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왜 내게 배우는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는가?
도서출판 디모데
서문 가르침을 위한 큰 그림
하지만 이런 일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매주일 좋은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만큼은 아니다. 나는 전도는 거의 하지 않지만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제자반을 놀랍게 성장시키는 교사들을 보아왔다. 반면에 누군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리 열심히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지라도 형편없는 가르침을 극복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있는 곳에 모이기 마련이다. 교사가 지속적으로 그 필요들을 제공한다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로 그 제자반은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어떤 교회의 성장(혹은 그 반대)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변수가 사역 철학이나 혹은 패러다임이 아니라고 믿게된 이유다. 목회자의 신학이나 교회의 위치 역시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은 목회자의 가르치는 능력이다. 목회자가 설교를 잘 한다면 성장은 쉽다. 거의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목회자가 설교를 잘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드라마, 음악, 구도자에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 혹은 다른 어떤 전도 전략들도 실제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주일학교 제자반이나 소그룹 모임의 성장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변수는 교사의 가르치는 능력이다.
1.
빈약한 가르침/빈약한 교제와 활동2.
좋은 가르침/빈약한 교제와 활동3.
빈약한 가르침/풍성한 교제와 활동4.
좋은 가르침/풍성한 교제한 활동 만약 소그룹 모임이나 주일 제자반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몇몇 다른 방식들로 그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교사 자신이 성장 부진의 원인이라고 여겨 침체에 빠질 수도 있다. 어쩌면 지도자의 의사소통 기술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한 조직의 성장과 더 관련이 있다는 개념조차도 받아들이지 않고, 성장이 되지 않는 책임을 다른 요인에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의사 소통을 교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룹의 성장이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가르치는 능력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면,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사가 할 수 있는 가장 통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가르침이라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 훌륭한 가르침이란 훌륭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양육되던 그곳에 그러한 훌륭한 가르침이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흥미로웠지만), 그 제자들이 세상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었다. 소그룹과 제자반의 사람들이 그들이 속한 세상을 바꾸어 놓을 때 교사는 좋은 가르침의 사역을 해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개종자를 만들라고 하지 않으시고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다(마 28:19-20). 기독교 교육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남성들과 여성들, 소년들과 소녀들이 있다는 것은 내세워 보일 수 없다면 교사는 실패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나 제자반을 배가하는 것조차도 우리를 성공적이게 하지 못한다. 통찰력과 실제 삶과의 연관성에 대해 모든 사람이 찬사를 보내는 가르침이 훌륭한 교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좋은 가르침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 핵심은 바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사람들이 월요일 아침에 다르게 살도록 돕는 것이다. 제자를 만들어내는 가르침이 좋은 가르침인 것이다.
무엇이 핵심인가?
이것에 대해 수년 동안 묵상한 이후에 나는 더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반 안에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도 진짜 핵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사람들이 제자반 안에서 감동을 받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밖에 나섰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사람들이 얼만 높이 뛰어오르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지쳤을 때 얼마나 똑바로 걷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제자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가정과 직장, 생활과 인간 관계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만큼은 아니다. 핵심이 되는 것은 학습자들이 즐거워하거나 흥미롭다고 느끼거나 자극을 얻거나 혹은 그 밖의 무엇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월요일 아침 그들이 이전과 다르게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인 것이다.
1 제자반 밖에서의 학습자
제자란 무엇인가?
제자를 만드는 교사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교사는 사람들이 제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 사람들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교사들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만큼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
근본적으로 ‘제자’라고 하는 성경의 단어는 학습자 혹은 학생을 의미한다. 물론 평생 학생으로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잠시 동안 학생이 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렇게 한다. 그들은 대개 더 큰 목표를 마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배움의 터에 있도록 부르셨다. ‘제자’라는 단어는 정체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장하고 발전하고 목표를 이루며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이다.
‘제자’라는 말은 또한 따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예수님 시대에는 선생이 여기저기를 다니며 가르치는 것이 관습이었고 학생들이 말 그대로 그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들은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질문을 하기도 하고 대화를 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랐던 제자는 그분의 길을 걸었고 그분을 본받고자 했던 것이다.
교사 스스로 ‘제자’에 대한 자신이 정의를 내려볼 것을 권한다. 오늘날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해보라. 제자됨의 최소한의 필요 조건은 무엇인가? 가능하다면 이를 기억하기 쉬운 방법으로 전달한 수 있는 언어적 시각적 수단들을 고안해보도록 하라.
