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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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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며 던진 성경』 

  "여러분, 지금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교하는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영접하고 구원에 감사하는 영혼들을 볼 때

저는 선교사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교하는 신앙으로 세계 곳곳에 나아가 복음 전할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학교를 찾아 온 선교사의 말을 듣던 토마스의 마음은  선교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주님, 지금까지는 제가 웨일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제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제 길을 열어주세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었다. 그리고 그는 곧 바로 런던선교회를 찾아가 중국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신청하였다.

 

1863년 5월 "토마스씨, 런던선교회는 당신을 중국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연락을 받았을 때, 토마스는 중국선교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격하며 찬양을 드렸다.

 

"캐롤라인 드디어 내가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었소!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오."

 

그는 약혼자인 캐롤라인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선교사로 떠나야 하는 토마스는 캐롤라인과 결혼한 후 곧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드디어 토마스 부부는 1863년 7월 21일 그래이부센드 부두에서 출발하는 폴메이스호를 타고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한 토마스 부부의 선교활동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여보, 맛이 없더라도 건강을 생각해서 좀 먹어봐요"  남편인 토마스의 염려하는 말에 임신하여 입덧에 시달리던 캐롤라인은 "입맛이 없어서 음식이 먹히지가 않네요."라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설상가상으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의 선임선교사인 무어헤드와의 불화로 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토마스 부부는 "주님, 저희들에게 이곳 중국에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심으로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중국에서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그렇게 중국사역을 진행하던 토마스는 1864년 3월에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구라는 곳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런데 토마스의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미국선교사 부인이 갑자기 풍토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곁에서 본 캐롤라인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연유로 캐롤라인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 혼자서 태중의 아기가 유산되는 고통을 겪었다.

출장을 떠났던 토마스는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태중에 있을 아기를 생각하며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여보, 내가 돌아왔소. 떠나 있는 동안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순간 토마스는 섬뜩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면서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급한 마음으로 "캐롤라인! 캐롤라인!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자고 있는 거요?" 이렇게 말을 하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 토마스는 "아- 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캐롤라인이 누워있는 곳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있었다. 그의 아내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캐롤라인 내가 왔소! 눈을 떠 봐요 내가 왔단 말이오." 그러나 싸늘한 몸으로 누워있는 그의 아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캐롤라인은 아기가 유산된 후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가운데

이미 일주일 전에 혼자 죽어간 것이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토마스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그는 선교에 대한 회의에 빠져갔다. 마치 미친 사람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캐롤라인! 나를 두고 당신 혼자서 가면 어떻게 하오. 하나님 캐롤라인은 우리의 사랑스런 아기를 유산시키고 혼자서 죽어갔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내가 여기에 왜 왔는데요. 중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고향과 부모를 떠나 이곳까지 왔는데.

당신이 내게 한다는 것이 고작 이것입니까? 내 아내와 자식을 데려가는 것이 당신의 뜻이냐구요.

저와 캐롤라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선교사로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저도 데려가지 왜 저 혼자만 이렇게 남겨두셨습니까?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하나님 당신은 사랑이시라고 했잖아요. 정말 당신이 사랑이신 분이 맞아요? 그런 분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인지 이제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많은 날을 헤매어 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의 분노와 원망은 가라앉지 않았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편지를 썼다."처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그는 런던선교회에 선교사 사직서를 제출하고 중국 해상세관에 통역으로 취직하였다. 세관에 취직한 그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하여 일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에 토마스는 우연한 기회에 조선인 '동지사' 즉, 조선시대에 동지를 전후하여 중국에 공물을 갖고 보내던 사신 일행을 만나서 조선 내에서의 가톨릭교도들에 관한 수난을 듣게 되었다.

동지사로부터 가톨릭교도들이 참수당하는 소식을 듣게 된 토마스의 마음에는 또 다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졌다. 그리고 조선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동지사의 말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선교지는 조선이다. 죽어가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어! " 토마스의 마음은 조선에 대한 선교열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한 생각으로 마음을 불태우고 있을 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윌리엄슨 선교사가 그를 찾아왔다. "토마스, 계속하여 세관에서 통역하는 일만 할 생각이오? 당신이 아내를 잃은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떨쳐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당신은 중국어와 러시아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능통한데 하나님께서 왜 당신에게 이러한 언어의 재능을 주셨을 것 같소.

