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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검을 소중히 다루자(임계교회 장익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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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 4장 12절

사람은 칼에 의해 변화된다고 말합니다. 칼을 목에 갔다 대면 종교가 바뀔 수 있습니다. 회교는 칼을 목에 들이밀며 알라인가, 칼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 했습니다.

칼 앞에 아무리 자존심 센 사람도 무릎을 꿇고 이 칼 앞에 인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뀝니다. 교회 다니는데 속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는 칼처럼 예리한 말씀의 참 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칼은 어떤 칼 보다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 어떤 칼 보다 예리하고 단단한 말씀의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칼로 우리는 세상을 정복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똑같은 칼이라도 누가 그 칼을 쓰느냐에 따라 생명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칼이 건달의 손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이 해를 입고 칼이 군인의 손에 있어 통제된다면 조직과 나라는 안정됩니다. 칼을 자기 맘대로 함부로 쓰면 건달입니다. 칼을 함부로 꺼내도 건달입니다. 누군가를 만나자 마자 다니엘이 어떻고 계시록이 어떻고 하면 다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칼은 두려운 것이고 영적 건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관계를 형성하여 친교를 나누고 칼(말씀)을 보여주면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관계와 친교가 형성되기 전에 칼부터 꺼내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무기일수록 철저히 통제되고 숨겨지는 것이 원리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기 자랑을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이론과 자기 깨달음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씀의 칼을 자랑하고 함부로 휘두르는 사람은 진정한 칼잡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돈과 칼은 피도 눈물도 없으며 오직 정확하게 주권자에 의해서 쓰여집니다.

정확하지 않으면 칼이 사람을 죽이고 돈이 교회와 청년과 어린이를 베어놓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칼은 수술용 칼입니다. 맹장수술을 해야 하는데 쓸개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위를 자르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병든 것들이 칼(말씀)로 치료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칼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예리한 칼일수록 주의깊게 다뤄야 합니다. 감정이나 동정으로 다루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8:12).

칼을 쓰는 자는 좋은 일이나 선한 일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칼은 변화시킵니다. 자르고 깎아 아름다운 모양을 내는데 사용 됩니다. 돈 가지고 장난치고 말씀의 칼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과 교회는 오히려 돈과 칼에 의해 해악을 당할 것입니다.

만약 누가 말씀의 칼을 망치 다루듯 마구 사용한다면 그 칼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노릴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쪽만 날이 있는 것을 도(刀)라하고 양쪽에 날이있는 것을 검(劍)이라 합니다.

조선의 왕은 무신(武臣) 들에게 도가 아닌 검을 하사했습니다. 그 검은 실질적으로 전쟁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직각의 사인검이었습니다. 이유는 양날검으로 스스로를 연마하면서 반역을 획책하지 말고 자기관리를 하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왕 되신 우리 하나님 역시 한쪽 날만 있는 도(刀)를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 양쪽에 날이 있는 검(劍)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든면에서 실용적은 도(刀)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검(劍)을 주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전쟁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가르치고 치기만 하는 도를 가진 하나님의 군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검을 가진 하나님의 군사로서 항상 칼날의 한 방향은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를 말씀의 검으로 다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칼을 다루는 자이면서 칼 자체이기도 합니다.

귀한 것은 집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집이 있습니다. 칼은 귀하고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머무는 곳에 말씀이 머무는 곳이 되도록 환경을 만들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올라갈 때 두 가지를 특별히 간수했습니다. 그것은 칼과 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22:6). 우리 손에도 불이 있고 칼이 있습니다. 이 둘은 귀하게 다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칼과 불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뤘습니다. 불만 꺼뜨려도 칼만 집어던져도 번제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양심을 속이지 않고 자기 생명처럼 불씨를 간수했고 날카로운 칼을 가슴에 품고 모리아산에 올라갔습니다.

성도의 가슴에 있는 성령의 불을 온 정성을 다해 지켜 꺼뜨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성도의 가슴에 숨겨진 말씀의 검을 매순간 갈고 닦아 빛이 나게 하여 마귀의 침노를 막아내어 우리 모두 승리자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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