결국 빌 하이벨스 목사가 내린 정의를 발견했는데, 그는 각기 G로 시작되는 다섯 가지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은혜(Grace). 제자는 은혜를 경험하였으며 은혜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다.
성장(Growth). 제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성장하는 사람이다.
교제(Group). 제자는 그리스도인 사이의 교제와 모임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다.
은사(Gift). 제자는 자신의 영적인 은사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가지고 사역을 돕는 사람이다.
섬김(Good Stewardship).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의 시간과 달란트 그리고 다른 자원들을 드려 섬기는 사람이다.
하이벨스 목사의 설명도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유용한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지만 역시 충분히 상세하지 않은 것 같다. 제자도에 있어서 일상 생활과 관련된 부분을 분명하게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친구 랜스 위트의 도움으로 ‘제자(DISCIPLES)'의 첫 글자를 따서 풀이한 형식으로 대략적인 정의를 만들어보았다. 이것을 여러 세미나에서 가르쳤고 불필요한 어떤 혹시 빠뜨린 것은 없는지 등등에 대해 조사를 했다.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음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최종판을 결정지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 성향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제자의 성경적인 모델에 상당히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 결정적이라고 생각되는 아홉 가지 성향은 다음과 같다.
D 제자는 매일의 삶에서 훈련된(Disciplined)다.
I 제자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사귐(Intimate Friendships)을 갖는다
S 제자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자존감(Self Esteem)을 갖는다
C 제자는 공동 예배(Corporate Worship)를 드리는 데 참여한다.
I 제자는 친밀한 가정 생활(Intimate Family Life)을 이룬다.
P 제자는 하나님을 향한 참되고 분명한 열정(Passion for God)을 갖는다
L 제자는 어떤 형태로든 평신도 사역(Lay Ministry)에 참여한다.
E 제자는 복음 전하는 데 관심(Evangelistic Interest)을 갖는다.
S 제자는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Sacrificial Giving)에 헌신한다.
어떤 교회나 제자반 또는 소그룹을 위한 기막힌 훈련이라도 이와 동일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가 사역을 통하여 만들어내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스스로 작성한 것이 위와 다르다고 해도 관계없다. 중요한 것은 만들어내려고 하는 유형의 사람들과 관련된 명확하게 정의된 목표를 갖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목표를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훈련됨
9개의 도미노가 한 줄로 늘어선 것을 상상해보라. 목표는 9개 모두를 쓰러뜨리는 것이지만 오직 하나만 건드릴 수 있다. 어떤 것을 밀어뜨리겠는가? 바로 맨 끝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의견으로는 ‘매일의 삶 가운데 훈련이 된다는 것’은 맨 끝에 있는 도미노와 매우 흡사한 것이다.
훈련이라는 말에 대해 사람들은 대개 부정적인 느낌을 갖는다. 하지만 여기서 훈련에 대해 언급할 때는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훈련(혹은 습관)을 무엇보다 염두에 둔 것이다. 사람들이 거의 날마다 홀로 하나님과의 시간을 갖도록 가르칠 수 있다면, 그들이 제자로서의 다른 8가지 특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러한 습관을 발전시키도록 도울 수 없다면 우리는 성경적인 제자들을 만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훈련은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관련해서 아마 가장 오해되고 있는 측면일 것이다. 사람들은 때대로 ‘원하는 것을 하는 대신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것’, 혹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편이 나은 것을 하는 것’을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중간 단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언제든 원하는 때에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규칙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성 어거스틴이 설명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야 한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진정으로 원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또한 자주 그렇게 하고자 하며, 원하는 만큼 섬기며 그것도 아주 많이 섬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율법이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그 마음의 소원을 따라 이 모든 것을 하는 사람들을 만들고자 애쓰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 이외에 무엇을 더한’ 복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듣게 될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오직 은혜만으로’의 복음은 구원의 개념이나 제자도의 개념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은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만의 생각으로 사람들은 복음을 ‘은혜 이외에 무엇을 더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가르침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분별해야만 한다.
우리가 죄의 노예되었다고(롬 7:7-25) 하는 성경의 관점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이 구절들을 우리가 정말로 이해하고 믿는다면 중독자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고 얘기할 때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은 변화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알코올이나 마약 혹은 그 밖에 흔히 말하는 중독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죄는 모두 중독적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죄를 저지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다.
