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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찬양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여러 가지 어렵고 괴로웠던 것이 모두다 감사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런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 분이 예수님을 더욱 잘 믿고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과거의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할 때 우리 의 마음은 밝고 맑고 환해집니다.

 또한 우리의 환경 가운데 감사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편 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감사할 것을 찾아내고 또한 현재 환경에서도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하면 계속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불평을 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것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감사할 것을 찾아내면 감사할 것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결심하고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이웃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속이 그 감사와 찬양을 통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우울에서 쾌활하게 되고 믿음 소망 사랑으로 꽉 들어찬 상태로 변화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태도가 될 때 우리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게 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50: 23)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와 찬양 2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나나 한 개를 주어 보라. 그러면 나는 영원히 그에게 키스해 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십억 달러를 주면서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내 목숨이 달아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에게 지옥으로 가라고 저주할 것이다..." 한번 깊이 음미해 볼 말이다.

 위에서 말한 사과하는 말이나 감사하는 일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부단한 생활 표현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창조하시고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그의 뜻을 거슬러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근본적인 진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깨달아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 앞에 용서를 구하게 하는 것이요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참 사랑을 깨달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참 감사와 찬양을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노래라도..

 영국의 클 경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연습이 다되면 연주일 전에 오케스트라와 총연습을 했습니다. 한번은 메시아 오라토리오 중에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할렐루야 합창 후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 ?내 주는 살아계시고?라는 곡을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데 정확한 음정과 박자. 아름다운 음색과 감정표현 그리고 적절한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많은 청중이 ?야. 참 잘한다?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래클 경이 갑자기 지휘봉을 멈추고 노래를 중단시켰습니다. 노래 부르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심지어 관중들까지 놀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마주 보았습니다.

이 때 래클 경이 소프라노 가수에게

?너. 정말 내 주가 살아 계신 것을 믿느냐.?

그 때 이 가수가 그런 것을 생각이나 했었겠습니까.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 그저 당황해서 ?예. 예.?하며 대답했습니다.

래클 경은 ?그러면 다시 불러? 하면서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 소프라노 가수는 음정. 음색. 호흡. 박자. 감정 같은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주는 살아 계시고.? 이 노래를 듣고 많은 청중들이 아까는 ?참 잘한다?고 생각하며 노래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너무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들었다고 합니다.

 꼭 같은 사람이 꼭 같은 노래를 불러도 확신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가 이처럼 감동을 준 것입니다. 확신에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도 절망도 딛고 일어설 힘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도 찬양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에베소서1:3)

 

 한 국제 인질 사건에서 영국의 용감한 중재자 테리 웨이트는 인질들의 석방을 교섭하려고 레바논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납치되어서 독방에 감금되었습니다.

 길고 외로운 낮과 밤들을 보내면서 그는 자신의 목숨이 보존될 것인지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1596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써 놓은 기도를 매일 아침 자신의 기도로 드렸습니다. 이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풍성하게 내려 주신 수많은 자비하심과 또 저를 창조하시고 지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심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 주신 모든 당신의 은혜와 위대한 자비에 대해서 가장 겸손하고 뜨거운 감사를 드리나이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가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까? 어려움이 우리를 삼킬 때에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병을 고쳐 주시고, 위로와 힘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러한 간구는 틀림없이 합당하고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지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감옥 깊숙한 곳에서 한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자애에 대해 감사기도 드리는 것을 기억합니까?(사도행전16:25) 우리는 축복된 영생의 약속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 자체를 주신 것을 하나님께 찬양 드립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를 인정할 때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그분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주신 축복 세어 보면 찬양이 저절로 나온다.

 

 

 

 

      구하기에 앞서 찬양을 드리자 출 27~28/마 21:23~46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편.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오직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을 주신 창조주께 찬양과 경배와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것이다?라고 여겨 왔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찬양하라는 단어가 250번 이상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기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찬양은 꼭 노래로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노래하기에 불편한 장소라면 말이나 묵상으로 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찬양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찬양의 장인 시편을 소리 내서 읽거나 암송을 하는 방법도 좋습니다.

?주님, 저희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는 간구에 급급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을 즐겨 부르게 하시옵소서.?

? 시편 150편을 기록하고, 오늘 하루 안에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은 기도보다 더 거룩하다. 기도는 하늘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나 찬양은 이미 그곳에 먼저 가 있다.

 

 

 

 

     기쁨과 찬송으로

 어느 돈도 많고 문학도 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암에 걸려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이 고달프고 무거웠고 이렇게도 괴로웠던 것은 주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젠 주님을 알았기에 암이란 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며 죽음을 아주 기쁘게 맞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찬송하며 감사기도를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여대생이 가난한 사람들만 입원하는 무료 환자 수용소에서 두 달 동안 외롭게 입원을 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감사와 기쁨과 찬송으로 전도를 했다.

 자신도 아프고 괴롭지만 찬송과 기도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전도를 했다. 그러던 그녀가 퇴원을 하게 되자 환자들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의사보다, 간호사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니 우리와 같이 있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쁨의 노래를

 나는 오늘 우리 마을의 가장 번화한 거리 가운데 하나를 따라서 걸어 가다가 누군가가 시끄러운 차 소리에도 불구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비록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불렀지만 나는 그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탄 채로 자기 몸 가운데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두 팔의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헤치며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뒤쪽아 간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당신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미 잃어 버려 없어진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또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답니다."

 

 

 

 

      남편을 변화시킨 찬송

 6.25 동란 전 인민군 장교의 부인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 인민군 장교는 기독교가 몹시 못마땅해 기독교인인 아내를 알게 모르게 핍박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의 생명에도 큰 위험이 뒤따르므로 그는 아내에게 제발 예수를 믿지 말라고 사정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았으나 그 아내는 더욱 열심히 교회에 나가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남편이 잠들 때엔 그의 손을 잡고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하며 찬송을 불렀다.

