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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흑역사... 이런 목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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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절(5일)에 맞춰 기독교 순교자 가문을 2회에 걸쳐 조명한다. 1대 목사인 조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되고, 북한 공산당에 반대하다 순교했다. 2대 목사인 아버지는 이름도 빚도 없는 시골목회자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섬겼다. 3대 목사인 아들은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일 단식을 감행했다. 순교자 가문을 통해 부활절의 의미를 짚어본다. - 기자 말

예수가 부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방계성 목사의 손자인 방인성(61·함께여는교회) 목사가 조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성경책을 보여주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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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들은 예수의 등장에 환호했다.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집회에 모인 수 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과 죽은 지 나흘 된 청년 나사로를 살리는 등 수많은 기적을 보이자 군중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 제국주의 로마와 유대교의 이중 착취에 시달린 백성들은 자신들을 해방시킬 메시아가 나타났다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예수를 뒤따른 것이다.

예수는 '호산나'(이제 구원하소서)를 외치는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입성의 첫 작품은 종교 장사치로 전락한 종교세력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하며 채찍으로 후려친 사건이다. 부패한 종교권력에 맞선 예수의 거침없는 행동에 유대인들은 환호했고, 유대교 권력자들은 권력기반이 흔들리자 예수를 없앨 음모를 꾸민 뒤에 예수를 체포해 내란선동 혐의로 총독부에 넘겼다. 

청년 예수를 직접 심문한 로마 총독 빌라도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무혐의였다. 그래서 사면하려고 했는데 종교 권력자와 군중들은 폭동을 일으킬 기세로 예수 처형을 요구했다. 안정 국면을 원했던 빌라도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나는 이 사람(예수)의 피에 대해 아무 죄가 없다. 이 일은 너희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며 떠넘겼고, 군중들은 "그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며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다. 빌라도는 결국 예수를 넘겨주었다. 

부활절(復活節)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예수가 부활해 한국 땅을 밟는다면 어떤 상황이 연출될까. 이스라엘 종교 권력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부패한 개신교 권력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화 있을 것"이라고 규탄하면서 "세계 최대의 교회와 교인 수를 자랑하지 말고 신사참배와 종교권력 다툼으로 하나님을 욕보인 죄부터 고백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할 가능성이 크다.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 신앙의 절개를 지킨 두 순교자

▲  영화 <쿼바디스>에서 로마 원형광장에 끌려나온 그리스도교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 쿼바디스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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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네로는 그리스도교도들이 로마 방화사건의 주범이라고 누명을 씌우며 학살참극을 벌인다. 원형 광장에 끌려나온 그리스도교도들은 사자의 먹이가 되면서도 찬송가를 부른다. 네로는 그리스도교도들의 의연한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로마를 탈출했던 베드로는 순교의 피바다가 된 로마로 다시 돌아와서는 예수를 배신한 죄인이 주님과 같은 형벌을 받을 수 없다며 거꾸로 매달려 죽는 십자가 처형을 택한다. 

영화 <쿼바디스>의 클라이맥스 장면이다. 기독교는 고난과 순교의 종교다. 예수는 물론이고 베드로 등 열두제자를 비롯한 그리스도교도 150만 명이 로마제국의 박해에 의해 순교한다. 신앙의 절개와 목숨을 바꾼 순교의 피는 로마와 아시아 그리고, 조선 반도까지 붉게 물들이면서 세계를 복음화시킨다. 초기 기독교 성직자 '테루투리아누스'는 "순교자의 피는 실로 교회의 기초이다. 죽음으로서 우리는 이긴다. 우리가 목숨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승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라는 말로 기독교의 순교신앙을 정의한다.

▲  방계성 전도사(왼쪽)와 주기철 목사(오른쪽)와 오재길(뒤쪽). 주기철 목사가 1937년 12월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됐다 풀려난 뒤에 찍은 사진이다. ⓒ 방인성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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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계성(1888~1949) 목사는 신앙의 절개를 끝까지 지킨 순교자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에는 예배당에 인공기를 게양하라는 요구와 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는 공산당의 요구에 반대하다 순교했다. 배교와 변절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한 한국 개신교회 역사에서 방 목사는 정통파다. 하지만 방 목사는 순교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기독교 정신에 철저한 방 목사 때문이다. 방 목사는 가족 및 후손들에게 '옥고와 순교를 자랑하지 말라'고 엄하게 가르쳤고 유족과 후손들은 유언을 단단히 지켰다. 

