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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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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귀춘 교수(세계사이버대학)

 

 복음주의 영성의 신학적 뿌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에 성경의 중요성이 재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은 그런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을 태동케 한 중요한 인물이다. 17세기의 청교도 운동 또한 복음주의 영성의 중요한 연장선이다. 청교도운동은 루터와 칼빈이 주장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중심의 사상을 삶에 깊이 적용시킴으로써 종교개혁을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합리주의와 이성주의가 판을 치는 위기 속에서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부흥운동이 임했다. 이들은 회심과 영적 갱신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당대 영국과 미국에 엄청난 영적 각성을 일으켰다. 교회사적 관점에서 위의 3가지 신학적 맥락은 복음주의 영성의 진수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루터처럼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은 없었다. 별명도 참 여러 가지다. ‘교회의 통일을 파괴한 반란자’ ‘주님의 포도원을 짓밟은 산돼지’ ‘수도원주의의 기초를 파괴한 반항심에 가득 찬 수도사’. 이와는 달리 순수한 복음의 전파를 다시 가능케 한 위대한 영웅’ ‘성경적 진리의 수호자’ ‘부패했던 배교 교회의 개혁가등 양극단의 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 인간이 뭐라든지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셨다. 성경의 권위가 되찾아졌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되살아났다. 종교개혁은 루터 개인의 일을 넘어서서 그 시대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일이었다.

 

1. 종교개혁의 준비 - 루터의 생애

 

회의와 혼돈

 

마르틴 루터는 14831110일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97년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 1년 동안 공동생활 형제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신비주의적 영성교육을 받았고, 1498년부터 3년 동안 아이제나하(Eisenach)의 성 조지(St. George) 학교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배웠다.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나가곤 했다. 당시 성당 안에는 성화를 그려 장식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그의 생을 뒤흔들 두 개의 그림을 만난다. 그중 한 개는 어느 나라의 왕이 죽은 다음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어 기도하느라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뼈와 가죽만 남은 채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몸에는 걸레조각을 걸치고 어깨에는 동냥 바가지를 매었는데 그 모습은 거지보다 훨씬 비참한 것이었다.

천국을 가기 위해 저렇게 참혹한 고생을 일부러 만들어 겪어야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아니 천국은 꼭 저런 고생을 겪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인가?”

또 하나의 그림은 큰 배 한 척이 천국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뱃머리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교황이 교회 감독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고, 사제들은 양쪽 뱃전에서 노를 젓고 있었다. 이중 루터의 관심을 크게 끈 것은 일반 신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두 배를 둘러싸고 험난한 물결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지쳐서 물속으로 거의 빠져들어 가기도 하였고, 사제가 던져 준 밧줄에 매달려서 배와 함께 천국으로 가려고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뒤에는 벌써 죽어서 물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 그림 역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교황과 사제가 이끄는 교회를 잘 따라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루터는 혼돈스러웠다. “교황과 사제들은 배 안에서 저토록 안전하게 천국을 향해 갈 수 있는데, 일반 신자들은 물속에서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고통을 무릅쓰면서 사제가 던져준 밧줄을 붙잡아야만 겨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림이 되려면 배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배 밖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신자들을 배 안에다 안전하게 태우고 교황과 사제들이 그 배를 밧줄로 매어 끌고 가는 것이 옳지 않는가! 그것이 신앙을 지도하는 사람과 지도를 받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나타내는 그림이 아니겠는가!”

교황과 사제들이 성경의 참 뜻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루터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찾아내리라 다짐한다. 이 결심이 후에 교회개혁이라는 커다란 불씨가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미처 모른 채.

 

성경발견

 

그는 18세가 되던 1501년에 에르푸르트(Erfurt) 대학 문과에 입학했는데, 2학년이던 1503년 어느 날 대학교 도서관에서 성경을 발견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해보는 성경이었다. 그는 성경에 교회 예배용 본문들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영혼 속에 한 줄기 빛이 번득이며 그의 지성을 흔들어 놓았다. 한걸음에 기숙사로 가져온 그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대학교내에서도 많은 책을 읽었지만 성경처럼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책은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제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결같이 교황의 지도를 잘 따르라는 것뿐이었지 성경을 소개하진 않았다. 성경 발견! 그것은 연약한 인간 루터를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루터 한 사람이 변화되자 루터의 주변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15055월에 법학부에 입학하기로 작정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법학을 공부하는 것은 출세를 보장받는 길이었으며 명예와 재력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던 어느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이라는 촌락을 향하여 가던 중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나무 밑에 있다가 낙뢰로 인해 동행하던 친구는 죽고 자신은 땅바닥에 쓰러지는 사고를 당하였다. 이때 공포에 질린 루터는 카톨릭 교회에서 가르친 광부들의 수호 성자인 성 안나에게 기도하였다. “성 안나시여, 저를 구해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심사숙고한 결단이 아닌 큰 위기의 순간에 행한 서원이었는데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노력에 의한 구원 추구

