감정이 생겨나 자동적으로 문이 닫힌 것이다. 선교사들이 동양 그것도 한국에는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소위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곳인지라 언제 복음이 전하여질 수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던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국에서의 이응현, 손흥조 양인을 일인이 쿠니야 히데 씨를 접선케 한 후에 임기반 씨를 연결시켰다. 오늘은 임기반 씨와 쿠니야 히데 씨를 언급하여야 한다. 이응현 씨와 손흥조 양인은 일본 말을 몰랐다. 그러나 임기반 씨는 일본 말을 알았다. 또한 영어도 구사할 줄 알았다. 임기반 씨는 손흥조 씨로부터 성경에 대하여 듣고 개종하였다. 그의 신분이 전도사인 목사의 실력이 있는 분이었으나 자신이 배운 감리교회의 신학으로 개종한 후에 교회 지도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쿠니야 히데 씨를 불렀다. 쿠니야는 한국어를 몰라 처음에는 매우 주저하였다. 그러나 임기반 씨가 성령의 권능을 믿음으로 오면 된다고 강하게 푸시하였다. 따라서 통역을 할 수 있는 임기반 씨와 그를 추종하던 강창호 씨 같은 분이 있어 한국에서의 선교 50일을 보내어 부흥을 이루어냈고 쿠니야 씨는 일본의 책임자인 필드 목사의 통역관으로 교회 일을 순조롭게 볼 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적재적소에 당신께서 준비한 인물들을 두셨다. 우리는 일본인 쿠니야 히데 목사 없이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쿠니야 씨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자신이 인터넷에 올린 A - 4 용지 27쪽의 글이 있다. 참고하라. 그가 1899년에 일본에서 최초에 재림교회의 기별을 받아드렸다. 그는 1907년에 최초로 목사의 안수를 받은 분이다. 그가 교회에 처음 발을 딜여 놓은 것은 대략 1893년경이 된다. 그는 침례를 받으면서부터는 거의 목회 사역에 종사할 수 있으리만큼 철저한 내실을 다진 분이다. 1904년에는 이미 정식으로 전도사의 신분으로 고오베 교회의 목회의 사역을 맡았다. 

  그가 목회자가 된 데에는 남다른 소명이 있었다. 그는 군인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징집되어 군대로 끌려나갔다. 만 3년의 제대를 바라다가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연장 복무를 하던 중에 중국어를 익혔다가 거리에서 중국어로 전도를 하는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감동(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듯이 성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말씀의 내용)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어 중국으로의 귀화를 포기하고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 자세로 전향하고 다시 영어를 잘하여야 된다는 결심을 갖고 당시 부대에서 가까운 곳에 미국에서 힐즈버그(오늘날 패시픽 유니온 대학)의 대학장인 그래인저 씨가 일본에 최초의 선교사로 와서 영어 교습소를 차린 간판을 보고 영어 공부하러 들어왔다가 미국 갈 기대를 포기하고 그에게 붙들려 조수 역할을 하면서 영어와 신학을 배웠다고 생각된다. 선교사로 매우 근업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던 것을 몸소 배우고 그가 55세의 병으로 타계할 때에 동족을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네 라고 답을 하고 그 시로 복음 전도사로서의 이무에 충실하면서 온갖 역경을 다 맞았단 일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회사의 산 증인으로 영웅시 취급받는 분이다. 그는 목회 전반의 일을 안 한 일이 없다. 가는 곳마다 전도의 부흥을 일으켰다. 72세의 고령으로 일제의 당국에 의하여 종교 탄압을 받을 때인 1943년에 무려 1년 가까이 구금과 연금과 병원 입원을 가지면서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 90세가 되기까지 교회를 돌보고 죽기 전날까지 설교를 하신 분이다. 

