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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교회의 성장정책 / 비성경적인 신학교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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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벌여온 교회성장 프로그램은 많은 시행착오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정책은 교인쟁탈전으로 비쳐졌으며, 이것은 일반인들에 대한 전도의 문을 좁게 만들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의 목소리다.

이 같은 지적은 한국교회 목회자의 선교정책이 교인들의 질적성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성장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인들의 질적성장 보다는, 오히려 양적성장에 비중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평가를 교회크기에 맞춰나갔다.

그렇다 보니 신학교를 갓 졸업한 초년 목회자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키겠다는 잘못된 생각에 가득 차 있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병들어 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최근 모 신학교에서 한 교수가 수업시간을 통해 신학생들에게 간단한 설문을 조사한 결과는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고발하고 있다.

신학생들 대부분이 대형교회 목회의 환상에 사로잡혀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핑크빛 목회를 꿈꾸고 있었다며 뚜렷한 사명감 없이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다.

한편 잘못된 교회의 성장정책과 관련해 더 우스운 일은 교회 간, 교인간에 교인들을 빼내오기 위한 싸움을 벌여 극한 대결로까지 끌고 가는 일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교회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

70년대 이전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비 기독교인 한 명 한 명을 전도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목회자들은 이것을 보람으로 생각하고,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 갔다. 이 때 전도를 받고 교회를 다닌 교인들은 오늘날 성장위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교인쟁탈전을 개탄하고 있으며,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다. 70년대 중소도시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교인의 이야기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에게서는 과거 목회자들의 순수한 마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개 교회가 펼치고 있는 성장위주의 선교정책은 비 기독교인을 전도하여 하나님을 영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아 교회를 성장시키고 있는 것을 볼 때,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런 행위는 일반인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좋지 못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한 마디로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여 교회를 살찌우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으며, 교회 간의 화평을 깨는 행위다.”이 교인의 말과 같이 일부 교회는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교회 간의 연합과 일치가 깨지고 있으며, 이것은 교단분열과 교회분열로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 교회는 이웃교회를 이단교회로 매도, 양을 도적질 해 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건전한 많은 교회가 피해를 입고 있다. 한국교회가 기존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을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키다 보니, 오늘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 할 수 밖에 없다는 지적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양을 도적질 하는 행위

 

교인쟁탈전은 교회 내적, 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 실추 △지역주민의 교회에 대한 반감 △교회간의 갈등 △이웃교회 교인과의 갈등 △목회자의 갈등 △교회의 크기에 따라 목회자 평가 △교인들의 질적성장 소외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일부 교회에서는 잃어버린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교회에서 온 교인을 되돌려 보내는 일도 속출하고 있으며,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역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한 대학에서 교회 성장학을 강의하고 있는 한 목회자의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교회는 이웃교회의 교인을 도적질하여 크게 성장하고 있다. 이것은 대형교회를 만들어 냈으며, 목회자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여기에 두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교회성장은 한마디로 한국교회 전체가 골고루 성장할 때 교회가 성장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여 성장하는 교회는 한 마디로 교회와 목회자의 윤리를 모르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과거로 돌아가 정성을 드려 비 기독교인을 교회로 인도, 하나님을 영접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의 위상은 계속해서 실추되고 나아가 교회는 지역사회와 일반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 것이다”이 목회자의 말과 같이 한국교회는 70년대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 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을 수 있다. 여기에다 한국교회는 전도의 대상인 지역주민들을 위한 선교정책을 마련하는 것도 시급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교회성장과 목회자의 평가기준을 교회의 크기에 두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은 단시일 내에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교회간의 마찰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으며, 지역교회들이 단합, 새로 개척하는 교회를 이단·사이비로 몰아붙이는 일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전의 Y교회, 김포의 G교회와 B교회, 서울의 A교회 등이 바로 오해를 받고 있는 교회다. 
이렇게 교회성장에 모든 교회의 역량을 강화 하다 보니 가정의 소중함을 비롯해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대화, 영성의 추구, 올바른 기독인으로서의 생활방식 등은 뒤로 처지고 있는 실정이다.