첫째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마음 속 가장 깊은 소원함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바꾸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2장 13절은 “너희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유진 피터슨은 12절과 13절을 다음과 같이 의역하고 있다. “구원 얻은 삶 가운데 힘을 입으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 마음을 기울이라. 그러한 힘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 그분께서 자신에게 가장 기쁨이 되는 것을 이루고자 친히 역사하시는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능력인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하나님이 주신 소원들을 정기적으로 살펴보게 해야 한다. 거의 매주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라.
․기도 생활에 있어 바꿀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무엇인가?
․삶에서 가장 개발하고 싶은 개인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성경과 관련하여 가장 큰 열망과 소원은 무엇인가?
․배우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가?
또한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을만큼 그분을 잘 알기를 원한다.
․나는 이러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이해하고 암송하며 내 삶에 적용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나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이러한 진리들을 깊이 깨닫기를 원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의 가치관을 전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에는 교사 자신이라는 본보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훈련을 해나가도록 동기를 유발시킬 것이다.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자를 만드는 것은 책무를 수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은 책무는 율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부분은 ‘자신의’라는 표현이다.
이러한 일이 소규모 그룹이나 제자반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에 대한 내용을 공부한다고 가정해보자. 교사가 그 그룹에게 매일 성경을 어느 분량씩 읽도록 권유하면 모두들 잘 이해하고는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교회문을 나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그들이 하고자 정한 바를 해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하고자 정한 것에 대해 책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매일 성경을 읽겠다고 하고 그것에 대해 우리가 그들이 그대로 하는지를 확인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러한 경우 그들이 하겠다고 한 것을 지속적으로 이행하는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이번 주에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아니오.” “그러시군요. 뭐 마음 불편해 하지 마세요. 저도 읽지 않았거든요”라는 식으로, 하고자 정한 바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을 바로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실패한 그룹을 본 적이 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결려해야”(히 10:24)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책무를 확인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실패를 만들어낼 뿐이다. 사람들이 교사에게 그들이 하도록 정한 것을 지키는지 확인해주기를 요청한다면 반드시 확인을 하라. 그들이 정한 것을 어떻게 해나가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물어보라.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커가기 위한 특징들이 되는 매일매일의 훈련을 개발하도록 도우라.
궁극적으로 제자반에 대한 사역은 제자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제자반의 각 구성원들이 서로서로 사역을 돕는 것이다. 매일의 삶 가운데서 자신을 훈련해나가도록 서로를 돕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헌신된 제자가 되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사람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훈련을 해나가도록 서로를 돕는, 프란시스 쉐퍼가 말했던 것과 같은 ‘더 못한 사람이 없는’ 평등한 조직으로 교회를 창안하셨다.
이러한 관계들은 제자가 되어가고 또한 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을 이룬다. ‘서로’의 관계는 신약 교회의 정신이고 중심이다. 실제로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다음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친밀한 관계
언젠가 오랜 친구 랜스 위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이렇게 물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엇을 열망하는지 자네 알고 있나?” 자신이 그에 대한 답을 이야기하려고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가 답을 말하도록 가만히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대학 시절 누렸던 그런 종류의 우정을 열망하고 있다네.” 그 말이 옳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영혼은 이러한 우정을 간절히 바란다. 우리 영혼은 누군가에게 가까워지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한 부분이다. 삼위 일체의 세 인격이 서로 관계를 가지고 계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우리도 관계를 위해 지은바 된 것이다.
성경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관계들은 교회 생활의 기초를 형성한다. 더불어 사랑은 하나님 백성들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리라고 가르치셨다.(요 13:35)
사랑은 실제의 누군가와 실제의 나를 연결하는 것이다. 위장이나 숨김이나 속이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누군가와 실제의 내가 연결된 것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들 자신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그분을 대신하는 그리스도인의 사신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인 서로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교인들은 사랑 안에서 영혼과 마음의 이어짐보다는 정중한 거리감으로 특징지워진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친구들과 내가 대학 시절 경험했던 것과 같은 우정이 함양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이러한 우정은 그들 자신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더불어 이해하며, 친밀한 우정을 함양하는 것을 돕는 데 매우 의도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우정을 형성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 우리는 참된 사랑과 참된 우정의 특성들을 가르치고 보여주며 사람들이 친구란 다음과 같은 존재임을 이해하고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
F 함께 있는 것이 재미(fun)있고,
R 피상적이지 않고 실제적(real)이며
I 관심이 가고(interested) 관심을 갖게(interesting)하며,
E 격려가(encouraging)되며,
N 친절하지만(nice) 필요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고(not nice),
D 의뢰할 만한(dependable) 존재다.
