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목사
◈ 목사의 부업에 대해서
* 요사이 문화를 말하면서 '목사의 부업'의 정당성에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근거로서 내세우는 예가 사도바울도 자비량으로 살지를 않았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맞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이것을 예수 안에서 복음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도바울이 왜 자비량을 했는가?
그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인가?에 대해서 까지 성경적 접근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 사도바울에게는 먹고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울의 삶 자체가 십자가에 대한 계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의 삶을 사는데, 먹을 것을 받을 수도 있고, 또 굶어죽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계시의 차원에서 스스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이 사도의 입장에서 계시한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자비량 -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
* 이러한 사도바울의 계시는 마태복음 10장과 연결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마 10: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 이러한 예수님의 원리가 디모데전서에 나와있는 '가르치는 은사'와 연결이 되어야 제대로 된 신약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다른 책이 없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말한 책이 '직무론' 이라고 해서,
벨기에의 스힐레벡스라는 카톨릭 신학자에 의해서 언급이 되었고 말이다.
* 그러나 죠지 래드나 도날드 거스리 등의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에 목사들이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99%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보았는고 하니, 예수님 이후에 이것이 두 개의 노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조직하는 노선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방랑하는 노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잡으라는 것이다.
아니 어느 누가 이것을 골라잡는가?
그렇게 해놓고 신학자라고 하겠는가?
* 여러분은 이것을 교인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두 벌의 옷을 가지지 말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지금 당신의 장롱 속의 옷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과연 한 벌밖에 없는가?
* 아니면 카톨릭처럼 두 가지 성직제도를 두어서, 신부 제도와 수도사 제도로 나누어서 할 것인가?
수도사들은 월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병원 같은 곳에서 봉사만 하는데, 그 봉사료를 신부들이 거두어서 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봉사와 명상만을 하고 말이다.
* 그러니 오늘날 개신교도 카톨릭과 똑같이 한다는 것이다.
은사가 다르다는 것이다. 개척교회를 하는 은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은사가 있다면 신학을 하지 말고 건축학과를 나와야 하지를 않겠는가?
* 이 두 가지를 매치를 시키는 책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부업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과연 목사의 부업이 가능한가?
결론은 너무나 뻔하다는 것이다.
개척교회를 시작하는데, 돈은 없고, 그리고 심방 할 교인도 없으니,
주일은 교회에 봉사하지만 그래도 다른 날은 돈을 벌러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자비량이 아니냐는 것이다.
* 과연 이런 논리가 맞는가?
항상 무슨 설교를 하든지 간에, 마지막에 십자가가 나와야 이 십자가를 믿고 그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닌가?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크림이 아니라 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이것을 목사의 부업에다가 적용을 시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성경 자체의 목적이 목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바로 '같이 죽으러 가자' 라는 말이 아닌가?
*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목사를 살리는 쪽으로 성경을 보면,
장로나 집사는 공격의 대상이 되지만, 목사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목사를 살리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집사나 장로는 천당 가고 목사는 지옥 가는 것이 아닌가?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피를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믿는 판사가 있다면, 판사를 하면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고, 판사를 하다가 죽으라는 것이다.
의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것을 그대로 목사직에다 그대로 적용을 시켜보자는 것이다.
목사라고 살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 그런데 여기에 무슨 '부업' 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는가? 살려고 하는 수작이 아닌가?
성경자체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는데,
목사들은 그리스도도 증거하지만 목사직도 증거한다고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목사가 하도 많다보니 동지, 혹은 동역자 의식이 생겨났다. 목사라고 특별히 고생할 필요가 있는가?
목사도 살아야지. 그래 힘든 것이 있으면 다 이야기해라. 모든 것을 다 안아 주께. 우리들끼리 힘을 합치자.
* 이것은 일종의 '노동조합' 이라는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 이고 말이다.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러나 살기 위해서 소명을 이용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 사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러나 살기 위해서 소명을 이용하는 것은 죄이다 !!
* 살려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할 일은 복음전파와 기도에 전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자비량으로 일한 것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자비량으로 일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직 계시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감독직은 무엇인가?
