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이었다. 새벽 3시 반. 전화가 울렸다.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대문에….”
한숨 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아주 어린 소녀의 가냘픈 목소리였다.
순간 뛰어나갔다. 어두운 골목엔 찬바람만 불었다. 교회 대문 앞에는 종이박스가 놓여 있었다.
생선 비린내가 짙게 풍기는 낡은 종이박스를 조심스럽게 풀어헤쳤다.
갓난아기였다. 탯줄도 그대로 있었다. 울지도 않았다. 얼굴에 손을 대보니, 차가웠다.
주변엔 비린내를 맡고 온 덩치 큰 길고양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기를 가슴에 품으며 서울 난곡동의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62) 목사는 결심했다.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겠다고. 9년 전이었다.
9년전 버려진 태아 받으며 결심
교회 입구에 ‘베이비 박스’ 설치
최근 6년간 1천여명…이틀에 1명꼴
미 대학생들 만든 다큐 ‘드롭박스’
전세계 알려져 ‘박스’ 자문 요청
10일 서울사랑영화제 개막작 첫선
이 목사는 그날로 철공소 친구에게 부탁해 갓난아기를 담을 수 있는 상자를 만들었다.
교회 입구의 벽을 뚫어 상자를 설치했다.
바닥에는 차지 않게 열선을 깔고 부드러운 담요로 덮었다.
환기 시설도 만들고, 문을 열면 자동으로 벨이 울리게 했다. ‘베이비 박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이 땅에 버려져 상자에 담기는 아이가 없도록 해주소서.
이 상자가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에게만 주님이 문을 열어주소서.”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진 지 3개월 만에 벨이 울렸다. 대낮이었다. 아이는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모두 울었다. 다시 기도했다. “비록 부모는 이 아이를 버렸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 이 땅에 크게 쓰임받는 아이로 자라게 도와주소서.”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 지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갈대 바구니에 실려 나일강에서 흘러왔듯,
이 아이도 베이비 박스에 실려 험한 세상에 나온 것이라고 축복기도를 했다.
결혼 16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던 한 목사가 모세를 입양했다.
그 목사는 베이비 박스로 만난 아이를 세 명 더 입양해 잘 키우고 있다.
아이들은 꾸준히 오기 시작했다. 산에 묻으려다 차마 다시 안고 왔다는 태아의 얼굴엔 흙이 묻어 있었다.
수면제를 먹고 함께 세상을 떠나려다 데려온 10대 산모도 있었고,
3층에서 아이를 던진 뒤 5층에서 뛰어내리려다 포기했다는 엄마도 있었다.
하혈을 한 채 아이를 안고 온 소녀도 있었다. 교복에 둘둘 말아 넣어둔 아기도, 쌍둥이도 다섯 쌍이나 있었다.
제주도에서 아이를 안고 온 미혼모도 있었다.
지난 6년 동안 베이비 박스에 넣어진 아이는 모두 946명. 한 달 평균 15명가량, 이틀에 한 명꼴이다.
이 목사가 직접 탯줄을 자른 아이도 120명이나 된다. “버려진 영아의 60%는 엄마가 10대입니다. 또 90%는 결손가정 출신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 극단적인 생각을 합니다.
” 이 목사는 어린 시절부터 올바른 성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이 목사는 지난해부터 ‘베이비 룸’을 만들었다.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아기 부모들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그는 우선 미혼모에게 칭찬을 한다고 한다. “아이를 낙태하지 않고, 열 달 동안 뱃속에서 잘 키우고, 잘 낳았으니 최선을 다했어요. 더구나 버리지 않고 이곳까지 안고 왔으니 한 생명을 살린 일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미혼모는 펑펑 울면서 사연을 털어놓는다. 상담한 800여명 중 약 150명이 직접 키우겠다며 다시 데려갔다.
이들에겐 분유와 기저귀, 생활비를 지원해준다. 당장 못 키우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데려간다고
서약서를 쓰고 아이를 두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2012년 8월부터 입양특례법이 시행되면서 들어오는 아이가 9배나 늘었다. 출생신고를 해야만 입양을 보낼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는 바람에, 아이를 버리는 10대 미혼모가 더 많아진 것이다. “몰래 낳은 아기를 어떻게 출생신고합니까? 입양을 보내고 싶어도 못 보내는 겁니다. 현실을 무시한 법률입니다.”
이 목사는 모두 9명의 아이를 직접 입양했다. 그 가운데 3명은 전신마비이고, 3명은 앉아서 생활해야 한다. 나머지 3명도 정신지체이거나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다. 상자로 받은 아이 중에 입양이 안 되는 장애아들을 직접 키우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랑으로 키웁니다.”
2013년 이 목사와 베이비 박스 이야기를 현지 신문에서 본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영화예술학교 학생들이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 브라이언 아이비 감독 등 12명의 학생이 2년 동안 촬영해 지난해 <드롭박스>(Drop Box)란 제목으로 미국에서 개봉했다. 반응은 엄청났다. 50개 주 870개 극장에서 매진과 앙코르 상영이 계속되며 500만 관중이 눈물을 흘렸다. 애틀랜타주에도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졌고, 인디애나주에서는 베이비 박스를 병원과 경찰서 등 공공기관에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법안을 만들기도 했다. 중국에도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졌고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필리핀 등 5개 나라에서 베이비 박스 설치를 위한 자문을 요청해 왔다.
영화 ‘드롭박스’는 오는 10일 열리는 ‘서울국제사랑영화제’의 개막작으로 한국 관객을 찾아온다. 영화는 이미 ‘제9회 샌안토니오 기독교독립영화제’ 대상, ‘제5회 저스티스영화제’에서 가장 정의로운 영화상을 수상했고, ‘제3회 밴쿠버기독영화제’ 등에도 공식 초청됐다. 19일부터 국내 개봉된다.
지난 3일 오후 인터뷰 도중 베이비 박스의 벨이 울리자 이 목사가 뛰어나갔다. 아이는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이 호기심에 문을 열어본 것이다. “다행이네요, 휴우~.” 이 목사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