자존감
자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행동을 제어하는 자동 온도 조절 장치와 매우 흡사하다. 외부 압력이 어느 한 방향으로 행동을 자극할 수는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한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아상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의 자존감의 단계를 넘어서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에 따라 생활하는 성향이 있다.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성도와 같이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로 여기면 세상을 개혁시키고자 하는 성향을 갖는다.
이러한 점들을 인식하고서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내부적인 것을 통해 외부적인 것을 끌어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그들의 행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도록 격려해야 한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부정확한 견해를 버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도전해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살전 1:4), 성도(엡 1:5), 나그네와 행인(벧전 2: 11), 하나님의 종(벧전 2: 16), 후사(딛 3: 7), 소금과 빛(마 5:13-16) 그리고 하나님의 의(고후 5:21)임을 믿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제자로서 우리의 참된 신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음에서는 위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가운데 세 가지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전체적인 그림은 아니지만 성경적 자아상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차이를 만들게 되는 지를 이해하는 데는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바른 자아상을 확립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심을 받은 자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 두 번,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17:5).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한하신 지혜 가운데 예수님께서 때때로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시고 확인하실 필요가 있으셨다는 것을 아셨다고 보여진다. 예수님도 가끔씩은 아버지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 1:11)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사가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로 여기는가? 아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의 자녀라고 여기신다고 스스로 느껴지는가?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라고 여기는가 그렇지 않다면 바로 지금 하나님께, 자신에 대해 가진 생각이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자라고 하는 진리로 그 생각을 바꾸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런 다음 제자반 사람들이 동일한 기도를 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자아상이 확립되기 전에는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
성도는 너무나 경건하고 훌륭해서 걸을 때 공중에 떠다닌다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스러운’이라는 말은 ‘분리된’ 혹은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 사과 한 바구니를 상상해 보라. 그 가운데 몇 개를 꺼내면 그것들은 나머지 것들과 분리되는 것이다.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것들은 ‘성스러운’ 사과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스러운’이라는 말의 핵심적인 의미다.
성도로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교회라고 불리는 구별된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사고 방식 그리고 죄에서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 작은 한 부분만 제외하고는 그림 전체가 흑백인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장미 한 송이나, 자동차 한 대 혹은 어린아이 한 명에게, 보는 이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디자이너는 그 한 부분만을 채색하고 나머지 부분을 그대로 남겨둔다. 바로 이것이 성도로 사는 것,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채색된 형태가 그림의 칠해지지 않고 남겨진 부분에 대비되어 드러나듯이 우리의 삶도 칙칙한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믿는 자들이 다르게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는 자아상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삶이 외부적인 것은 자신의 자아상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성도로 보는 그 정도만큼 성도로 살아간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도라고 하는 개념에 친숙해지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교사들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요 17:15-19참조)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르치며 보여주어야 한다.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세상의 방식과 대비되는 확연히 구분되는 삶, 은혜, 친절함, 사랑과 의의 삶을 살도록 격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
사람들은 ‘의로움’에 대해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적당히 선한 삶 그리고 어느 정도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거룩함을 추구하며」에서 제리 브리지스는 요한일서 2장 1절 상반절을 인용하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함이라”에 대해 그는 요한이 “내가 이것을 씀은 너희로 죄를 많이 짓지 않도록 혹은 죄 짓는 것을 줄이도록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전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쓴다고 말하고 있다.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기준인 것이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는 것과 같이 자신을 보도록 격려하며, 그들이 매일의 삶을 그러한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앞에서 논의한 정체성에 대한 세 가지 표현-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성도 그리고 하나님의 의 -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묘사하는 하나님 말씀의 단지 몇 가지 예일 뿐이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자신의 제자반에 속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신분에 대한 다른 성경적 언급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고려해볼 만한 표현 한 가지를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두아디라 성이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즉 예배하는 자다. 이것은 다음 논의의 주제이기도 하다.