복음 전하는 것에 사용하도록 함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아도 세관에 사표를 내려던 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이제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토마스의 모습은 조용하지만 복음전하기 위해 준비된 결연한 모습이 보였다.

 

"윌리엄슨, 사실은 얼마 전에 조선의 동지사를 만나 그곳 소식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 조선에는 많은 가톨릭신자들이 예수를 믿는 것으로 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오작통이라고 하여 한 가족이 예수를 믿으면 다섯 가족이 죽음을 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하고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제 마음은 어떻게 하면 제가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답니다. 저는 중국에 복음전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가 조선에 복음 전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럼 내 당장 조선에서 나를 찾아온 두 사람을 만나게 해 드리지요." 윌리엄슨의 말에 토마스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윌리엄슨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두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이 분은 토마스 목사입니다. 인사하시지요."

윌리엄슨의 말을 들은 두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저는 김좌평입니다. 저는 최선일입니다." 하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토마스 목사입니다.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예수)교를 전하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조선에 가서 야소교를 전하겠다는 토마스의 말에 놀란 두 젊은이는 "예..예.. 안됩니다. 조선은 지금 박해가 심해서 야소를 믿던 우리도 목숨을 걸고 피해 왔습니다. 조선에 있다간 칼날에 맞아 죽습니다."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젊은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토마스 목사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칼날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다시 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말에 "글쎄 돌아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라니까요." 두 젊은이는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였다. 

 

"그건 다시 사는 겁니다. 거듭나는 거지요." 젊은이들은 토마스 목사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는 듯 어안이 벙벙하였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하고 토마스 목사가 말을 꺼내자 "마태복음...?"하면서 젊은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경을 안가지고 계십니까?"

"없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책과 교리문답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성경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두 젊은이가 합창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책을요? 저를 조선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제가 그들에게 성경책을 갖다 주겠습니다." 결국 두 젊은이는 토마스 목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조선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였고 윌리엄슨 목사는 토마스 목사에게 다량의 한문성경을 공급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1865년 9월 4일에 토마스 목사는 두 젊은이와 함께 다량의 한문성경을 실은 목선을 타고 제1차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중국의 지포를 출발한 그들은 10일 만에 황해도 창린도 자자리 군포에 도착하였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을 본 토마스는 "안녕하세요. 저는 야소교 목사입니다. 이 책은 야소교 책입니다. 받으세요!" 외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내밀었다.

 

"에구머니나, 이상하게 생긴 코쟁이가 어떻게 우리말을 하지?"

 

주민들은 토마스 목사가 건네주는 성경책을 받아들었다. 토마스 목사는 백령도 부근의 섬을 2개월 반 동안 돌면서 섬주민들에게 성경책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가르쳤다. 토마스 목사는 동시에 섬주민들에게 많은 조선말을 배웠다.

 

토마스 목사가 돌아간 후 관가에서는 성경책이 법으로 금하는 천주학쟁이들의 책이라고 하여 백령도 참사로 하여금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회수하도록 하였는데 그때 거두어들인 책이 99권이나 되었다.

 

토마스 목사 일행은 서울로 가서 전도할 생각으로 범선을 타고 한강을 향하였으나 난데없는 폭풍으로 접근치 못하고 표류하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왔다. 이 일로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던 토마스 목사는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동지사인 평양감사 박규수대감을 만나 "저는 야소교목사 토마스입니다." "오~오 어떻게 조선말을 잘 하시오? 놀랍소이다." "작년에 조선에 가서 배웠습니다."

"난 박규수라 하오." "지난번에 조선에 가서 천주교 박해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들었습니까? 지금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소이다." "저는 또 조선에 갈 생각입니다."

"조선이 그렇게 좋더이까?" "저는 조선에 가서 야소를 전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마구 뜁니다.

대감에게 제가 이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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