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말이 망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다. 목사를 비판하면 안 된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사실 이들이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다.

 

'교인들은 묵묵히 교회를 세우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이 간단한 말을 하기 위해 온갖 수사를 동원한다. 왜 목사를 비판하면 안 될까. 목사도 사람이고 국민이며, 국가법·교회법 아래 있다. 대통령·국회의원도 잘못하면 비난을 받고, 대기업 총수도 법률을 위반하면 처벌받고, 학생들도 잘못을 하면 혼나는데 왜 목사는 비판하면 안 된다고 할까.

 

또 기독교인의 덕은 침묵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투표하고, 의견을 내고, 온갖 자유와 권리를 누린다. 그런데 왜 교회 일, 그것도 교회의 잘못에 관해서만은 침묵해야 하는가.

 

교회 운영 시스템을 보자. 신학교에서 수련하고 안수받은 다음에 목사가 될 수 있고, 청빙 과정을 거쳐야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다. 모든 교회에는 당회와 공동의회가 존재하고, 당회와 의회를 구성하는 성도들 역시 오랜 교회 생활 가운데 절차와 신임 과정을 거쳐서 집사와 장로가 된다. 매해 예산이 짜이고, 여러 교회 활동을 제직별·부서별로 모여서 의논하고 소통하며 결정한다. 그런데 왜 유독 교회의 부정적인 측면, 목사의 비리와 추문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사실 교회는 '말'의 천국이다. 설교, 간증, 성경 공부가 있고, 큐티 나눔이 있다. 이보다 말을 많이 하는 집단이 우리 사회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잘못을 지적하거나, 문제를 고쳐야 한다는 말을 왜 못하고, 침묵하는 것을 덕이라 하는가.

 

목사는 모세, 다윗과 다르다


많은 목사들은 모세, 다윗을 주님의 종이라 말하며 자신들이 이들의 계보를 잇는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모세와 다윗과 오늘날의 목사를 수평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하다. 구약에서 모세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히브리 역사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구약사 전체를 돌아볼 때 누가 모세의 권위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다윗이 국가적인 전성기를 열었다는 측면에서 모세를 계승·완성했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세속적 지배자였지 모세 정도로 종합적인 권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약을 보더라도 예수님의 행적이 모세와 비견해 서술되거나 본인 스스로 모세적 전통을 완성·극복하려는 태도를 보이신다. 다윗과 비견되어 서술하는 부분은 빈도도 낮을뿐더러 예수께서 스스로 다윗의 자손 됨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는 구절도 등장한다. 단순한 유명세나 정치적 관점을 벗어난다면 모세에서 다윗으로 내려오는 계승론적 관점은 막연한 통념에 불과하다.

 

모세, 다윗처럼 구약을 쓰거나 히브리적 전통을 만들어 낸 목사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직업적인 특성상 목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비슷할 텐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성전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더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필요하지는 않다. 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만인사제론이 모든 개신교도들의 신앙고백이라면 목사가 특별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칼뱅은 성직자 출신도 아니었다.

 

간혹 신약에 나오는 교회 여러 직책 중 하나로 목사가 인용되는 경우가 있다. 목사는 '사도'를 계승한 것도 아니다. 신약에는 오히려 장로나 집사 직분의 형성 경위는 자세히 써 있는 반면 목사에 대한 구절은 극히 미미하다.

 

성경에 장로나 집사가 목사를 비판하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던가. 사도 베드로나 바울도 성도들과 소통했고, 이방인 전도나 음식 문제 그리고 로마 상경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비판


누군가를 '비판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신 분은 예수님 본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판하지 않으셨던가. 아니다. 조목조목 비판하셨다. 바리새인의 장단점을 꼼꼼히 지적하시되 그들의 허례허식을 남김없이 공박했다. 장로들의 전통 역시 예루살렘 입성 전후로 주요 비판 대상이 된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거나, 금식을 거부하는 등 여러 의도적인 행동을 통해 예수님은 끊임없이 현실의 구석구석을 문제 삼았고, 논쟁하고 비판하셨다. 이런 상황 가운데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맥락과 문맥과 저의를 이해하고 상황에 맞추어서 적용해야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에서 주일마다 강조하고, 우리가 삶의 지침으로 삼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삶 아닌가. 예수의 제자로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문제 제기하고 논쟁하며 비판하셨다. 온갖 사회악을 직면하시면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몇몇 사람들은 목사를 비판하면 연약한 자들이 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연약한 자들은 누구인가. 신앙이 약하다고 그의 이성적 판단 능력이 약하다고 보면 안 된다. 초신자라 하더라도 대부분 연령대에 따라 그에 걸맞은 사고를 하며 살아가는 일반인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정말로 배려한다면 오히려 죄의 뿌리를 근본부터 도려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죄악이 창궐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타락했어도 교회가 엄격하고 도덕 수준이 높고 죄에 대한 회개와 치리 과정이 명확하다면 오히려 연약한 자들의 신앙심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가. 연약한 자들을 생각한다면 교회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정의롭고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의 여러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적극성을 가져야만 한다.

 

말만 죄, 회개, 변화를 강조하지 않고, 실제로 그것을 교회에서 구현해 나간다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강건해지고, 초신자들이 성숙한 신자가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것이다?


한국교회에 문제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물론 심판이 하나님의 영역이라면 당연히 그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것이다. 그런데 목사의 전횡을 '비판'하거나 교회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행위를 심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죄를 죄라고 지적하고, 처벌을 요구하고,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지 판결을 내리고, 그에 따른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게 하나님의 심판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비판·고발·판결·처벌 등은 시대와 문명을 가리지 않고 어느 지역에서나 이루어지고 있었던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다. 잘못을 범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멍석말이를 한다든지, 율령에 기초해서 사또가 지방민을 처벌한다든지. 형사소송, 민사소송, 고소·고발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인 사법행위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징벌을 두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한다는 말인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를 통해 이루어졌는가. 아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를 처벌했고, 다윗이 범죄했을 때 나단이 고발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들이 처분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소돔과 고모라 심판에서도 아브라함이 꼿꼿이 따져서 하나님이 기준을 조절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허다한 선지자들을 보내셨으며, 사도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 여행을 했다. 하나님의 역사 전체가 인간에 의해서만 진행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신다는 것,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하신다는 것을 헤아려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