공동예배
어떤 의미에서 예배는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자신을 섬기는 것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어야 한다. 예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가 아닌가에 관해 자주 이야기한다. 이는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예배의 핵심은 우리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공연을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즐거웠는가?”를 묻는 대신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셨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런 물음은 아마도 예배의 형식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전통적인 것, 현대적인 것, 복음적인 것, 혼합된 것 등등 수많은 예배 형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우리 자신의 기호와 선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배는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게 여기시는가에 대한 것이며, 그분은 예배의 형식보다는 우리의 심령 상태에 더욱 관심이 있으시다. 나는 하나님께서, 록음악으로든 바하의 곡이로든 사람들이 어떤 것으로든 그분을 예배하는 것에 기뻐하실 만큼 다양성을 좋아하신다고 믿는다. 하지만 예배에 있어서의 다양성이 우리 자신의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방식은 다양한 기호를 가진 각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효과적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이와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왜 서로를 사랑하는지 특히 서로의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그녀의 눈과 지성 그리고 영적인 견고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과 인격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상의 칭찬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가득한 참된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도록 격려해야 한다.
친밀한 가정
모든 사람들이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서 입으로만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첫 번째, 가족이 두 번째, 그 나머지는 그 다음이다.” 하지만 너무 쉽게 그렇게 이야기해버린다. 우리 각자가 진정으로 세상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우리의 책임이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 증거가 드러나 보일 것이다.
너무나 많은 남성들이 단순히 각종 세금 고지서를 해결하고, 다른 여성과의 잠자리를 피하며 그리고 절대로 이혼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책임질 줄 아는 그리스도인 남편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러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추론한다. 이는 ‘암’이라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 결코 그것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비논리적인 것이다. 이것을 질병 치료와 관련된 책자에서는 ‘부인’이라고 설명한다. 문제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결코 옳지 않다.
결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단순히 이혼하기 않겠다는 결심 그 이상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행복한 결혼 생활이 우리 삶의 가장 커다란 열망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을 요구한다. 제자도에 관한 책들은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모든 성경 공부와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사람들 즉 더 나은 남편, 아내, 부모 그리고 자녀가 되도록 돕는 것이어야만 하며, 바로 그것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사랑이 넘치는 훌륭한 가정을 가진 제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를 보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제자들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에 귀기울여 듣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하셨다. 실제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전력은 아마도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들을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 역시도 사실이다. 무너져 가는 결혼보다 더 교회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것은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은 기독교가 참으로 진리고 진정으로 다르다면 기독교인의 가정 안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날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비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결혼 생활에 대해 그 어느 것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책이 가정에 대한 책이 아니고 견고한 결혼과 훌륭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자세히 설명할 만한 여유도 없지만, 훌륭한 가정을 만드는 데 있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 정말로 더 지면을 할애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건전한 가정을 어떻게 이루어가는지 가르치는 것은 교사가 어쩌다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거의 매번 성경 공부 시간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다. 가정은 진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첫 번째 영역이다. 따라서 교사는 성경 본문을 가정에서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정말로 거의 매주 강조해야 한다. 이사야 55장을 공부하던지, 산상수훈을 공부하던지 아니면 에베소서 6장을 다루던지 가정에 대한 적용이 있어야 한다. 더불어 교사는 가정과 결혼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정기적으로 특별한 강의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매년 혹은 2년마다 이런 종류의 주제들을 연속적으로 다룬다. 교사들도 동일하게 해야 한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자신의 결혼과 가정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관계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필요한 전문 지식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도움과 충고를 구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때때로 상황에 맞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책 등을 추천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사람들에게 가정이나 결혼과 관련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 각종 세미나나 모임 등에 참석하도록 권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사는 제자반 안에 개인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를 감지하고 상담자를 추천해주어야 한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제자반 사람들의 가정들과 자기 자신의 가정이 훌륭한 가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화목한 가정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불행히도 모든 제자들이 다 견고한 결혼과 가정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제자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데도 어떤 이유에서건 좋은 가정이라는 목표를 성취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참으로 바라고 애쓰는 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들의 배우자가 원하지 않거나, 과거에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겪었던 일로 두려움을 갖고 있다거나, 아니면 과거에 저지른 실수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거나, 그 밖에 다른 이유들로 인해 그들의 가정은 행복한 장소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그 모든 것이 마음먹는 대로 될 수는 없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이를 인식하고 제자반 사람들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
사람들에게 “안돼, 절대 안돼”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기독교의 가르침과 예배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장 깊은 영적 갈망을 깨닫도록 도와야 하며, 그러한 갈망들이 만족되기를 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결혼 이외의 이성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인 남성에게 마음으로 가장 깊이 열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라. 아마도 그는 그 누구인가와 깊이 맺기를 간절히 원하며, 사랑 받고 용납되기를 원하며, 상대방과 감정적으로 결합되기를 원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또한 틀림없이 헌신된 결혼 관계 안에서 그렇게 되기를 더 원한다는 것과 그러한 바램을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유감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그러면 이런 곤경에 처한 사람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 사람을 대면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안 된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라.” 가장 합당한 기독교는 이 사람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영적인 갈망을 일깨우고 그 어떤 것을 두고도 타협하지 않도록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에는 분명히 정당한 자기 관심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것이다. 몰래 하는 입맞춤은 비교될 수가 없다. 더욱이 전능자와 연관을 맺는데서 오는 흥분만이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멀리 피할 수 있게 하는 충분한 동기가 되는 것이다. 더 깊은 열정으로만 그보다 적은 정욕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 강력한 선한 열망을 발전시킴으로써 악한 소욕을 이겨야 한다.