찾아간 곳은 어거스틴회에 속한 수도원이었다. 1년 동안 견습기간이었는데, 수도원의 규칙은 매우 엄격하였다. 세평 남짓한 방안에는 책상과 의자, 램프와 침대가 전부였다. 잠자는 시간은 오후 8. 일어나는 시간은 오전 3. 일어나는 즉시 곧 성당으로 가서 기도를 드린다. 기도가 끝나면 묵상시간인데, 이 시간에는 성경이나 수양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책, 가령 어거스틴의 참회록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오전 7시에는 아침 식사하고 낮동안은 주로 노동이나 공부를 한다. 수도사 가운데는 라틴어나 그리스어, 그리고 신학이나 철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가 있으므로 원하는대로 배울 수도 있었다. 루터는 라틴어를 배웠으니까 그리이스말을 배워 그리이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읽고 싶었다. 견습수도사가 된 루터는 매우 철저하게 규칙들을 지켰다. 온갖 천한 일들을 시키는대로 복종했다.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물을 긷고, 수도원 주변을 청소하고, 때로는 다른 수도사들의 세탁까지도 도맡아 했다. 그러면서 먹는 것이라곤 아침엔 빵 한 조각과 무가 둥둥 뜬 수프뿐이었고, 다른 끼니 역시 겨우 굶주림을 면하는 정도였다. 정식수도사가 되어서는 규칙을 더욱 엄격히 실천했다. 서원했던 그때부터 정결과 가난과 복종의 삶을 살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다했다. 어느 때는 빵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사흘 이상을 버틴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고통을 즐겁게 참으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예배시간에 동료 수도사의 발을 잘못하여 밟은 조그마한 일까지도 철저히 회개코자 피가 터지도록 자기 발등을 회초리로 내리쳤다. 기도할 때 여자를 생각한 음란한 자신을 향해 얼마나 심하게 쳤던지 기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내면의 죄들은 그를 더욱 짓눌렀다. 하나님의 복음대로 철저하게 살고싶은 열망이 강한 만큼 죄의 세력이 강하게 그를 옥죄었다. 그리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몸소 깨닫고 이렇게 부르짖는다. “, 복음이 명하는대로 의롭고 정결하게 살고 싶지만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무력함뿐인 나를 발견할 뿐이구나!”

루터는 성경 읽는 것을 금지 당한 채 자신의 죄를 찾아서 고백하기 시작했다. 고해 사재는 더 이상 루터의 고백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지겹게 느꼈는데, 수도원의 가벼운 규율을 어긴 데에 이르기까지 루터는 모든 죄를 찾아서 고백하고 또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의 소망에 대하여 거의 절망하게 되었고 육체의 힘도 날로 쇠약해졌다. 또한 그는 매일 아침 기도 시간마다 3명씩 21명의 성인들에게 호소하였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루터의 씨름은 주로 하나님의 의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와 죄인을 미워하시는 그 분의 영원한 속성이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게 하고 그 거룩함을 획득할 것인가? 였다.

 

빌라도의 계단

151011월부터 15114월까지 어거스틴 수도회의 규칙을 강화하고 재정비하는 일을 위해 루터는 불과 27세의 나이에 대표로 뽑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다. 그는 큰 기대를 가졌고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를 기뻐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카톨릭교회가 참된 교회이고 교황은 땅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대리자이며 영원한 도성인 로마는 거룩한 보좌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덕을 쌓아 자신의 괴로운 영혼에 평안을 얻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 거룩한 도성에 가까워질수록 루터는 그 도시 사방에 널려있는 죄악들을 목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러 수도원을 다니면서 사제들이 너무나 무지하고 터무니없는 미신에 빠져 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루터는 고행을 함으로써 속죄권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거룩한 계단을 방문하였다. 이것은 빌라도의 계단’(Pilate's staircase)이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이는 예수님이 심문 받기 위해서 끌려나오실 때 빌라도가 서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졌으며, 누구든지 맨 무릎으로 그 28계단을 오르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자기의 할아버지를 연옥에서 건져내려고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것은 루터가 기도함으로 할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성경구절이 쟁쟁하게 울려왔다. 이때에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고, 놀라고 의아해 하는 다른 고행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그 계단에서 뛰어내려오고 말았다.

