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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유대인의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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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B.C.4C와 3C에 조직되었던 유대교 개혁운동에 일차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시리아인들 치하에 있었던 어떤 형태의 그리스화에도 저항하였고, 마카비 봉기의 핵심을 형성했다. 종교법을 엄격하게 준수했기 때문에 에세네파와 관련을 맺어왔으나, 그들의 대부분의 거의는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선조가 된다.

  마카비서 2:42에는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강력한 사람들이었다. 율법에 충실했던 것과 같이 ....”로 기록되어 있다. 탈무드에도 그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철저하게 계명에 순종했고, 기도를 열심히 하였으며 안식일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바리새인

 

 

 

   B.C 165-160의 마카비 봉기 직후인 제2 성전시대 (B.C.516-A.D.70)에 종교적 정치적 파당으로 등장하여 대부분 하시딤출신이다. 히브리어간인 바리새(Pharisee)는 “분리된”의 뜻으로, 그들은 이교도의 관습과 권력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종파를 형성하면서 제사장들이 다스리는 유대종교를 배척하기 위해 격렬한 싸움을 했다. 몇몇 의식들이 성전에서 행해지는 것을 배척하고, 유대인의 가정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수종들고 있음에 반해 이들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법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사두개인들보다 자유로웠고,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학적 입장으로는 하나님은 전지, 전능 무소부재하신 분이고 사람 안에는 각각 선과 악을 행하도록 하는 두 개의 내적 충동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선악을 선택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도록 도우시지만, 악을 행하는 것도 내버려두신다. 진정한 예배는 제사가 아니라 토라를 연구하는 것이다. 토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치를 따라 각 세대의 이상 실현이라는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죽음 후의 삶과 부활 천사와 다른 영들의 존재를 믿었다.

  신약성경 대부분은 이들에 대해 위선적이며 동료에게서조차 비난받은 사람이었다고 기록한다. 위선자이며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 (마23:5, 23이하, 눅18:1이하)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행22) 바리새인적 믿음은 초기기독교 신학을 유지한다.

 

사두개인

 

  이 이름은 다윗(삼하8:17, 15:24)과 솔로몬(왕상1:34-35, 대상12:28)시대의 대사장인 사독(Zadok)으로부터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에스겔40:46, 43:19, 44:10-15은 이 자손이 성소에서 수종 들었음을 보여주며, 사두개인은 이들을 지지했다. 약B.C.200년경 대제사장과 귀족집안의 당파로 형성되었다. 모든 제사장이 사두개인은 아니었다.

  제사장적 귀족정치의 전형으로 하스모니안 지도자들을 보좌하며, 성전과 그 지방의 사무를 담당했다. 로마치하에 있을 때도 여럿이 의원으로 있던 산해드린공회를 통해서, 팔래스틴사람에대해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 헬레니즘의 영향을 보다 많이 받았고 로마의 권세자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인들 보다 더 신인동형론적 견해를 취했다. 유대교적 요소에 대해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구두법은 배척하고 모세의 성문법만을 받아들였다. 육체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부정했다. 선전에서의 제사를 강조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의를 부인했다.

  그들은 정치적 모임이었고 기독교 정신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마22:23, 막12:18, 행4:5,23:8) 교회는 이들을 두려워했다.

  A.D.이들은 성전의 멸망과 함께 끊어졌다.

 

열심당원

  B.C.37-A.D.70부터 활동했다고도 하고 A.D.66-70부터 였다고도 한다. 또한 마카비일파나 하시딤에 까지도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팔레스타인지방에 대한 로마의 통치를 극단적으로 반대 했고, 우상숭배하는 로마와의 평화적 관계에 반기를 들었다. 종교적 열심히 이들의 이름을 낳았다. 세금 내는 것을 거부했고 정치적 반대와 로마통치자들에 대해 태러행위로 서슴지 않았다.

  유대인과 토라에 대해 광신자들이었다.

  눅4:15에 언급, 시몬의 명칭으로도 사용(눅6:15, 행1:13) 가나안인은“열심있는”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 말로부터 유래했다(마10:4, 막3:18)

 

시카리(Sicarii)

 

 

  로마통치에 반대하기위해 생겨난 극단적인 열심당원들이다. “단도를 지닌 사람”이라는 그리스말에서 유래한 이름처럼, 친로마적 성향의 사람들이 많은 무리 중에 섞여 있을 때 칼로 찌르곤 하였다.

  A.D.50-70 무리를 지은 암살자들이 유대를 약탈하고 탄압했다. 그들의 봉기가 A.D.70 예루살램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마사다(Masada)로 피신하였다.

  열심당원과 같은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행 2:38에 “자객”으로 언급되어있다.

 

헤롯당원

  헤롯과 헤롯왕조를 지지하고, 그리스화와 외국인 통치를 받아들였다. 대개는 부유했고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다.

  마22:16, 막3:6, 12:13에 예수의 반대자로 언급되어있다.

 

엣센파

 

  마카비 시대인 후기 제2성전시대에 (약B.C.2세기-A.D.70)시작 이름기원이 불확실하다.

  약4,000명이 유대의 각 마을과 촌에 흩어져 있었다. 어떤 이들은 사해 사본 발견 장소인 쿰란(Qumran)에 거주하였다. 제사장 직분의 영광을 실추시키는 사두개파사람들에 대해 반발하는 가운데 성장하였다. 그들은 하시딤, 열심당원과 동일시되며 심지어는 그리스나 이란의 반정부 요원들과 동일시되어 왔다.

  가장 완고하고, 독신자들이었다. 재산은 공유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기들 스스로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의 수령자로 여겼다.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오염된 것으로 배척, 안식일 준수사항에는 바리새인들 보다도 엄격했다. 전례의식, 매일매일의 기도, 구약성경에대한 부단한 연구를 엄격히 준수하였다. 매우 묵시적인 경향을 띄고 있고  세례요한이 이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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