  그가 한국을 사랑한 분이다. 1904년 1차 방문 시 50여일을 필드 목사와 임기반 씨와 함께 보내고 1905년에도 2차로 진남포를 방문왔으며 1935년 한국 선교 30주년 기념식을 가질 때에도 한국에 와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분이고 돌아가시기 1년 전에도 한국을 다녀갔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다 주셨다. 그는 1907년 미국에서 열린 대총회 모임에 참여하였고 테프트 대통령도 만나고 화잇 선지자의 설교도 경청하였다. 그가 들었던 생생한 모습도 수록하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한국에서 있었던 당시의 생생한 증언들을 남겨놓아 재림교회 연구에 큰 도움을 남긴 분이기도 한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한국 민족에게 1904년에 이응현, 손흥조 씨 양인이 미국 하와이 이민의 길을 가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의미와 하나님께서 임기반 씨를 미국에서 돌아오게 한 섭리를 한 눈에 보게 한다. 임기반 씨는 1902년 미국 땅을 밟고 그곳에서 일년 이상 이민간 이들에 대한 교화사업을 맡았다가 다시 한국에서 동료들의 부름으로 다시 귀국하던 때였다. 손흥조 씨가 이민에서 탈락되는 일이 없었더라면, 임기반 씨가 안창호 씨 일행을 먼저 미국으로 보냈다가 저들의 초청을 받고 가서 활동하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었더라면 그 무엇 하나 이루어질 일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두루 보시면서 당시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셨다. 일본에서의 쿠니야 히데 목사는 끝까지 목회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성공적으로 생애를 마감한 반면에 우리 한국은 너무나 단명하였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필요하다. 우리의 선조들이 일본인 쿠니야 씨보다 못한 사람인가?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한국은 신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일본보다 더 열악하였다. 일본에서는 쿠니야 히데 씨는 日人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이끌어갔으나 우리 한국은 비록 삼인들이 단명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후에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메꾸기 위하여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면서 일꾼들을 파송하였다. 

  스미스 목사는 카우보우 출신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로 가장 많이 걸으면서 선교를 하신 분이다. 80리 60리는 보통이고 인적이 드문 지역을 밤에도 맹수의 위협을 무릅쓰고 걷고 또 걸었다. 자전거로 수백리는 보통이다. 통역자 없이 혼자서 전도하고 설교한 분이다. 부인의 노고가 컸다. 두 자녀를 잃었다. 그의 온 몸과 사지가 멍이 들고 병이 들어 귀국하였다. 그는 원래 체구가 작은 분으로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기면서 기적으로 살은 분이다. 선교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준 분으로 한국 사람으로서는 정말로 잊으면 안 될 분이다. 1906년 최초로 부르심을 받아 한국에 초대 사역자로 오셨다. 

  연이어서 오신 분들로는 샤펜버그와 스커트 양이 있다. 같은 자매들이다. 샤펜버그는 꿈에 동양인의 모습을 본 분이고 남편 왕거린 씨가 그만 목사의 안수를 받고 난 뒤 타계함에 따라 남편이 못다 이룬 일을 위하여 자녀와 함께 다시 한국에 와서 38년의 사역을 마친 맹렬 여성으로 우리로서는 잊지 못할 생명의 은인이다. 

  럿셀 같은 명의는 정말로 하나님이 준비한 인물이다. 의사로서 얼마든지 부를 지니고 살 수 있는 분들이었으나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하여 이 나라에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랑과 헌신의 면들을 아낌없이 보여준 하나님이 보내준 사자들이다. 이 나라에서 번져난 삼일운동의 모습을 보신 분이다. 미 대통령 하딩과의 친구인 그가 굳이 한국에 고생하면서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저들은 어떠한 이들인가? 마치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호위호식하면서 있는 생활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동족과 아픔과 괴로움을 겪는 생활을 기꺼이 감수하였듯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비와 동정의 대상이 되는 이 나라의 민족과 함께 하였던 분들의 정성으로 우리가 복음의 은혜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 필자가 역사의 자료를 올리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또한 역사의식이 전무한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위하는 우리들의 믿음의 자세를 목사들을 설교로 다른 이들은 안식일학교 시간에라도 부지런히 활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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