 

교인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

교회생활에 열심인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여러 가지 중요한 개인적인 사명들을 뒤로 하고 교회의 각종 성장 프로그램을 포함해 전도특공대, 전도대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사명에 의한 참여보다는 임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교회성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의 지상명령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려 하는 것은 교회성장 지상주의에 치우친 나머지 너무나 귀한 것들이 희생을 당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일산에서 신앙생활하는 한 집사는 “거의 매일 교회 여전도사에 의해 전도대원으로 불려지고 있어 아이들을 돌보고 가정을 규모있게 만드는 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이것이 결국 믿지 않는 남편과의 가장 큰 불화의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더욱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이 일 때문에 결국은 담임목사와 상담했으나 이 교회 담임목사는 “전도를 방해하려는 사탄의 농간”이라고 일축하고 “더욱 열심히 주의 일인 전도에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는 것이다.

특히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의 소중함과 부모의 역할 등을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이 요즘 들어 더욱 그리워진다는 한 신학자는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찾고 건강한 교회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균형 있는 교회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이 땅에 이단들이 판치는 이유도 교회가 온전한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라는 통계도 있었다. 교회가 교회의 참 모습을 갖출 때 사회와 가정은 교회로 말미암아 힘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교회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교회’ 이것은 목회자들의 정확한 판단력과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조건 하라면 하라’는 강요만 있고 신앙인으로서의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빼앗긴다면 진정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은 강요가 아닌 사랑으로 그의 일을 하도록 인도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지 않는 교회

오직 교회성장을 외치다 보니 사회의 필요나 주위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할 시간이 없다. 이웃의 독거노인이 밥을 굶는지 먹는지, 소년 소녀가장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유보해야 하고 재정도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지 제작이나 총동원주일 선물을 구입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이러한 필요는 뒷전이다.

최근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NGO단체에서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고 있는 아프칸난민을 비롯해 아프리카를 돕자는 제안을 여러 교회에 요청했으나 일부 교회만 이들을 초청해 설명회를 듣고 도움의 손길을 펼쳤을뿐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교회의 사정을 내세우며 거부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지구촌의 아이들이 40초당 한 명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으나 한국의 교회들은 오직 교회이기주의에 빠져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이것만이라고 주장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도리어 교회의 부흥에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교회부흥과 구제 그리고 지역봉사의 적절한 조화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뤄가는 교회도 있다.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금촌새힘교회(담임=이형조목사)와 봉일천에 소재해 있는 봉일천교회(담임=김용관목사)는 지역사회를 섬기며 세계를 품고 선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도프로그램을 통해 빛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있다.

특히 이들 교회들은 이국땅에와 불법체류자의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친구역을 자청하고 나서 여타 교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편 이들 교회들은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문화센터를 개설하는 등 교회의 참 모습 가꾸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또한 한 신학대 교수는 목회자들이 교회의 부흥과 자신의 성공을 동일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무조건 대형교회 목회자를 성공적인 목회자로 추켜세우는 풍토와 함께 맹목적으로 이를 답습하는 목회자들의 잘못된 교회관을 비판했다.

