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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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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호 준 (기독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 구약학) 

'돈'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자세히 배우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돈'이라 불리는 실체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안다. 한편으론 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때로는 '돈'에 대해 금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돈에는 자석처럼 끄는 힘이 있고, 멋진 여인처럼 매력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진리처럼 인정하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돈에 대해 일반적으로 갖는 실질적 경험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일종의 '금욕'(asceticism)과 어느 정도의 '욕심'(greed) 사이에 끼어있다. 그러므로 재물과 돈에 대한 분명한 견해와 아울러 부단한 자기성찰을 통한 영적·도덕적 섬유질(spiritual & moral fiber)을 섭취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도덕적 파산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돈'의 의미론적 형제들 


'돈'이라는 어휘는 단순히 경제적 가치 교환 수단으로서의 화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돈'은 다양한 어휘들과 함께 광범위한 '의미의 장(場)'(semantic field)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돈'은 '재물', '물질', '재산', '소유'에 대한 환유(換喩, metonymy) 및 제유(提喩, synecdoche)로 사용되며, 확장된 의미로는 '풍요', '번성', '행복', '생명', '힘', '세력'을 가리키는 지시어(指示語) 역할을 하면서 '욕심', '불의', '파멸'과 같은 어휘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돈은 객체로서 단순히 '저기에' 서있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돈은 매우 강력한 힘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세력'(power)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인류타락 이후의 세대 안에서 돈은 독자적인 '힘'(力)을 지니는 무서운 실체이다. 오죽하면 예수께서도, 사람이 '하나님'과 '맘몬'(Mammon, '재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을까!(마태 6:24). 인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을 가장 닮은 피조물이 있다면, 그것은 '돈'일 것이다. 신(神)들의 반열 위에 서있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힘센 신이 있다면 '돈의 신'(金神)일 것이다. 길이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금신(金神)이야 말로 그들에게 '길'(道)을 보여주고 인도할 수 있는 '신'이라고 여기지 않았던가!(출 32장).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돈 때문에 '왕자들의 난(亂)'이 일어나고, 돈을 위하여 인신매매 행위가 발생하며, 돈 때문에 인간의 위엄과 권위를 헌신짝처럼 저버리기도 한다. 사회 안에 공평과 정의가 희귀하게 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례들이 늘어나며, 부정과 부패의 지수는 점점 높아만 간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전적 부패 공화국'(ROTC, Republic of Total Corruption)이라느니,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사회라니 하는 자조 섞인 비아냥거림이 들린다. 우리는 '돈이 말하는 세상'(money talks!), 맘몬보다 더 위력적인 세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돈'이라는 구약적 용어들 


먼저 구약에서 돈과 관계된 단어들을 살펴보면, 대표적인 어휘가 (1) '케세프'이다.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은'(銀)을 가리킨다. 명사형으로 모두 403회에 걸쳐 사용되었고, '은'은 대부분 주조하거나, 교환하거나, 도구나 연장을 만들거나, 아니면 귀금속이나 장식을 만들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은(銀)은 일반적으로 값지거나 귀중한 것을 가리키는 은유(隱喩)로 사용되었다:압제받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리켜 흙 도가니에 일곱 번이나 정련한 은(銀)과 같다고 하였다(시 12:6). 아니면 지혜를 은과 금에 비견하기도 하였다(잠 3:14). 한 예언자의 권고문 안에서는 '언약의 축복들'을 가리켜 '돈'(銀)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사 55:1-2). (2) 돈과 관계된 단어들 중 '쩨로르'가 있다. 이 용어는 천으로 만든 '주머니'를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은이나 금이나 동으로 주조된 돈을 담는 '전대'(錢臺) 혹은 '돈주머니'라 부를 수 있으며(창 42:35), 요즈음 말로 '지갑'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종종 은유적으로 '귀중한 것', '생명유지 수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보따리' 혹은 '멜빵 주머니' 안에 있는 자들이라 묘사하는 경우나(삼상 25:29), 아니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해 반역하고 범죄하자, 선지자 학개는 이스라엘의 '돈주머니'(錢臺)에 구멍이 뚫릴 것이라고 묘사한 경우(학 1:6)가 그것이다. (3) 돈과 관계 있는 또 다른 단어로는, '코페르'가 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생명의 값, 혹은 인질 보상금을 가리키지만(출 21:28-32), 범죄를 덮기 위해 지불하는 돈, 즉 '뇌물'을 가리키기도 한다(암 5:12; 삼상 12:3). (4) 단어 자체로는 '이익', '수익' 등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대부분 '뇌물'의 의미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로 '베짜아'와 '쇽하드'가 있다. 이 두 단어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삼상 8:3; 사 33:15). (5) 그 외에도 돈의 단위를 가리키는 단어들로는 '키카르', '베카아', '다르케몬' 혹은 '아다르코님' 등이 있다. 