방계성은 평북 철산군에서 1887년 태어났다.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평북 선천에 설립한 신성학교에 입학하면서다. 가정형편으로 신성학교를 1년 만에 중퇴한 방계성은 철산군청 토지산림측량기사와 철산군 원세평동 동장으로 근무하다 부산으로 이주해 수산업체 사장 딸과 결혼한다. 32세에 평양신학교를 입학했지만 가정 사정으로 2년 만에 수료한다. 그리고는 38세에 부산 초량교회 장로에 취임하면서 약관 28세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방계성은 43세에 목회자가 된다. 전도사에 임명된 그는 제주도 추자도에 신양교회를 개척한다. 야학을 통해 청년 인재들을 육성한 방계성은 추자도에서 유기농업의 산증인으로 정농회 초대회장을 지낸 오재길(95)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월드비전 회장을 지낸 오재식(80·2013년 소천) 형제를 발굴한다. 오재길는 방계성 목사의 도움으로 평양에서 공부를 하면서 사위가 된다. 방인성 목사와는 고모부 관계다.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 신사참배파가 장악한 교회

▲  방계성 전도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등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교회지도자들이 1945년 8월17일 평양형무소에 출옥한 후에 주기철 목사의 집에 모여서 찍은 사진이다. ⓒ 방인성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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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안동현 육도구교회에서 3년간 전임 전도사로 활동하던 방계성 전도사는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의 요청으로 전도사로 부임한다.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 유계준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당회(교회집행부)를 구성한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이자 거점이었다. 일제가 교회를 폐쇄하자 지하교회를 조직하면서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거부 등의 신앙적 저항운동을 전개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확산시킨다. 

신사참배((神社參拜)는 십계명 중에 첫째 계명(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과 둘째 계명(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숭배하지 말라)을 어기는 심각한 배교행위였다. 하지만 산정현교회가 속한 평양노회를 비롯한 종교 권력자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신사를 참배한다. 그리고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핵심 인물인 주기철 목사를 파면하고 산정현교회 폐쇄를 일제와 공모하는 등 철저하게 훼절한다. 

예배당에는 일장기가 게양되고 '가미다나'라는 모형 신사가 설치됐다. 교인들은 예배 전에 '궁성요배'와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 '국민의례'를 먼저 거행했다. 신앙의 절개를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면서 기득권을 유지한 종교 권력자들은 일제가 패망하자 신사참배를 재빨리 버리고 새로운 권력인 미국을 숭배한다. 반공과 친미로 갈아타면서 득세한 친일파와 신사참배세력은 동일체다. 

▲  방계성 목사는 성경책에 "예수님의 죽음이 사망을 이기엿으니(였으니) 우리도 갓치(같이) 죽자 갓치(같이) 산다"라고 썼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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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과 방계성은 순교의 동지였다. 주 목사가 경찰과 감옥소에 갇히면 방 전도사는 교회를 지켰고, 같이 갇혀서는 주 목사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방 전도사는 주 목사보다 열 살 연상이었지만 체격이 건장하고 강건했다. 손자 방인성 목사에 따르면 고문 경찰이 주 목사가 보는 앞에서 방 전도사에게 신사참배 반대의 배후를 불라고 족치자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배후라고 했고, 고문으로 병약해진 주 목사를 보호하려다 매질과 고문을 더 당했다. 

주기철 목사는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한다. 순교의 피는 주기철 목사의 제자인 손양원 목사에게로 이어지면서 배교로 얼룩진 한국 개신교회에 면류관을 씌운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방계성 전도사는 6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45년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다. 방계성의 부인인 박분옥(방인성 목사의 할머니)은 남편뿐 아니라 다른 옥중성도들의 가정에 생활비를 대고,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자 주 목사의 부인(오정모)을 헌신적으로 섬긴다. 

신사참배에 항거한 방계성 전도사와 이기선 목사 등은 한국교회의 복구와 재건원칙을 제시한다.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할 것" 등이 담긴 결의문을 발표했지만 교회 권력을 장악한 신사참배 세력에 의해 무시된다. 한국 사회가 친일청산에 실패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한국 교회는 혁신과 재건의 기회를 잃으면서 정통성을 상실한다. 

산정현교회도 내분에 휩싸인다. 평양노회를 장악한 신사참배파와 타협한 '기성교회파'가 교회를 장악하면서 방계성 전도사 등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혁신복구파'는 산정현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 '평양산정현교회'를 개척하면서 '독자적인 노회'(독노회)를 조직한다. 주기철, 방계성과 함께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혁신복구파를 따르면서 평양산정현교회 장로에 취임한다. 

1949년 5월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방계성 목사는 예배당에 인공기를 걸라는 요구와 공산당이 주도한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하다 1949년 12월 27일 공산당에 납치된다. 일제 군국주의와 북한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은 평신도 출신인 방 목사는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61세에 순교한다. 

