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전 대지진과 쓰나미의 여파로 원전과 방사능에 관한 공포에 최근엔 규슈섬 남부 사쿠라지마에서 화산폭발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들은 지금 일본이 진행하고 있는 우경화와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에 대한 천재지변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그런 심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을 두고 너무 쉽게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재앙이니, 천벌이니 운운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말들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재난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란 항상 그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의 금사과'(잠25:11)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을 비난하기 앞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도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 일본지진에 대해 모 방송국이 이를 한류와 연관시켜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앵커가 마지막에 ‘이번 지진으로 인해 한류에 타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하였고, 그 말에 대해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웃 나라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 지금이 우리의 밥그릇 걱정할 때냐?”였습니다. 우리의 사회의식이 참 많이 성숙해간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본이 이런 재난을 당한 것은 그들이 과거의 잘못을 회개할 줄 모르고, 우상숭배하는 죄 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고 또 그렇게 말하고 싶을 때, 우리가 먼저 해야할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런 재난으로 심판받을 죄가 없는가? 예수님 말씀처럼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빼기 전에 내 눈에 들보부터 빼내는 것이죠. 남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전에 나 먼저 회개하고 자신을 올바로 하는 것이 말하는 바른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와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례 요한 같은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다면 이스라엘에 회개를 촉구했을 때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을 갖고 그들 앞에 나아와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반대하고 핍박하던 인물조차도 그들을 존경하고 두려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말 이전에 이미 그들의 그 삶에서 하나님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신실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크게 대중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때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비난하기 보다 회개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그 앞에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원하노니라고 고백하는 바울처럼 목숨바쳐 구해내고 싶은 그 구원에 대한 열정과 열망에 가득찼고, 그들을 위한 뜨거운 눈물과 기도, 그리고 사랑의 행동이 선행된 것이죠.
이렇게 글을 쓰면서 저도 이러한 말이 다른이들을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저도 솔직히 한 사람의 목사로서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듣는 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주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도 하는 것을 알기에 먼저 제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잃는 분들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글을 읽으시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