구약을 포함하여 성경은 '돈'에 관한 정형화된 신학이나 구체적인 철학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돈에 관해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두 측면의 일관성 있는 신학 내지 철학, 즉 '돈의 신학'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 또한 성경은 돈에 관한 몇 개의 도덕적 명제들이나 윤리적 규례들, 혹은 명령들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성경의 목적이 그런 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돈의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자료들을 제공해준다. 그러한 자료는 구약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토라와 예언서와 지혜서)에 걸쳐 등장한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돈이나 재물에 대해 말하는 성경본문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정의'(正義)와 인간의 '욕심'(慾心)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물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 


구약, 특별히 지혜전승에 따르면 재물은 검약과 절약의 열매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부자들의 물질적 번영과 풍요는 근면과 땀의 결실들이며(잠 10:4; 12:11,24; 13:4; 14:23; 21:5), 반면에 가난과 빈궁은 가난한 자들의 게으름과 태만, 나태와 낭비의 결과라는 것이다(잠 20:4,13; 21:17,20; 23:5,21). 물론 이것은 율법조항도, 신탁도 아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관찰을 통해 얻어진 지혜의 통찰력이다(잠 8:18,21).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임에 틀림없다. 성실과 근면, 책임성과 노력, 땀과 수고로 '일'(노동)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재물을 취득하는 것이 창조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지 않고 대가를 얻으려는 모든 노력들­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불한당'(不汗黨,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들)이라 부르지 않는가!­은 선한 창조에 속하지 않는, 왜곡된 인간의 타락습성이다. 

'재물'(돈)은 선물인 동시에 유혹 

구약에서 재물은 종종 축복의 표현으로써 신의 선물로 묘사된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께 대해 신실하거나 그의 언약을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과 선물로 풍요를 약속하고 있다. 토라와 예언자들은 곡물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흐르고, 소떼들과 양떼들이 번식하고, 심지어 이방나라로부터 황금의 조공을 받는 것까지 모두 언약적 신실함의 결과들이라고 누누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레 26:3-5, 9-10; 신 11:13-15; 사 54:11-12; 60:9-16; 렘 33:6-9). 지혜전승 역시 개인의 번성과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호의의 표시로, 그것을 거두어 가는 것을 신의 형벌 내지는 심판으로 간주하였다(예, 시 25:13; 37:2,20,25,28; 잠 10:22; 13:21; 13:21). 따라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즐기는 일 역시 신의 축복으로 여겨진다. '누리는 일'은 정당한 땀흘림과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그렇듯이, '누림'(享有, enjoyment) 역시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재물은 종종 배도(背道)나 우상숭배와도 연결되곤 한다. 그것은 선물로 받은 재물을 잘 사용하는 일보다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소위 '증인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 신 32장에 보존된 '모세의 노래'(song of Moses)의 일부분이 이 사실을 증거 한다:"여수룬(이스라엘)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게 되자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 너를 태어나게 한 반석을 네가 버렸으며 너를 출산한 하나님을 잊어버렸다"(신 32:15,18). 보다시피 이스라엘을 가축으로 비유하면서 하나님이 공급하신 것들로 풍족하게 먹어 살쪘으나, 그 후에는 반역하고 배반하여 주인을 발로 찼다고 말한다(참조, 사 1:2-3). 이처럼 재물로 상징되는 풍요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그들에게는 유혹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예언자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들'(물질적 풍요, 재물)을 오히려 다른 신들(바알들)에게 바치는 이스라엘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대해 심하게 질타하곤 하였다(사 2:6-8; 렘 5:7; 겔 16:15-22; 호 2:5-6). 예를 들어 자기만족과 안일함 속에서 지내고 있는 부자들의 모습을 아모스는 "상아 침대에 누워 있는 자들"이라 묘사한다(암 6:4-7). 이러한 실례들은 예언서에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예, 사 3:16-24; 겔 7:19-20). 요약하자면, 구약성서는 일반적으로 재물에 대해 상당히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선물이 치명적인 유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돈과 재물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실질적이고 부정적이며, 언제나 인간의 욕심과 관련되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재물과 뇌물과 정의(正義) 