자신의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목회를 위임받아 종으로 쓰임 받겠다는 생각을 기본으로한 목회상을 구현하려는 의지와 거시적인 목회를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많을 때 한국교회는 가볍지 않고 세상은 교회를 진정으로 좋아하며 교회를 등지고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는 교회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목회를 추구하는 한 목회연구소의 K목사는 “목사가 바뀌어야 교회가 바뀐다”고 말하고 “목회자가 자기 진단을 통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K목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교회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거나 교인들이 기본적인 생활도 할수 없도록 모든 생활을 희생시키는 전도전략을 비롯 사회적 봉사와 긴급한 구제를 외면하고 추진하는 무조건적인 교회 성장정책을 극복하는 교회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 참다운 행복과 기쁨을 제공하는 교회, 복음이 전달되는 교회 등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충실한 한국교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라는 것이 의식있는 목회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교회의 무분별한 성장위주의 선교정책은 현장 목회자 간의 윤리를 깨는 행위라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다. 여기에다 무분별한 성장정책은 교회 간, 목회자 간의 마찰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교회 간에 반목과 갈등의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목회자에게는 사랑도, 용서도,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현장목회자들은 이 말에 대해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교회의 성장정책은 한 마디로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여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인들을 전도하여 교회가 성장했다는 말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 일부교회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기독교인에 대한 통계를 보면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교인의 수가 늘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이에 대한 답은 자명해진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성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가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여 성장했다는 결론과 아울러, 이로 인해 목회자 간의 윤리를 흔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대전의 A교회의 경우는 갑자기 이웃교회 교인들이 등록하면서 크게 성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 교회는 이웃교회 교인을 도적질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으며, 여기에 교인을 뺏긴 교회들은 이 교회를 이단교회로 매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 교회 담임인 O모 목사는 이웃교회의 핵심교인이 들어온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온 동네를 다니며 자랑하고 있다. 이로 인해 목회자의 목회윤리가 흔들리고 있으며, 일부 지역교회들은 단합이라도 한 듯 O모 목사를 이단자로 규정하는 등 맹 비난을 퍼붓고 있다.

여기에다 일부 목회자들은 O모 목사의 약점을 이용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 속속히 밝히기는 힘들지만, 목회자 간의 신뢰성과 도덕성을 제기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서 과거의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으며, 이로 인해 A교회는 이웃교회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교인들의 수평이동

경기도 G시에 세워진 B교회와 C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들 두 교회는 교회가 성장하면서부터 이웃교회의 시선을 받기 시작, 이단교회로 낙인 찍혔다. 물론 무조건 자신들의 주관적인 생각을 근거로 이단 운운하는 것도 정상적인 행위는 아니다.

현지 목회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두 교회는 목회자가 어렵게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한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여 성장했다는 것이며, 이 같은 교회성장은 가시밭길과도 같은 목회자의 길을 쉽게 가려고 하는 잘못된 목회자의 윤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난했다. G시의 한 목회자의 말이다.

“G시는 새롭게 개발되고 있는 중소도시로 선교의 조건이 다른 도시에 비교해서 매우 좋다. 이런 조건 속에서 땀과 눈물로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B교회와 C교회는 이러한 당위성을 부정하고, 이웃교회의 교인들을 도적질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이 두 교회는 이웃교회들로부터 비난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교회 간, 목회자 간의 윤리를 깨뜨리고 있을 뿐 아니라 목회자의 마음에도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이 목회자의 말과 같이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는 행위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며, 이 같은 교회성장은 동료 목회자에게 상처만을 안겨줄 뿐이다.

교회를 개척해 어렵게 교회를 꾸려 가는 목회자들에게 한 명의 교인은 매우 소중하다. 이런 교인을 도적질하는 행위는 교회 간, 목회자 간의 마찰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이 같은 비난에 대해 이웃교회 교인을 도적질하여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영적인 말씀에 갈급해 찾아오는 교인을 어떻게 나 몰라라 할 수 있느냐고 항변하면서 이들 교인이 떠나지 않도록 목회자가 이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더욱이 우스운 일은 무분별한 교회성장을 주도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D교단과 E교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데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목회자에 대한 검증 없이 교단을 무조건 키우고 보자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더욱이 교단의 지도자들은 이들 교회를 비호하는데 앞장서고 있어 한국교회의 앞날을 더욱더 어둡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밝히기는 힘들지만 교단 지도자들이 이들 교회를 비호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결국 교회지도자들의 이 같은 행위는 양을 도적질해 교회를 성장시키고 있는 일부 교회의 잘못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으로, 전체적인 한국교회 발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가 겉보기에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을 들어다보면 교회의 성장이 멈췄다. 이것은 한 마디로 교인들의 이동에 의한 교회성장이라는 지적이며, 결국 한국교회 전체 교인 수 증가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한국교회 성장정책은 서울에 세워진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서울교회의 일부는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갈등속에서 분열되어 성장한 교회들이다. 강동구의 K교회 Y교회, 은평구의 Y교회, 강서구의 C교회 등이 바로 그렇다.