대안을 고려해 보라. 무감동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이외의 것 말이다. 오늘날 너무 많은 교회가 무감동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데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감동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정적이 되기를, 하나님을 아는 그리고 오직 그분을 아는 것으로만 생성될 수 있는 아드레날린을 정기적으로 흠뻑 마시기를 원하신다.
무감동하고 흥미를 끌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로는 결코 세상을 복음화 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드레날린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함께 모일 때마다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아드레날린으로 채울 필요가 있다. 성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드레날린으로 그 심장이 고동치는,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한 어떤 교사들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 그들에게서 귀기울여 듣고나면 나의 심장도 역시 고동쳤다. 반대로 고함 치고 소리를 질러대지만 나를 감화시키지는 못한 교사들도 있었다. 열정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사람들마다 다양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드레날린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을 지루하게 여기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하지만 특정한 예배 형식이나 어떤 다른 외부적 요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고리타분한 오래 된 찬송가를 부를 때에도 흥겨운 성가를 부를 때만큼 아드레날린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가득한 심령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사람들의 눈을 끊임없이 예수님과 그분에게서 샘솟는 생명에 돌리게 함으로써 그들의 가장 깊은 갈망, 곧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 불행히도 너무나 자주 우리는 열정도 없고, 흥미를 잃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이에 대해 존 파이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가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장난감 병정들?
착한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
부지런한 근로자들?
훌륭한 교회 성도들?
열정을 가진 사람들?
‘제자’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문구에서 P자(Passion for God)를 결코 잊지 말라. 그것이 없이 교사는 꼭두각시 인형이나 바리새인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우리는 심령의 사람, 아드레날린의 사람‘, 열정의 사람들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평신도 사역
자기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알며, 그 은사를 다른 은사와 구별하고 분석하고 설명할 수는 있으나 사역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는 사람과 “저는 제 은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냥 사람들을 사랑합니다.”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지만 열심히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 이 둘 중에서 교사로서 어떤 사람을 더 원하겠는가?