 6.25 전쟁이 나자 그녀의 남편은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고 전방에서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미군 군목이 와서 기독교 신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했다. 군목은 한명씩 찬송가를 시켰다. 이 때 인민군 장교는 아내가 매일 밤 들려주던 찬송이 생각났다. 이 찬송을 부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감동을 받아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내 모습 이대로

 무디 목사님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하시면서 그곳에서 전도 집회를 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집회에 한 소녀가 참석했습니다. 이 소녀는 영혼의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소녀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나는 배운 것도 없는데. 예쁘지도 않고. 명성도 없으며. 돈도 없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아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던 이 소녀가 그 집회의 마지막 날 무디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설교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녀는 우뚝 서서 정면을 향해 달려 나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부족한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받아 주시지요.?

 달려 나오는 소녀를 끌어안으면서 무디 목사님은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께서 그대로 받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매를 받으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날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는 해방감에서 주님 앞에 찬양과 감격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에 그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성가대의 에리사 헤밀턴이라는 여자가 붓을 들어서 작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무디 목사님과 평생을 음악 목사로 동역했던 생키가 작곡을 시작합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소서.

 

 

 

 

      높으신 이름

 인도의 개척 선교사였던 스코트 목사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미개척 선교지를 향하여 가다가 적의를 품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긴 창으로 그의 심장을 겨누었습니다.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서 늘 가지고 다니던 바이올린을 켜면서 원주민들의 언어로 찬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그 앞에 무릎 꿇고서

면류관 드리세.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스코트 목사는 잠시 후면 다가 올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찬양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3절이 다 끝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눈을 떠보니 그를 겨누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창이 떨어져 있었으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찬양을 받으실 그 높으신 이름이 누구인지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 가서 여러 해 동안 그들 가운데서 거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다가동(多佳洞)의 소년

"여보......저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전주 전매청에 다니고 있던 윤기수(尹基秀)의 아내 김애순(金愛順)이 어느 봄날 남편에게 그런 말을 했다. 4년 전에 아들을 낳고서 태기가 없던 아내가 그렇게 말하자 윤기수는 태몽이 아닌가 싶어서 귀가 번쩍 띄었다.

"무슨 꿈인데......?"

"깨끗한 그릇 하나를 보았어요."

"그릇......?"

 호랑이나 돼지라면 모르겠는데 그릇을 보았다고 하자 윤기수는 심드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태몽이었는지 아내는 이듬해 정월 31일에 얼굴이 하얀 아들 하나를 낳았다. 부친이 용섭(勇燮)이라고 이름지어준 그 아들은 자라면서도 모친이 꿈에 보았던 그릇처럼 그 성품이 매우 깔끔한 편이었는데 그의 모친은 나중에 아들을 따라서 교회에 나가게 되어서야 그 이상한 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1)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릇이었기 때문인지 윤용섭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 집안에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데 용섭 소년은 혼자서 동네의 서문교회에 나가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용섭이 음악적인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이었다. 전주서중 음악부에 들어가서 클라리넷 연주를 하더니 그는 드디어 악대장이 되었고 교회 학생부에서도 음악부장이 되었던 것이다.

 용섭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은근히 고개를 끄떡였던 것은 그의 부친 윤기수였다. 본래 전주는 줄풍류 대풍류의 본고장으로 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한 지역인데다가 윤기수는 본래 시조의 전문가였고 바이올린을 하다가 손을 다쳐서 중단한 음악 지망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친의 응원을 받으며 윤용섭의 음악적 재능은 점점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서문교회 재단에서 설립한 신흥고등학교에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역시 악대장이 되었으며 교회에서는 고등부 성가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나오면서 그는 곧 조선대학교 기악과에 장학생으로 뽑혔다. 그리고 청년기의 윤용섭은 광주 양림교회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그의 전공인 클라리넷 보다는 색소폰 쪽에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천부적인 풍류기질이 그로 하여금 클라리넷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색소폰에 대한 관심은 차츰 윤용섭을 세상 쪽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한 일 년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윤용섭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도 영천교회에 출석하며 성가대 지휘를 했으나 그는 결국 색소폰을 들고 미 8군 무대에 서는 악단장이 되었다. 그가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대니 보이'나 '로라'같은 곡들은 상당한 호소력이 있어서 인기를 독차지하곤 했다.

이 시절에 그는 친구의 소개로 두 살 아래의 처녀 남기옥(南基玉)을 만난다. 1년쯤 교제를 하다가 그는 여자가 불교 집안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사에 깔끔한 윤용섭의 기질이 나타났다.

"저는 말입니다...... 예수 안 믿는 여자와는 결혼 못합니다."

여자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듯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믿으면 될거 아녜요!"

 이렇게 해서 그들은 결혼했고 영천교회의 집사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고등학교를 함께 나와 연극 연출을 하고 있던 문고헌의 소개로 안양영화예술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최은희 교장은 그를 매우 아껴서 늘 자신의 차에 그를 태우고 다녔을 정도였다. 장덕, 노고지리 등의 가수들이 이 학교에서 윤용섭의 지도를 받고 자라났다.

 그러나 이 때 윤용섭은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느라고 가끔 술을 마시곤 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위장병을 얻었다. 폭음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한 달 동안 죽도 못 먹을 정도로 증세가 심각해졌다. 교회에서 자라난 사람으로 술을 입에 대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이것 역시 그의 깔끔한 성격을 드러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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