또 수도권 대부분의 교회는 60·70년대 정부의 산업화정책에 힘입어 성장했다. 당시 농어촌의 교인들이 수도권으로 이주해 오면서 성장했다. 그러면서 개척교회가 많이 생겨났으며, 도시의 교회는 농촌인구의 유입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목회자들에 대한 주가도 올라갔으며, 신학생들은 교회개척에 장미빛 꿈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무리한 교회개척으로 이어졌고, 목회자에 대해서 교회의 크기에 따라서 목회자의 능력을 평가했고, 목회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킬 수 밖에 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이웃교회의 양을 도적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세인들은 목회자에게는 사랑도·용서도·도덕도·윤리도·눈물도·피도 없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설교만 따르는 교인들

또한 일부 목회자들은 성경적인 온전한 말씀해석은 지루하고 교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간처세술과 재미있는 이야기만을 엮어 설교를 하고 있다. 이 또한 무조건 성장하면 된다는 생각에 기인한 것으로 복음의 능력을 무시하는 처사인 것이다. 교회가 성장하고 대형교회가 되면 과거에 이단이란 소문이 있었던 목회자도 총회장이 되고 연합단체의 장이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부담 없는 설교를 하다보니 교인들에게 헌신이나 십자가의 삶을 강조하기보다는 영광과 축복만을 매주 반복하는 실정이다. 한국기독교는 십자가를 뒤로하고 영광만을 강조해 기형화된 교회의 모습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동서울에 위치한 B교회의 담임목사는 성경본문에 대한 설교는 전혀 하지 않고 사회적인 이슈나 TV에서 본 이야기를 중심으로 늘 설교하기를 즐긴다. 이렇게 단순하게 설교하다 보니 설교를 준비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는 계속 부흥하고 있고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귀에 익숙한 목사의 주관이 가미된 세상이야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이 지역 교회에서 상처를 받은 교인들은 거의가 부담없는 이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 지역 목회자들의 불만도 적지 않다.

한국교회에 있어 부흥한 교회들은 대부분 카리스마적인 제왕적 목회자들을 모시고(?) 있다. 장로교회라고 하더라도 말만 장로교회지 장로들이 목사의 비서 정도로 전락해 심방을 갈 때 목사의 가방을 들어주고 재정적인 필요를 충족해 주며 봉사와 희생을 요구받는 정도이니 일반 교인들은 담임목사만 보면 어쩔줄을 모른다.

목사의 한마디는 성경말씀보다도 중요하며 성경해석이 잘못됐어도 목사가 그렇다고 하면 무조건 믿는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러한 교회는 부흥한다.

세상에서 온갖 직업을 갖고 생활하다 군소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강서구의 K목사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자신이 영의 아버지임을 강조해 교회의 재정을 비롯해 모든 인사권을 혼자 장악하고 있다.

한편 K목사는 교회가 성장하자 군소교단에서 예장합동측 교단으로 편목하였으나 교단 유지재단에 재산을 맡기지 않고 단독으로 법인을 만들어 재정을 관리하고 있다. 혹 교회의 제직들이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제직은 목사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교회의 직분을 내려놓아야 한다.

 

맹목적으로 목회자 숭배

교회의 재정사용을 보면 선교나 사회적 봉사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으며, 목회자들은 교회재정의 상당부분을 오직 교회부흥과 성장 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원인중 하나다. 성경적인 온전한 교회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유무상통했던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델을 아는지 모르는지 답답한 모습이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목회자 숭배가 잘못된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한편 이 교회의 장로들은 부흥하는 교회의 모습만을 바라보며 담임목사는 성공한 목회자라고 떠받든다.

