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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를 점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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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혁명적이고 역설적인 가르침
 
유대인의 경전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학생들이 랍비가 되기 위하여 랍비 학교에 면접시험을 보러 왔다. 그때 랍비가 물었다.
“왜 이 학교에 입학을 하려느냐?”
“이 학교가 좋아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학교 보다 더 좋은 학교가 많이 있으니 좋은 학교로 가보라.”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왜 이 학교에 들어오려고 하느냐?”
“공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공부하려면 도서관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네.”
또 다른 학생에게 물었다. 그러자 학생이 대답했다.
“존경하는 랍비가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배우러 왔습니다.”
결국 그는 입학을 허락받았다.
랍비 학교에 입학하려는 사람들이지만, 동기는 각기 달랐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동기는 각기 다르다. 복 받기 위해서? 치유를 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헬라인 몇 명의 기대(요 12:20-21)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베다니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까지 예수님에 대한 소문으로 시끌벅적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자 사람들은 여리고에서나 구할 수 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호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들은 로마 군대를 무너뜨릴 정치적이고 권사적인 메시아를 희망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그들 가운데 ‘헬라인 몇 명’이 있었다. 이들은 이방인이다. 헬라인들은 똑똑한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교로 개종했다.
이들은 벳새다 출신인 빌립에게 찾아갔다. 벳새다는 데가볼리를 포함하여 이방인이 현저하게 많은 도시 부근에 있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역설적인 삶으로 전환해야
헬라인이 빌립에게 “예수를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말했다. 그러자 빌립은 안드레에게 찾아갔다. 빌립과 안드레는 예수님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드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한 대답을 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더구나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분위기에 안 맞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은 3가지를 말씀하신다.
(1)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영생하도록 보존된다.
(3) 나를 따르려면 나를 섬기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혁명적인 가르침이다. 당시 로마가 지배하던 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강자독식의 사회요, 패권주의 시대이다. 출세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사람들은 권력에 아부했다. 치부에 눈이 먼 세상이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그런데 예수님은 색다른 말씀을 하셨다.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 “섬기는 자로 살아가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고 상반되는 진리이다. 현실성이 없는 말씀이다. 세상을 너무 모르는 말이다. 세상에서 통하지 않는 이상주의요, 괴변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을 통해 이루는 부활을 보여주셨다. 목숨을 버림으로 더 값진 생명을 얻었다.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졌다. 땅에 묻혔다. 썩어졌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길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영광을 얻으려는 것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도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일까?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데요?’라고 하는 질문에 ‘예스, 노’ 라는 답만 주시면 될텐데.
거기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자신을 만나려는 목적을 알고 계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성을 들었다. 그의 문하생이 되어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 당시 예수님을 추종하던 무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은 제자들 역시 이런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썩어지는 한 알의 밀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섬기는 것부터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를 본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고, 삶을 본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자기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 사람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그곳에 영광의 꽃이 피어난다. 그때 많은 열매가 맺혀진다. 이것은 분명히 ‘역설의 진리’이다.
희생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길
예수님은 세상을 정복하실 분이시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분이시다.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만드실 분이시다.
무엇으로? 죽음으로. 땅에 떨어져서 썩어짐으로 희생하는 한 알의 밀알로.
예수님은 헬라인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자신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썩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라!”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섬기는 자가 되라!”
이런 사람만이 세상을 정복하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 이런 사람만이 세상에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영광을 얻고 싶은가? 명성을 획득하고 싶은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호령하는 권력을 잡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섬기고, 희생하고, 죽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마하마트 간디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파괴하는 7가지 큰 죄가 있다”고 한다.
1)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2) 양심이 결여된 쾌락, 3) 성품이 결여된 지식, 4) 도덕이 결여된 사업, 5)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 6) 원칙이 없는 정치, 7) 희생이 없는 종교이다.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예수님 같은 희생자가 필요하다. 희생자가 없이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희생 없이는 영광이 드러날 수가 없다.
러시아 지방에 페리칸이라는 새가 있다. 이 새는 아주 크고 날카로운 부리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턱에 부리 주머니가 달려 있다. 페리칸은 물고기를 잡아 그 주머니에 담아두었다가 새끼들에게 먹인다.
우리가 잘 알듯 러시아는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다. 오랫동안 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진다. 이럴 때 어미 새들은 턱주머니에 담아두었던 고기를 새끼들에게 먹인다. 먹이가 다 떨어지고, 다른 먹이도 구하지 못하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물이 꽁꽁 얼어붙고 고기를 잡지 못할 때가 온다. 그럴 때면 크고 날카로운 부리로 자신의 몸을 뜯어서 거기에서 나는 피와 고기를 새끼들에게 먹인다. 피가 응고되면 다시 살을 찢어서 새끼에게 피를 먹인다. 이렇게 엄동설한을 지내는 동안 어미는 서서히 죽어간다. 그러나 새끼들은 어미 새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겨울 동안 무사히 살아남는다.
희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매력이 없다.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교회이기에 외면당한다.
밀림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는 철학, 신학, 음악, 의학의 네 개 분야에서 박사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아프리카 밀림에 가서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여느 날처럼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그때 그를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방문객은 슈바이처 박사에게 물었다.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왜 이런 곳에 와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갑니까?”
사실 그렇지 않은가? 얼마든지 화려하게 살 수 있다. 존경과 명성을 한 몸에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이런 곳에 와서 고생을 하고 있는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슈바이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그렇게 안쓰럽게 보지 마십시오. 주님의 손이 되어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그렇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의 손이 되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따라가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면서 그를 섬기면 하늘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여 여기실 것이다. 예수님을 섬기는 길은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죽는 길이다. 없어지는 길이다. 내려놓는 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를 하늘에서 해같이 빛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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