가난과 고난을 선택한 순교자의 후손들

▲  젊은 시절의 방인성 목사(왼쪽) 한국 개신교회의 원로인 방지일 목사(가운데) 부친 방정원 목사(오른쪽) ⓒ 방인성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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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방정원 목사는 아들 방인성 목사에게 "너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할아버지의 겸손한 성품까지 닮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방인성(61․함께여는교회) 목사는 3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을 강조하셨다"면서 "방계성 목사님은 할아버지이기 전에 흠모하는 신앙인"이라고 말했다. 

방정원 목사가 전한 바에 의하면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 등이 패이고, 손톱이 뭉그러진 것을 보여주어야 교인들이 존경하는데도 아버님(방계성 목사)은 '그게 무슨 자랑이냐. 마땅히 할 일이지'라며 겸손을 강조하셨다"고 했다. 주기철 목사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낸 김상복(할렐루야교회 원로) 목사는 "방계성 목사의 겸손, 희생, 헌신, 순교는 한국교회가 반드시 배워야 할 아름다운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방계성 목사의 순교 의지는 유일한 유품인 성경책에 담겨 있다. 방 목사는 성경책 뒷면에 "예수님의 죽음이 사망을 이기엿으니(였으니) 우리도 갓치(같이) 죽자 갓치(같이) 산다"라는 각오를 글로 썼다.  

순교 정신은 아들과 손자에게 이어졌다. 방계성 목사의 둘째 아들인 방정원 목사는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섬긴 사랑의 목사였다. 하지만 방정원 목사는 부친의 끔찍한 고난을 목격한 탓에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 초등학생인 큰아들 방인성이 골수결핵으로 발을 절단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 가운데 안수기도로 낫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운영하던 사진관을 접고 아버지에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방인성 목사는 아버지 방정원 목사에 대해 "목회자들이 꺼리는 강원도, 경기도, 전북, 충청도 등 두메산골 교회를 섬기다 은퇴했다"면서 "은퇴 이후에는 맹인이신 안일권 목사님을 도와 출소자와 알코올 중독자를 섬기다가 97년 74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높고 화려한 강대상에서 교인을 내려보며 훈계하는 한국 교회와 부자와 권력자를 우대하는 목사 세계에 비춰보면 방정원 목사는 아버지의 익명적 겸손과 헌신을 실천한 청빈한 아들이자 목회자다.

방 목사는 아버님이 "목회할 때 목사이고, 교회를 떠나거나 은퇴하면 목사가 아닌 평신도"라고 말했다면서 "은퇴 이후 목사 신분을 감추고는 개척교회 목사를 묵묵히 돕다가 돌아가셨고, 개척교회 목사와 교인들이 조문을 왔다가 아버님이 목사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겸손한 목회를 물려 받은 방인성 목사는 교인 위에 군림하는 왕노릇 목사상을 혁파하면서 평등과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교회운영을 실천한다.

교회여, 부활하고 싶은가? 예수 가르침대로 죽어라

▲  방계성 목사의 친필이 담긴 성경책. 방 목사는 한자로 '평양형무소'라고 쓰고, 형무소에 들어간 날(入) 1941. 8. 25일과 출옥한 날(出) 1945. 8. 17을 표기했다. 이 성경책은 방계성 목사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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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이 농촌목회를 기피하는 이유는 생활이 어렵기 때문이다. 남편을 대신해 가족생계를 책임진 방인성 목사의 어머니는 품꾼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서울에 남아 중고등학교를 다닌 방인성은 과외교사를 하거나 근로장학생 등의 방법으로 학비를 벌어야 하는 고학생이었다. 사례비도 제대로 못 받는 목회자 아버지나 사모님 소리는커녕 품꾼으로 전락한 어머니나 고학생인 아들을 견디게 한 것은 순교자의 후손이란 자존심이었다. 

방인성 목사는 "외가가 권세 있는 집안이었지만 자존심이 강한 어머니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목회자의 아내로서 꼿꼿함도 잃지 않았다"면서 "순교자의 후예라는 자존심과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자부심이 어려움을 이기게 한 원천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3대 목회자 집안이자 순교자 가문이 선택한 것은 세상 권세와 부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도의 청빈과 십자가의 길이다. 이렇게 사는 인생살이가 험난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아름답다. 

한국 교회는 교회규모와 교인수를 자랑한다. 그렇게 세속화 된 한국 교회는 천만 교인을 자랑하다 급속도로 추락하고 있다. 세상 질서에선 죽으면 죽은 자만 억울하지만 기독교의 진리에선 대신 희생하고 속죄하면 십자가로 부활한다.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살길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죽고, 병든 이웃을 위해 죽고, 고난 받는 이웃을 위해 죽으면 반드시 부활한다. 그런데 부활의 싹수는 노랗다. 그럼, 한국 교회는 무너질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2천 년 전에 한 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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