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 앞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 붙임으로 시작되었다. 신교를 가리켜 영어로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다. 이 말은 프로테스트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항의한다. 반대한다. 저항한다." 라는 의미가 있다. 신교인들이 구교회의 권위를 반대하고 저항했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하는 말로 좋지 않게 불려졌던 이름이다.
공산주의자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신교인들을 싫어한다. 3·1운동 때에도 많은 우리 국민이 일본 정부, 일본 정책을 반대해서 저항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순국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까 90퍼센트가 신교인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신교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프로테스탄트이다.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산당들이 우리 신교인을 제일 싫어한다.
그러므로 개혁, 저항이라는 말을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된다. 개혁은 옛 것을 무작정 치워버리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 아니다. 궤도를 이탈하고 비정상적인 길로 가는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정상적인 길로 가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개혁은 곧 변화이다.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위한 부정이다.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우고, 건설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다. 그래서 개혁자 칼빈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개혁을 표방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은 달라지지 않고 있으면서 그 화살을 타인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자기는 달라지지 않으면서 교회가 달라져야 한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서도 자기는 달라지지 않으면서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자가 당착이요, 엄밀히 말하면 굉장한 교만이다. 개혁은 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변화되려고 몸부림치는 데서부터 개혁은 시작되는 것이다.
왜 내가 변해야 하나? 변화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변화된 모세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켰고, 변화된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부흥시켰고, 변화된 바울은 이방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도가 되었다. 변화된 사람들은 한결 같이 귀하게 쓰임 받았다. 이제 변화와 성숙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이다. 한 개인의 생존의 문제를 넘어 교회의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라도, 개인도, 사회도, 가정도, 기업도 변화를 거부하면 망한다. 우리의 생각이 변해야 한다. 우리의 언어가 변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변해야 한다. 변화는 곧 개혁이다. 개혁은 반드시 부흥으로 이어진다.
사무엘이 태어날 때의 상황은 흔한 이상도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 시대였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량자이어서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고, 하나님의 진노로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법궤까지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한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 앉아있다가 넘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고,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고 죽는데 죽으면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이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의 지시를 따라 미스바에 모여 바알과 아스다롯,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금식하며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하고 회개하며 기도한다. 그때 블레셋이 쳐들어 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고 그들을 치셨다.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성읍까지 도로 찾게 하셨고, 그 땅에 평화가 있게 하셨다. 개혁은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가봇시대가 에벤에셀 시대로 바뀌었다.
유다 왕조의 대표적인 선한 왕은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며, 여호와의 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위해 만든 모든 기명과 우상들을 불로 태우고, 산당을 찍어버리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며, 다윗의 신앙을 계승하여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왕상15:13-14, 왕하18:4-5, 23:1-25). 이렇게 개혁을 통해 예배가 회복되자 ‘신앙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하기를 힘썼다.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말씀을 통한 변화는 부흥으로 이어졌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되었고, 날마다 구원받는 수가 더하게 되었다.
개혁은 모범이다.
연초마다 수많은 좌담회, 대담 프로그램에서 한결같이 논했던 화두가 변화이다. <정부가 변해가 된다, 정당이 변해야 된다, 기업이 변해야 된다, 대학이 변해야 된다, 군대가 변해야 된다. 그리고 교회가 변해야 된다.> 이렇게 모두가 변화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개혁하자는 구호는 많은데, 개혁이 만족하게 되고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회도 그렇고, 교계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왜 개혁의 구호는 많은데 개혁되지 않는 걸까?
자기 개혁이 없는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기 때문이다. 개혁의 선봉에 선 사람들이 자기의 개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은 운동이 아니다. 개혁은 시위가 아니다. 개혁은 제도가 아니다. 운동한다고 시위한다고 제도를 바꾼다고 개혁되는 것이 아니다. 개혁은 모범이다. SK그룹의 최종현 회장이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라고 유언을 했다. 그분의 유언과 화장 때문에 우리 사회에 화장장묘 문화에 개혁이 일어났다. 지금은 70%가 화장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졌다. 개혁은 모범이다. 내 자신이 개혁이 되어 모범을 보여주고 남들이 본받는 거기에서 개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개혁의 주체는 말씀이다.
로마 교황청은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며 모자라는 건축비 충당을 위해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했다.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예수 안 믿고 지옥간 영혼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었다. 마틴 루터가 로마서를 읽으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엄청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 말씀이 루터를 사로잡게 되었고 루터로 하여금 저항하게 만들었다.
위대한 개혁자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은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마틴 루터는 로마 천주교 사제였고, 요한 칼빈은 천주교와 거리가 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개혁 구호는 똑같았다. 그 일치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들을 변화 시킨 것은 말씀이었다. 말씀으로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고 일치점을 찾을 수 있었고 개혁의 깃발을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개혁의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루터와 칼빈의 일치점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개혁이 아니다. 왜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순수한 성령의 역사를 잃어버리고 있는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된다. 사도 바울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변화와 함께 개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1920년대 남미 사람들은 금을 캐러 갔다가 다 망했다. 그게 오늘의 남미이다. 그러나 북미 사람들은 금을 캐러 가거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예수 잘 믿어보고 싶어서 갔다. 그들이 퓨리턴들이다. 그들이 세운 나라가 오늘의 미국이다. 동기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하나님이 마침내 축복해주신다. 개혁은 반드시 부흥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