한국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회의 갱신과 개혁이 시급한 실정이다. 교회성장학을 연구하는 한 목회자의 말이다.

“이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성장에 대한 목회개발에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는 지역사회를 위한 재정적 투자를 아까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를 기초로 교회성장의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무리한 교회의 성장정책을 지양하고 건강한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교회를 지향해 나가야 할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다.

천주교의 경우 기독교에 비해 교세나 교회 수가 매우 적은 편이나 사회적인 인지도나 공신력에 있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예들을 잘 살펴 새롭게 교회상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교회 부흥에 걸맞는 사회적인 봉사나 지역사회를 위한 역할의 증대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서 있는 것이 필요한 실정이다. 건강한 교회와 관련해 한 목회연구소의 한 대표는 “대형교회보다 중·소형교회의 경우가 건강한 교회가 많다”고 지적하고 
“한국교회가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형교회화의 추구보다 교회의 존재 목적과 본래적 사명에 충실한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동 연구소의 대표는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교회, 지역사회의 센터로서의 교회, 그때 그때 마다 지역사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지도력을 갖춘 교회의 모습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라북도 익산에 위치한 갈릴리교회(담임=이동춘 목사)는 주민중심의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성장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 교회는 종합복지관과 학사관, 김치공장 등을 운영, 지역사회 주민의 윤택한 삶을 지원하고, 농촌지역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학사관에 수용, 이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어주고 있다.

이 교회와 같이 비록 큰 교회는 아니지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교회의 모습을 간직한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고 결국 자연스럽게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늘어날 것이란 희망으로, 조급하고 무리한 교회의 성장제일주의를 경계하고 다스리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한 목회자들의 의지와 노력이 절대 요구된다.

이와 함께 목회자들은 교회간·목회자간의 윤리를 바로 세우고, 질서를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목회자들은 지역사회와의 호흡을 통한 새신자확보와 이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 기독교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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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경적인 신학교 제도

 

1세기의 크리스천 일꾼들은 종교적인 학교를 다닌 적이 없으며 그들은 지역 교회 내에서 양육과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목회자의 자격을 갖추려면 반드시 신학교를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신학교는 사람들에 의해 고안된 제도이며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비성경적인 제도이다(<교회가 없다>, 프랭크 바이올라, 대장간, 233쪽).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은 신학교를 세우신 일이 없으며 그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으로서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그럼 여기서는 이러한 비성경적인 신학교 제도가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랍비들의 학교가 있었다. 당시 유대 랍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사람은 가말리엘이었는데 그는 바울의 스승이기도 했다. 초기 교회 시대가 지나가고 2세기 말경에 최초로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서 신학교가 생겨나 클레멘트와 오리겐 등이 학생들을 가르쳤다(<기독교 교회사>, 김영재,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23쪽). 4세기 이후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여 신자가 불어나면서 가톨릭교회는 이에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교좌성당 학교 및 수도원 학교를 많이 건립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는 신학 연구와 함께 설교를 전담할 성직자인 목사를 배출하기 위해 많은 신학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수많은 신학교가 산재해 있는데 미국과 캐나다에는 400개가 넘는 신학교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정규 신학교 약 50개와 무인가 신학교 약 350개를 합해 전부 400개 정도의 신학교가 있으며(<한국 개신교 주요 교파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0쪽), 해외에도 수십 개의 신학교가 있어 해외 유학생까지 합치면 매년 여러 곳에서 수만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다. 이러한 신학교 제도는 예나 지금이나 성직자인 목사를 배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겨났지만 이러한 것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따로 없는 소위 '만인 제사장'의 진리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교파나 교단에서는 자기네들이 인정하는 신학교를 나온 사람에게만 목사 자격증을 주어 성직자로 세우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은 신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을 세운 일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쓰실 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르신 후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필요한 것을 갖추게 하셨다. 예수님 당시에도 부르심을 받은 12사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랍비들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자는 없었다. 그들 가운데 절반은 어부였는데 그 당시 어부는 아주 평범한 직업에 불과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세리도 있었다.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보통 사람들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무엇 하나 제대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뛰어난 인재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을 훈련시켜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드셨다.