구약성서 안에는 뇌물에 관한 언급이 상당히 많다. 특별히 예언서 안에서 그렇다(예, 암 5:12; 사 33:15; 렘 6:13). 인간의 욕심을 조작하고 이용하는 악습 중의 하나가 뇌물이다. 재물이 뇌물이 되거나 예물이 뇌물이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구약의 경우, 뇌물은 특별히 정의를 파괴하고 공평한 재판을 불가능하게 한다. 가진 자가 책상 밑으로 건네는 돈은 공정해야할 재판에 영향을 미쳐서, 힘이 없는 과부나 고아나 외국인 체류자들에게 억울한 판결이나 불리한 결과를 받게 하기 일쑤였다. 뇌물과 사법적 정의(正義)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경우가 사무엘과 그의 아들들에 관한 대조적인 보고문 안에 나타난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법을 집행하는 사사로서 사무엘과 그의 아들들이 매우 대조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을 양분하는 도덕적 가늠자가 뇌물에 의한 굽은 판결이라는 것이다:"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利)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삼상 8:3). 이와는 반대로 백발의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앞에서 행한 그의 감동적인 연설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순결성을 힘주어 말하면서,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한 일이 있었느냐?"라고 말한다. 이처럼 뇌물은 결국 샬롬으로 집약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과 미래를 위협하였던 것이다(신 16:19). 

후기의 선지자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부자가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이 대부분 가난한 자, 특별히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과부와 고아들을 착취하거나 교묘히 이용하였기 때문이거나(사 3:14-15), 아니면 저울이나 됫박을 속이는 부정직한 상거래 때문이었다고 비난한다(예, 암 2:6-7; 미 6:10-13; 사 10:1-3).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뇌물을 금지한 근본적인 이유는 정의와 공평을 파괴하기 때문이었다(예, 출 23:8; 신 19; 잠 17:23). 하나님의 통치의 근간인 정의와 공평,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의로움과 정의를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 중의 하나가 뇌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욕심이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고 한 말씀, 즉 하나님 나라와 맘몬은 함께 주인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구절이 있다:"너희의 하나님 야웨는…차별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지 않으며"(신 10:17). 이 말의 이면에는 사람을 돈(뇌물)에 따라 차별하는 사회적-사법적 관행들에 대한 심한 질타가 들어 있다. 

탐욕(greed)의 몇 가지 예들 


구약의 내러티브들 중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들을 '시적 정의'(詩的正義, poetic justice)로 그려주고 있는 몇몇 예들이 있다: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서는 에피소드(창 13장), 재물을 탐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는 아간 이야기(수 7장), 재물을 탐하여 운명이 나아만과 뒤바뀐 게하시의 이야기(왕하 5장) 등. 제한된 지면 아래 이 이야기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롯은 그의 숙부인 아브라함의 양육을 받은 자로 친자식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그는 숙부 아브라함 밑에서 자라고 그와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물과 물질 앞에서 인간적 신의와 웃어른 공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추락한 배은 망덕한 사람의 표상이 되었다(창 13:10-13). 물질보다 사람을, 사람보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인생의 우선 순위라는 사실을 그는 왜 몰랐을까?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그가 '들어가기로' 선택했던 바로 그 땅(소돔과 고모라)으로부터 나중에 그가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고 '나온' 사건이야말로 '시적 정의'(詩的正義, poetic justice)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탐욕에 관한 또 다른 비참한 에피소드는 아간 이야기(수 7장)이다. 장엄한 구원사를 잠시 중단케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聖戰)에 치욕적인 오점을 남긴 아간의 이야기는 그 발단이 매우 사소한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기인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간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내가 전리품 가운데서 시날에서 만든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 백 세겔과 오십 세겔이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습니다"(수 7:21). 

