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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이 철저히 다른 바리새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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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무리 중에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내적 자아와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이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그들이 하는 말은 배우지만 행동은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나 모세와 같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입니다. 잔치집에 가면 윗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무리들은 동물들입니다. 동물들은 서열이 뚜렷합니다. 힘이 좋은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스스로 높이려는 생각은 동물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존경받아야 할 바리새인들이 동물적 사고를 갖고 있다니 얼마나 모순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주님은 그들의 이중적인 생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고 하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잘못 가면 바리새적인 모습으로 가기 쉽습니다. 우리는 과거 유교주의적인 사고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유교에서는 형식이 내용보다도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출세주의, 세속주의적인 사고가 합해져서 뭔가 중요한 직책을 맡으면 일하기보다는 말로 부리는(?) 역할이 고상한 지위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 중직을 벼슬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수집사로 있을 때는 겸손하게 섬기던 사람이 장로가 된 후 권위주의적인 자세로 바뀌는 경우들이 많이 있음을 쉽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 ‘명예 권사’ 제도가 있습니다. 권사는 아닌데 나이가 든 집사님, 혹은 은퇴할 연세의 집사님에게 듣기에 좋으라고 ‘명예 권사’를 주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직분은 일하기 위한 것이지 권력이나 명예의 상징은 아닌데 말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연세가 얼마만큼 되면 ‘장로’의 직분을 준다고 해서 그 목사님은 총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명예 권사를 주는 교회 목사도 총회에서 쫓겨나야 형평성에 맞습니다. 권사는 그냥 줘도 괜찮고, 장로는 안 된다는 그 자체가 장로는 더 높은 권위이기 때문이라는 권위주의적 발상일지 모릅니다.

교회 직분은 모두 섬김을 위한 것이요, 자신을 낮출 때 제대로 감당할 직분입니다. 잘못하면 바리새인들만 양산하는 직분이 될 수 있습니다. ‘의무는 크게, 권한은 작게’ 가져야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되면 직분자들이 종신제에서 임기제로 바꾸자고 할 것입니다.

조선조 명재상 맹사성이 20세에 장원에 급제하여 군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만한 마음으로 깊은 산속 한 선사를 찾아 자랑하듯 말합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선사는 “그야 간단하지요. 악행을 범치 않고 선행을 행하면 됩니다” 했더니, “그 정도는 나도 압니다”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하니까, 선사가 “먼 길 왔으니 차나 한잔 들고 가시구려” 하기에 맹사성은 못 이기는 척하고 찻잔을 들었습니다. 선사는 잔이 다 찼는데 계속 따릅니다. 맹사성이 그만하라고 하니까, “찻잔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줄 알면서도 지식이 넘쳐 교만하여 인격을 망치는 것을 모르신단 말입니까?”라고 했더니, 얼굴이 붉어져 황급히 일어나 나서다가 문지방에 머리를 크게 박았습니다. 이 때 선사가 하는 말이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교회 직분을 맡아 정말 겸손하면서 자기 본문을 다하고,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원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자리는 존경받을 자리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존경받지 못한 이유는 섬김이 없었고, 스스로 권위만 내세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존경하는 것 같으나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들은 얘기입니다. 미운 지휘관이 있으면 취사병이 그 사람이 먹는 음식에 침을 뱉는답니다. 존경은커녕 비웃음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독재자가 자신의 명성을 더욱 높일 생각으로 자기 얼굴이 들어간 우표를 발행하게 한 후에 판매상황이 어떤지 보기 위해 시찰에 나섰습니다. 우체국장에게 “우표 판매상황이 어떻소?”라고 물으니까, “판매는 잘 되는데 우표가 잘 안 붙는다고 사람들이 불만을 말합니다.” 독재자는 “그럴리가...” 하면서 직접 우표 뒷면에 침을 묻혀 봉투에 붙여보았습니다. “이렇게 잘 붙는데, 왜?”라고 하자 우체국장은 “하지만 사람들은 침을 우표 앞면에다 뱉어서 붙이려고 하거든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삶은 대조적이었음을 발견합니다. 곁과 속이 같은 주님, 반면에 겉과 속이 철저히 다른 바리새인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지적 사항에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앞장섰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지적해도 바뀌지 않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교회 안에 있으면서 주님의 교회에 해가 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본다면 최소한 주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에서는 벗어날 확률은 크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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