단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바울의 경우는 12제자와는 달리 학문적인 지식이나 명성 등 여러 면에서 특출하고 뛰어난 면이 많았다. 그는 당대에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심한 이후 나중에 고백하기를, 지난날의 가문이나 신분이나 학벌이나 명예 등 모든 것을 배설물, 곧 똥(원어 성경에는 똥으로 되어 있다. 성경에 똥이란 단어가 다섯 번 나오는데 예컨대, 욥기 20장 7절에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고 씌어 있다. 그러므로 똥은 성경적인 용어임)으로 여긴다고 말했다(빌 3:8). 그러나 오늘날 삯꾼 목사들은 과거의 학벌이나 간판이나 명예를 바울처럼 똥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금메달처럼 자랑하며 내세우고 있으니 이러한 자들이 바로 거짓 목자요 삯꾼들인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오순절 이후 처음 교회가 생겨나면서 사도들은 이제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쳐야 했다. 이때 그들은 신학교나 훈련원 등을 세워 그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 교회에서 가르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몇 십 년 사이에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 등 여러 지역에도 교회가 생겨났다. 그때에도 하나님의 학교는 신학교나 훈련원이 아니라 성경적인 교사나 장로들이 있는 지역 교회가 하나님의 학교였던 것이다. 성경에서도 신학교가 아닌, 지역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고 있다(딤전 3:15).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고 말했다. 여기에 나오는 가르침이란 신학교에서가 아니라 '지역 교회에서'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교사로서 1년간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신자들을 가르친 것을 알 수 있다(행 11:26).

과거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였던 디엘 무디는 19세기 마지막 4반기 동안 미국과 유럽을 복음으로 뒤흔들어 놓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한 목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성경도 제대로 읽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말도 어눌한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안수 받은 목사가 아니었으며 학교 교육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디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온전히 몸을 바친 사람을 사용하여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세상은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도 하나님께 헌신한 평범한 사람을 더 많이 요구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인물중심의 교회사>, E.S. 모이어, 대한기독교서회, 428쪽).

그리고 미국 기독교계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A.W.토저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는 학력도 변변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운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신학자와도 비길 수 없는 높은 경지를 이룬 당대 복음주의의 양심으로 정평이 났던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 외에도 교회사를 살펴보면, 신학교 졸업과는 무관한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많았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약 무디나 토저와 같은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이들은 훌륭한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내에서는 신학교 제도와 무관한 사람이라면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이단으로 정죄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또 현대 창조 과학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며 미국창조과학연구소 소장이었던 헨리 모리스(1918~2006)도 비록 정규 신학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성경적, 신학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데 있어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는 30여 년간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쳤으며 50권이 넘는 책들을 저술하였다(<창세기 강해>, 헨리 모리스, 전도출판사, 6쪽). 하나님은 16세기에 마르틴 루터를 들어 쓰셔서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썩은 전통으로부터 성경 말씀으로 돌이켰듯이, 20세기에는 헨리 모리스를 사용하여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해 생겨난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와 성경비평학 등 잘못된 것들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역사적, 과학적인 사실로 믿을 수 있도록 입증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헨리 모리스 이래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창조 과학자들은 진화론의 허구성을 파헤치며 창조 과학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목회를 위해 목사 자격증을 따려고 신학교에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비성경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비성경적인 방법과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좋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해마다 수백 개의 신학교에서 수만 명의 목사 후보생들이 대량으로 배출되고 있지만, 그들은 신학교 제도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한다. 그들 가운데에는 상당수가 국내의 무인가 신학교나 외국의 유령 신학교 등을 졸업하고, 심지어 수백에서 수천만 원의 돈을 주고 가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사례도 드러났다.

