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를 향한 다양한 시각은 마치 종교개혁의 직전의 상황을 보는 듯 하다. 교회에 대한 불만은 많아도 성도들은 가십거리로만 삼을 뿐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 게다가 뜻있는 사람들은 교회 개혁을 외치지만 교회의 부패와 잘못을 지적하기에 바쁘다. 실제의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물론 달라진 것은 적지 않다. 과거에는 주로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했고, 그래서 입소문이 중요한 미디어였다면, 요즘에는 소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 성도들의 담론은 전자 및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접하는 속도가 빨라져 즉시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범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지역이라는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이뤄지는 현실을 말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갖게 된 의문은 진정으로 무엇이 바뀌어야 할 것인지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부패는 일부 목회자에게 제한된 일이기 때문에 교회개혁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부패를 교회 전체의 부패로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인 오류다. 루터 이전의 개혁 운동이 실패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잘못은 부분에 대한 수술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굳이 거시적인 의미에서 개혁 운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개혁에 있어서 루터의 성공은 그의 신학적인 인식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교회를 이끌고 있었던 신학에 있어서 그가 발견한 오류는 칭의론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로마서 연구로 그가 발견한 sola fide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었으며, 아무리 위협적인 공격이 있었다 할지라도 루터는 공고하게 버틸 성서적인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고 마침내 종교개혁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개혁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단지 부패를 지적하는 것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바로 신학적인 바른 인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개혁을 고민해오던 필자가 이르게 된 발견이며 결론이다. 다시 말해서 질문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잘못, 목회자의 타락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 신학적인 틀은 무엇인가?
이런 관점에서 신학비평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며, 그래서 이를 위한 연구소를 세우게 되었다. “기초신학연구소(The Institut for Fundamental Theology)”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 내용은 비평신학연구소다. 비평을 신학함의 하나로 인지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실천하는 연구소라는 말이다. 지금은 사정상 영화와 문화 비평을 주로 하고 있으나 앞으로 한국 신학에 대한 비평을 중심 과제로 삼을 것이다. 이 연구소가 앞으로 할 일은 바로 한국교회를 이끌고 있는 신학들을 학문이론적인 방법으로 비평하는 일이다.
여하튼, 필자의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이르게 된 잠정적인 결론은 먼저 교회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됨을 고민하기보다는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의 ‘사역’을 중심으로 교회를 생각하다보니 목회자의 자질보다는 사역을 실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교회가 성경에 합당한 모습이 되기를 노력하기 보다는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곧 교회의 사역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된다.
예컨대, 대형교회를 비판할 때마다 나타나는 전형적인 반응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일반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갔던 성도들이 마지막 선택으로 대형교회를 찾아왔다는 말이다. 둘째는 교회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교회에서 쉽게 할 수 없는 강사들을 초빙해서 성도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교회가 쉽게 할 수 없는 대규모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재정이 필요로 하고 또한 인원이 동원되는 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대형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넷째, 지역사회와의 연계 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목회자의 설교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들이 위로와 치유를 받는다는 말은 목회자 개인에게 달린 것이기 때문에 대형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는 사실 맞지 않는 논리다. 이 말은 대형교회 목회자의 영적 자질, 설교 능력, 목회 능력이 다른 교회 목회자들보다 우월하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정말 그런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여하튼 부도덕하고 자질이 미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대형교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은 못된다.
그 외의 이유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사역론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일인가? 교회는 무엇이 되는 것과 무엇을 하는 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양자를 분리하는 것은 사실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됨을 무시하고 교회 사역을 우선하는 분위기에서는 따져볼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과 의인이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지, 의로운 행위로 의인이 되지 않는다는 루터의 말에 근거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다. 즉, 교회됨이 사역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 사역이 교회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개혁을 위한 방향을 생각해볼 때 우선되는 것은 사역론에서 벗어나 교회됨에 집중해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오늘날 교회개혁의 단초는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교회사역론에서 벗어나 하루속히 교회됨에 관심을 갖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목회자 청빙과정이 바뀌어야 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에 관심을 갖고 목회자 청빙이 이뤄져야 한다. 청빙 조건이 진실한 목사가 아니라 마치 목회 기술자를 요구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 시간을 두고 기도하며 목회자를 청빙해야 할 것이다. 전임자는 후임자를 물색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주어야 한다. 이력서를 보고 한 두 번 설교를 들어서 어떻게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셋째, 뿐만 아니라 대형교회는 기꺼이 분립해야 한다. 적어도 목회자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정도의 규모로 축소해야 한다. 대형교회가 아니라도 연합해서 얼마든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할 수 있으며, 대형교회가 분립할 때 무임 목회자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작은 교회가 될 때 비로소 성도들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할 수 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넷쩨. 이를 위해 더욱 절실한 것은 대규모 집회를 철회해야 한다. 교인들을 동원할 수 있고, 또 재정적인 후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도자로 여기는 분위기는 바로 대형집회의 필요성 때문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해마다 부활적 집회에서 누가 설교자가 될 것인가, 누가 순서를 담당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어난다. 방점이 찍히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대형교회 목회자들이다. 왜냐하면 대형집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인원동원과 재정후원의 문제가 절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참다운 설교자, 혹은 시대적인 고민을 부활의 말씀과 함께 성찰하고 나누는 설교자가 아니라 대형교회 목회자가 설교자가 되고 기도순서 등을 맡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일어나는 판단의 오류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대규모 집회는 과감하게 포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