물론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제 은사는 말이죠...”라고 주저함이나 자만함 없이 자신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은사가 필요한 영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과 더 일하고 싶다. 정말 그러길 원한다. 하지만 은사에 대한 교리를 이해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 데 참여하는 사람 둘 가운데서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언제고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나는 교사로서 전자와 같은 사람도 보기를 원하지만 지상 명령의 성취는 후자와 같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사람들이 평신도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준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따라서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지속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역에 나아가게 하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결국 성경적인 모델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면했고 그런 다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말한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 후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마 4:19) 약속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그들을 사역으로 몰아넣으려 함으로써 그 과정을 거꾸로 만든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사역을 권유하는 것을 교회 조직표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조직표의 빈 자리를 메우려고 하는 대신 그 사람 자체로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래서 그분께서 그들로 얼마나 많은 공백을 메우도록 하는 대신 그 사람 자체로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행해 나아가도록 그래서 그분께서 그들로 얼마나 많은 공백을 메우도록 하시는지를 보게 해야 한다. 모든 교사와 소그룹 인도자들이 이와 같이 한다면 우리가 메워야 할 사역의 공백이 그렇게 많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시오. 그리고 무엇인가 할 일을 찾으시오”라고 말해왔다. 내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것 이상의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사역을 하도록 개인적으로 도전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들 옆에 앉아서 “나는 형제님을 믿습니다. 형제님은 그것을 할 수 있어요.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음식점에 가서 웨이터에게 단지 무엇을 먹겠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그 음식점이 어떤 종류의 음식을 하는지 잘 알고 있을 때조차도 메뉴를 보고 선택을 한다. 메뉴는 우리가 무엇을 먹을 것인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음식점에 갔는데 웨이터가 “드시고 싶은 것을 말씀만 하세요. 요리사가 무엇이든지 만들어드릴 겁니다”라고 한다면 좀 실망스럽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여기 여섯 가지 영역의 사역이 있습니다. 이 중 어떤 것이 당신의 은사에 잘 맞는 영역입니까?”라고 물음으로써 사람들을 잘 섬길 수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가서 할 일을 찾아보라고 제의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또한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사람들의 시야가 교회의 벽을 넘어서까지 볼 수 있도록 제자반 사람들을 권면해야 한다. 소외된 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창조적인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도록 그들을 도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심령에 부으신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교사는 그들의 꿈이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이더라도 사람들이 그 비전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북돋우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전국적인 규모의 남성 사역이 축구 코치인 평신도 사역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을 만들기 원한다.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그룹 구성원들이 단기 선교 프로젝트에 참여하도록 도전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 그룹 안에서 전임 선교사를 일으키실 것을 조용히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기에 제자를 만드는 교사는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눅 10:2)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지 않으시면 그들로 사역에 참가하게 하거나 지속적으로 헌신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님께 사람들을 사역으로 부르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
이러한 비유는 교회의 목적이 영적인 아이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만드는 것이라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제외하면 교회에도 적용된다. 그 마음과 영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장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비유를 명확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그 목적이 성숙한 어른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출산’ 서비스는 그 과정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필요하기는 하지만)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교회가 스스로를 영적인 아기들을 낳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전문 병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는 바로 이 견해에 대해 거부하며 신자들을 유년기 속에서만 머물도록 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단지 조산원이나 응급실이 아니다. 교회는 병원의 조치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의료 서비스를,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운동이나 식이요법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전반적인 건강 관리 센터인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아기들을 관리하거나 병든 사람을 돕는 것만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도록 돕는 일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느 누구도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룹에 있는 누구라도 복음 전하는 것을 따분해하거나 무관심하게 여긴다면 교사는 그 심령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최전선에 설 필요는 없지만 모든 사람이 최전선에 선다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눅 15:10) 하셨다. 불신자들이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얼마나 더 크게 기뻐해야 하겠는가?
아낌없이 내어줌
교사는 주는 것에 대해 가르칠 때 목회자에 비해 상당한 이점을 갖는다. 첫째로, 교사는 사람들에게 헌금을 하도록 요청하는 데 있어 자기 유익을 얻고자 하는 동기가 없다. 왜냐하면 헌금에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전임 사역자들은 이런 면에서 그런 가르침을 주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 더불어 교사는 사람들에게 헌금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을 수 있다. 모임 중에 개인적인 것들을 자세히 묻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헌금과 관련해서 어느 정도 헌신되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만큼씩 헌금할 것인가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특별 헌금을 걷는다고 할 때 얼마나 낼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주는 것과 관련하여 평생의 목표와 꿈은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헌금하고 있는지 실제로 물어보고 교사 자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룹 안에서 사람들을 충분히 알아가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친구라면 그러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제자로서 양육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운다.
하지만 주는 것은 단순히 돈 그 이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태도이며 삶의 방식이다. 제자는 또한 자신의 시간과 관심과 애정을 내어준다. 그들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이 취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것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아낌없이 주는 것은 제자의 삶을 사는 데 있어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자라나게 하시는 생활 양식의 중심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를 특징 짓는 핵심적인 성향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다른 여덟 가지 특징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지금쯤은 그것들 모두를 알고 있어야 한다.