디모데전서의 '일하는 소에게 멍에를 씌우지 마라' 라는 것은,
당연한 대가로 받을 수가 잇다는 것이 아니라, 월급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을 했다면, 부업이라는 말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생활이 어렵다면, 목사직을 잠시 중단을 했다가 돈이 생기면 다시 할 수는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은 죄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목사의 부업은 안 된다는 것이다.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 성경에서 '하나님의 원수' 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는 하나님 편이고, 바리새인들 편이 아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면 전혀 의미를 밝힐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과 목사의 직업관?
사도행전 18장
1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도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연보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장막깁는 일(Tentmaker)을 하면서 복음을 편만히 전했는데
이 상황을 오늘날 목사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요?
아니면 사도바울을 핑계로 주일에는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주중에는 아직 자립하지 못한 교회를 위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것이 옳은지요?
교회의 목사란 직책이 무엇인지요?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성도를 위해 기도만 하는 것이 목사인지?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3-15)
답변)
우선 초대 교회에서의 직분은 새삼 지정한 직분이 아니라
그 당시 종교성에 입각한 문화와 관습에 의해서
이미 형성된 직분체제를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이 중요한 겁니다.
마치 6.25 시절에 미군으로부터 구제물자를 받는 남한 사람들이
집에 있는 빈 집기나 깡통 같은 것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미군이 담아주는 밀가루와 우유가루를 받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복음이 중요하지 복음 전달의 수단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이 세상에 형성되는 그 어떤 문화와 관습을 거뜬하게 사용하시면서
복음만을 전하는데 차질이 없게 하십니다.
문제는 초대 교회에서는 그 직분 자체를 중요시하면서
그것을 교회 내의 권세로 간주하여
정치적인 것으로 교회 내부를 장악하려는 기운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난 것입니다.(고후 11장)
그 배후에는 돈과 생계와 명예욕 같은 것들이 작용한 겁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요한 3서 1:9)
쉽게 말씀드려서,
교회의 머리를 예수님에서 인간들의 정치력으로 끌어당겨서
그것을 자기 소유화하는 시도가
이미 초대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퍼져있습니다.
복음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분위기가 퍼지게 된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회적 직분일 뿐입니다.
직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에 있어 사회적 인식을 고려해서
사회가 용납하는 방식으로 목사라는 전문직을 교회에서 안수해서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직이나 장로직을 없애다고 해서
결코 복음적이지 않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목사직이나 장로직을 고수하는 것도 또한 결코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을 과연 자기 직분보다 복음을 우선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에 답변해 보겠습니다.
돈을 벌어 생계하기 위한 전문 직업으로서 목사인식은 복음 우선이 아니라
자기와 가족의 생존 우선이기 때문에 복음을 쉽게 훼손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설교자로 있는데
부교역자가 더 복음적이고 설교를 잘 한다면
될수 있는한 그 사람에게 설교를 맡기는 것이
진정 직분보다 복음을 우선시하는 설교자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부교역자보다 현 담임 목사를 더 원하고 있다면
부교역자를 설교자로 세우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것은
교인들의 공동체이기에 공동체의 의견을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역자 소유가 아니라 교인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만약에 교인들이 비복음적인 설교를 듣기를 원한다면
복음을 아는 교역자는 설교하지 말고 그 강단에서 내려와야지,
다음과 같은 말해서는 아니됩니다.
"나 싫은 사람, 이 교회에서 다 나가!"
심판은 예수님에게 있지 목사에게 있는게 아닙니다.
목사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는 복음만을 전해야 하지만
목사 본인이 목사라는 직분에 억매여서
다른 일을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오버 액션입니다.
괜히 순교의 폼을 잡지 마세요.
순교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몰아넣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목사 깡통이나 집사 깡통이나 미군 구제물자 받는 것에는
하등 차이가 없듯이 생활을 영위하겠다고
직업을 갖고 일하는데서 하등 차이가 있으면 안됩니다.
목사란 교회에서 복음 전하는데 지장이 생기기 않도록 해야한다는 점 빼놓고는
다른 일반 교인들과 차이나는 점을 만들어서는 아니됩니다.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살후 3:10)
뭐든지 안 놀고 열심히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축복입니까!
그 축복을 썩히면 안됩니다.
주말이 아니라 주중이라도 일자리 생기면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면
그런 기회와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런 일들 속에서 복음을 증거할 설교거리가 팍팍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꾸준히 공부 안하면 또 나태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