대체로 한국 목사들은 외국 목사들에 비해 '박사'라 불리기를 대단히 좋아하는데, 그리하여 그들은 '박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몇 년 전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가입되어 있는 예장합동중앙 총회장을 비롯하여 총무 등, 교단 주요 인사를 포함한 140여 명이 가짜 신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교회 목회와 교단 활동을 해 온 것으로 밝혀져 기독교계와 세인들을 경악시켰다. 당시 예장합동중앙 총회는 이들에게 미국 풀가스펠 국제성서총회 신학대학교의 명의로 학위를 수여했는데, 조사 결과 그 신학대학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 신학대학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에서 서울지방법원은 2003년 9월, 미국에서도 공인받지 않은 신학대학교를 한국에 있는 것처럼, 교단의 이름으로 신학대학원을 만들고 가짜 박사 학위를 수여한 강용식 목사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예장합동중앙 총회는 이 사건에 앞서,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교단의 주요 인사뿐만 아니라, 교단 대부분의 인사들까지 이 사건에 연계되어 있어 사실상 조사가 불가능하여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던 사실도 밝혀졌다(<뉴스앤조이>, 2004. 2. 5). 이와 같은 불법과 부패와 관련된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이와 유사한 크고 작은 사례들이 한국 개신교계에 비일비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대부분의 신학교는 목사 후보생들을 배출하는 교육 기관으로서 대개 자기네 교단에 종속되어 있다. 교인이 뜻한 바가 있어 목사인 성직자가 되기 위해 자기네 교단의 신학교에 입학하려면, 먼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의 추천을 받아야 하고, 대학원의 경우에는 지방회나 노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신학교 교수들도 대개 교인 시절부터 해당 교단의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네 교단 총회에서 제정한 헌법에 따라 교단의 교리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설혹 그들 가운데 교단의 헌법 내용 중에서 비성경적인 것을 발견했을 경우, 양심상 잘못된 부분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싶어도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교단에서 만든 교리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가르치면 알게 모르게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진리를 따르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야말로 자기네 교단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직업 종교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신학교에서 해마다 목사 후보생들이 수만 명씩 쏟아져 나오지만 경쟁이 치열해서 기존 교회에 들어갈 자리가 없는 데다 개척하기도 쉽지 않아 목회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졸업생들이 부지기수다. 하는 수 없이 그들 중에는 생계를 위해 택시 기사나 건설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투잡 내지 쓰리잡을 하는 목사들이 많다(<오마이뉴스>, 2011. 4. 18).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이 예비 실업자 신세다.

교수들도 신학생들의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지만 그들도 다른 대책이나 대안이 없고, 이러한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교단에 강력히 건의하는 교수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다간 신변 안전에 부담이 되고 그들 역시 신학생들이 있어야 생존해 갈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 대부분은 교단 총회나 학교 이사회의 눈치나 살피면서 자기의 입지나 다지는 교단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전에 신학교가 아닌 지역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시키는 교회들도 더러 있어 왔다.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였던 故 옥한흠 목사가 특히 제자 훈련을 강조하며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가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러한 제자 훈련을 모델로 삼아 실행하기도 했다. 신학교가 아닌 지역 교회에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자격을 갖춘 교사나 장로들이 신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경의 올바른 교리와 교회에 관한 진리를 그들을 통해 배우고 지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옥한흠이 주장하는 제자 훈련은 성경적이라 볼 수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적인 교사와 장로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인 '평신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장로교 출신으로 칼뱅의 성직자 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그의 책 <평신도를 깨운다>에서도 칼뱅이 주장한 내용을 인용하면서 "성직 자체를 반대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 지상의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목사직이 필요하다"는 등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 자신 스스로도 "목사직은 예수님이 그의 교회에 허락하신 직분이다"고 말하면서, 에베소서 4장의 '목사'를 성직자의 직분으로 여기고 있다(<평신도를 깨운다>, 옥한흠, 국제제자훈련원, 51쪽).