 

오직 믿음!

 

고민하던 중 스승 슈타우피츠(Johnn Von Staupitz, ?-1524)를 찾는다. 죄를 지었을 때 회초리를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쳐다보라는 말에 그는 부지런히 로마서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때 깨달은 것이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믿음으로써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루터의 가슴에선 기쁨이 샘솟듯 솟구쳐 올랐다. 사도 바울이 말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귀가 그의 전 존재를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루터의 수도원 생활은 헛된 것이었을까? 아니다. 거룩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 복음대로 살고픈 애절한 열망 또한 그의 힘이 아니었다. 루터가 진정한 복음을 깨닫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철저한 율법적인 삶을 통해 루터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무력함이었다. 17년간의 방탕생활을 통해 어거스틴이 발견한 진리. “인간의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 믿음만이 구원에로 인도한다는 그 진리는 루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철저한 수도생활을 통해 루터의 갈증은 더해갔다. 복음에 대한 갈망이 불타올랐고, 하나님은 이를 통해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진리에 대한 갈망, 복음에 대한 열망이 철저한 율법적 생활로 이어졌고, 그것은 곧 참 복음을 알게 하는 열쇠가 되었던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성경연구와 진리의 추구-종교개혁의 불씨

 

1507년 슈타우비츠의 권면으로 루터는 사제가 되었으며,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신학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여 1509년에는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때부터 어거스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1512년 에르푸르트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대해 연속적 강해를 한다. 여기서 루터는 고행이나 수도원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특히 1512년부터 1513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에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수도원 탑 속에서 신비한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1514-1517년에 이르기까지 4년간 바울 서신들과 어거스틴의 저서들, 독일 신비주의를 더욱 깊이 연구하면서 확실한 믿음에 견고히 서게 된다.

 

특히 로마서를 연구하는 동안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는 다음 구절에 부딪치게 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 이 성경구절이 루터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모두에 대한 구원의 이중적 본질을 총체적으로 확신케 했다. 루터는 후에 여기에 대하여 밤낮으로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태어난 듯하였으며, 마치 낙원을 향해 활짝 열린 문을 통과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루터는 이제 확실한 구원의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믿음이란 단지 시작일 뿐이고 성도 각자가 공로를 쌓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이 성경 구절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로마교회가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공로란 교회에서 명하는 각종 선행과 로마교회의 교리와 명령, 각종 종교의식과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2. 타락의 극치, 면죄부 판매

교회개혁의 원인이며 개혁을 가능케 했던 직접적인 요인은 중세교회의 부패였다. 소위 돈 만드는 천재로 알려진 교황 요한 22(John XXII, 1316-1334)는 각종 징세제도를 창안하여 돈을 모았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가 창안한 징세제도는 교회질서를 극도로 문란시켰고 교황청의 사치를 가중시켰다. 교회개혁 직전의 교황인 알렉산더 6(Alexander VI, 1492-1503)는 방종한 생을 살았던 악명 높은 교황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이미 몇 사람의 정부와 4자녀를 두었고, 그후 7명의 자녀들을 더 얻었다. 1492년에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경쟁자들을 금품으로 매수하였다. 그의 폭식, 음란은 극에 달했고 일단 파티를 열면 녹초가 되기까지 먹고 마시고 즐겼으므로 그의 살인적 파티는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콘스탄츠 교구의 경우 연간 1500명에 이르는 사제(신부)들의 사생아가 태어났고, 당시 교회는 사생아를 둔 성직자들에게 취첩과 아이 양육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세금을 물게 하여 성직자들의 비행을 묵과하는 동시에 부를 축척하였다. 루터가 95개조를 게재할 당시의 교황인 레오 10(Leo X, 1513-1521)는 사냥과 오락을 즐겼던 매우 세속적인 인물로서 교황권을 남용하여 면죄부를 발행 판매케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발단을 제공하였다.

 

면죄부- 허울좋은 명분

면죄부는 십자군 시대에 생겨났다. 11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참회의 고행을 면제해 주기 위해 속죄장이 발급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이후에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도 돈으로 면죄부를 살 수 있었으며, 1393년 교황 보니화티우스(Bonifatius)가 속죄장을 대대적으로 발매하면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면죄부는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공덕의 창고교리를 통하여 더 크게 왜곡되었다. 즉 예수님과 마리아가 선행을 통해 이룩한 공덕이 하늘에 닿았고 성자들도 큰 공덕을 가지고 있는데, 이 공덕은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1476년 교황 식스투스 4(Sixtus)는 면죄부를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까지 확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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