물질에 대한 탐욕이 가져다주는 비참한 결과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엘리사의 하인 게하시에 관한 이야기이다(왕하 5장).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돈으로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나아만, 그리고 치료함을 받은 후 그것들을 엘리사에게 감사의 표시로, 사례비 조로 주려던 나아만, 그러나 그의 계획은 여지없이 좌절되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는 값으로 주고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값으로 따질 수도 없다(priceless)는 사실을 나아만 내러티브는 '이스라엘'에게 알리고 있다. 첫번째 이스라엘인이었던 게하시는 이 사실을 너무나 값비싸게 배웠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이방인 나아만에 대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했던 치료를 열방과 함께 나누는 일에 대해 열방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자 했던 것이다. 게하시는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그는 엘리사 가운데 있었던 야웨 구원의 임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착취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아람인들과 한가지가 되었고,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에게 미치고 말았다. 이 역시 시적 정의(詩的 正義, poetic justice)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심각하게 들어야 하리라! 


돈과 성직자들 

구약성경에는 예언자들이 금전적 이익을 위해서 예언하였다는 예들이 여러 번 나타난다. 요즈음 말로, 교인들을 심방하여 예배를 드려주고 그 가정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해준 후에 그 가정에서 감사의 표시로 '봉투'를 내어놓으면 자신의 안 주머니 속에 깊이 넣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모든 경우를 싸잡아서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맛이 들린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성직을 그렇게 더럽힌 것이다. 
소위 '예배'를 드려주거나, 아니면 '예언'을 해주고 받는 대가는 다양했다:한 세겔의 사분 일 정도에서부터(삼상 9:8), 빵 열 덩이와 과자 몇 개와 꿀 한 병(왕상 14:3), 혹은 보리 떡 이십 덩이와 자루에 담은 신선한 곡물( 

왕하 4:42), 심지어 낙타 사십 마리에 가득 실은 다메섹의 풍성한 물품들(왕하 8:9)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고전적 선지자들(성경에 그들의 이름으로 책명이 붙여진 예언자들, 예를 들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에스겔 등등)은 그들의 신탁의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만이 예언을 해주는 대가로 선물을 받았다는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예, 미가 3:5; 겔 13:19). 
이러한 타락한 성직관이 어찌 옛날 종교지도자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겠는가? 오늘날도 하나님을 만나본 경험도 없이, 그분으로부터의 소명감도 없이, 그분의 말씀을 친히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상태로­이것은 참 선지자의 자격 요건이라고 하지 않았는가!­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성직에 들어온 자들이 혹시 있지는 않은지? 그들은 거룩한 것(sacred)을 신성 모독적(profane)인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들로부터 신의 말씀을 전파하겠다는 강렬한 정념(情念)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향한 뜨거운 애정과 긍휼을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있다면 그들의 은행구좌로 들어오는 '돈'의 액수에 쏟는 예민성과, 각종 명절에 들어오는 '선물'들과 '봉투'들에 바쳐지는 관심뿐이다. 아니 종교적 권위와 위선을 다 동원하여서라도 육신적 삶의 안일함을 추구하고 사회적 명예를 추구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돈에 관한 욕심이 일부 그릇된 성직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제일이라고 믿는 마이다스(Midas)의 후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지 않을까?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숭상하는 다신(多神) 숭배사상이 교회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지 않은가? '돈이 말한다'는 속담을 만들어낸 현대의 물질주의와 배금주의, 향락적 소비문화는 현대적 바알(Baal)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재물과 돈도 하나님의 구속(救贖, redeem)의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 재물을 구속(拘束)시켜 구속(救贖)시켜야할 것이다. 그 분의 통치에서 벗어날 인간의 땅은 한 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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