하지만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목사는 오역), 교사'는 주님이 우주적인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신 은사를 가리키는 것이지 지역 교회의 직분이 아니다(<평신도 교회 이야기>, 최승호, 대장간, 35쪽). 교회의 직분은 오직 '집사와 장로'뿐이다(빌 1:1).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은사와 직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목자(목사)라는 단어'는 과거 개신교 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목자를 목사'로 오역시켜 목사를 성직자로 만들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사실조차도 옥한흠은 모르고 있다. 이런 사람이 제자 훈련이니 뭐니 하며 평신도 교육을 근 30년간 해 왔으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는 성경에 없는 평신도를 인정하고 널리 보급함으로써 크나큰 과오를 저질렀다. 그는 이러한 것에 대해 참회하고 '평신도 단어'를 철회하고 '만인 제사장'의 진리를 인정해야 했다.

한편, 옥한흠 목사의 아들인 옥성호 집사는 그의 책에서 "평신도라는 단어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으며, 평신도가 있다는 말은 결국 특수 신도인 목회자 그룹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아버지(옥한흠)가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쓰고 그 이름의 세미나를 20년 넘게 했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평신도'라는 단어만큼은 쓰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옳지 않은 용어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성도가 만인 제사장이므로 평범한 성도와 특수한 성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신도 선교사가 선교지에서의 차별 대우로 인해 부득이 본국으로 들어와 신학교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도 모순이다(<아버지와 아들>,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100쪽)." 이처럼 옥성호 집사는 평신도와 신학교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평신도 교회 이야기>의 책의 저자인 최승호 형제도 그의 책에서 "평신도란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며, 신학교를 나왔더라도 목회직을 갖지 않고 일반 직장을 다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평신도 교회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는 교회를 말하며, 신학교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 또는 일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사역자가 되어서 사역을 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에 반해 기성 교회는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전임으로 사역하는 교회를 말한다(<평신도 교회 이야기>, 11쪽)"고 했다. 최승호 형제는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현재 경북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 중이다. 그는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지만, 2008년 대구평신도교회를 개척하여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신학교 학위와는 무관하게 교회 개척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 인한 평신도 교회가 수십 개가 있다.

한편, 전국에 200개 정도 되는 세칭 '형제교회'라는 곳에도 신학교를 이수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성직자 제도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교회도 평신도 교회처럼, 지역 교회들은 두 명 이상의 장로들이 교회의 인도자들이지만, 신자들 모두가 수평적인 호칭으로 '형제, 자매'로 불리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제교회도 지역 교회 외에, '훈련원과 성경 학교'를 별도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전국에 100개 정도 되는 세칭 '지방교회'도 오래 전부터 지역 교회와는 별도로 '훈련 센터'를 만들어 신자들을 합숙시키며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훈련원이나 성경 학교와 같은 제도는 일반 신학교와 다를 바 없는 제도로서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지역 교회는 성경적인 복수 장로들 아래 가르쳐지고 다스려져야 하기 때문이다(행 20:28, 딤전 3:1~7). 현재 평신도 교회는 형제교회나 지방교회처럼 별도의 훈련원이나 성경 학교를 두지 않고 복수 장로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오늘날 전국에는 350개 정도의 무인가 신학교가 난립해 있는 가운데 그곳에서 온갖 불법이 자행되고 있고, 또 해마다 수만 명의 목사 후보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가운데는 부적격자들이 부지기수인데, 그러한 자들이 버젓이 자기네 교단에서 전도사나 부목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들의 보스 격에 해당하는 담임목사는 당회장으로서 교회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적지 않은 교회마다 온갖 비리와 부패가 난무할 수밖에 없고 해마다 크고 작은 사건이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학교 출신 목사들 가운데서도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목사들도 적지 않다. 그러한 목사들 가운데서는 신학교와 목사 제도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성경적인 장로 위치로 돌아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직분인 성직자인 '목사'를 거부하고, 만인 제사장을 인정하며 복수 장로 제도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은 일인 독재 체제로 교회에서 우두머리가 되어 교인들 위에 군림하면서 전권을 행사하며 일인 독재로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성직자로 생각하고 교인들을 평신도로 여기면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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