2 제자반 안에서의 학습자
학습을 방해하는 것들
교사와 학습자의 관계
이 때문에 교사는 사람들의 호감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혹은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잘 배우기 때문이다. 물론 이 원칙이 오용되어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 얻는 것을 더 사랑하는 일이 그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셨지만 또한 반대하는 적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꺼이 그에게 배우고자 열망하게 되는 그러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좋아하고 우리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의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다. 진심으로 사람들을 좋아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실수들을 용서하고자 할 것이다. 반면에 교사가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카리스마가 있어도 사람에게 냉정하고 무관심해 보인다면 호감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는 배우는 사람들과 친숙한 이해 관계를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친숙한 이해 관계라는 것은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공유하는 감정이다. 그룹 안의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마을에서 자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이러한 친숙한 관계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우리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숙련된 교사는 학습자들과의 이러한 친숙한 관계를 강화시키는 무엇인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들을 발견하고자 애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모든 가능한 수단을 통해 몇몇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고전 9:22) 말했다. 숙련된 교사는 동일한 노력을 해야 한다. 제자반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찾아내고 개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미래는 다양한 그룹을 만들어내는 데 달려 있다. 왜냐하면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각각 적합한 모든 유형의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컴퓨터를 좋아하고 잘 다루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육받기를 좋아할 것이다. 실외 활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창고에 배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우기를 좋아할 것이다. 건설업 종사자들은 문손잡이와 문설주의 차이점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양육 받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학습자들에 미치는 영향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그들 모두와 더불어 화평하기를 힘써야만 한다. 그들은 사랑하고 공손히 대하며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해야 한다. 학습자들이 교사와 화평한 상태가 아니라면 그들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성경을 배울 때 이루어져야 하는 바로 그 변화가 일어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학습자들간의 관계
내게 자문을 구하고 있는 거의 모든 교회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데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어느 교회든지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리고 부드럽게 그러한 이견들에 대해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모든 목회자는 사람들이 서로 원만히 잘 지내는 것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도움이 되는 연작 설교를 해야 한다. 모든 주일학교 교사들과 소그룹 인도자들은 사람들이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주된 관심을 두어야 한다. 사랑의 온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너무나 많은 교회가 험담과 불화와 사소한 것 등으로 분쟁하는 구정물 웅덩이와 같다.
학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긍정적인 학습 환경을 만들어야만 한다. 불편하고 방해가 되는 물리적 환경들, 냉랭하고 사랑이 없는 교사와 학습자의 관계 그리고 그룹 구성원들간의 분쟁은 모두가 다 학습 과정을 파괴시킬 것이다. 그러나 제자를 양육하는 학습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장애가 한 가지 더 있다.
폭풍가운데서 가르치는 것
성경 공부를 하는 동안 학습자들에게 참으로 일어나야 할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교사는 학습을 보다 쉽게 하는 물리적 환경을 제공하고, 그들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며, 학습자들 사이에 건강한 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 더불어 각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하며, 인생 가운데 폭풍의 시기를 지나는 누군가를 위해 가능하면 그 상황에 맞도록 구성한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
제자 양육이 이루어지는 데는 좋은 환경과 좋은 관계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문제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들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사람들이 제자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가정했을 때, 이어지는 논의에서는 제자를 만들기 위해 제자반 안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학습과정
교사는 다양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질문을 할 수도 있고, 강의를 할 수도 있으며, 창의적인 학습 경험을 활용하거나 수많은 다른 교육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다. 교사가 하는 무엇인가의 결과로 학습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다. 가르치는 기술과 상관없이 다음의 일곱 가지는 제자 양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1. 학습자는 성경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2. 학습한 진리는 학습자에게 관련이 되는 진리여야 한다.
3. 학습자는 배운 진리가 어떻게 월요일 아침과 연관되는지 발견해야 한다.
4. 학습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삶과 현재의 자신의 삶 사이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5. 학습자는 순종할 때 얻는 유익과 불순종으로 인한 불이익을 알아야 한다.
6. 학습자는 사고와 가치관과 태도 그리고 행위를 바꾸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7. 학습자는 자신의 결정과 책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에 대해 각각 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관심을 이끌어내라
․어떤 사람들은 배우자가 오도록 권유했기 때문에 온다
․어떤 미혼자들은 가능성 있는 교제 대상을 만나기 위해 온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온다.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더 배우기 위해 온다.
․대부분은 아마 순전히 습관 때문에 올 것이다.
어떤 이유로 오건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 때 무엇인가가 그 마음에 있다. 우리는 텅 빈 화면에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무엇인가로 채워진 마음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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