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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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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교역자 양성을 위한 교육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1. 신학교와 신학생은 많을수록 좋다.

어떤 이들은 오늘의 한국 신학교육에 있어서 문제는 신학교와 신학교에서 배출하는 신학생(전도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교회가 배출되는 신학생 모두를 수용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총신대 박 학장의 발표에 의하면, 지금 한국에는 문교부로부터 인가받은 학교가 50개교요,무인가 신학교가 270개가 된다. 해마다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신학생의 수는 무려 6.500명이나 되며 그중 학력 인정교에서 배출되는 졸업생은 불과 1,500명 가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신학교나 신학생의 숫자가 많다는 그 자체가 문제라고는 보고 싶지 않다. 선교학적으로 생각할 때에 우리는 신학생 배출을 현재 교회의 수요공급의 원칙에서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교회는 일꾼이 나가 사역함으로 설립되고 확장되어 나가기 마련이다. 신학생의 증가는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더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교육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신학적으로 훈련시켜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여 모든 족속을 그리스도의 제자삼는데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신학자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그가 최근에 쓴 글2)에서 지적하기를 앞으로는 더욱더 교역자와 평신도가 더불어 지도층을 형성하고 함께 일하는 시대가 온다고 예견했다. 교회가 세계선교라는 그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는 평신도, 곧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훈련하고 동원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러므로 평신도 교육을 포함하는 신학교육은 여전히 각 게층에 요망된다고 본다. 이에 어찌 신학교가 많다고 걱정하며 그 수를 줄여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문제는 신학교육은 모두 교역자(Fulltime Minister or Pastor) 만을 위한 것이라는 개념이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신학교육을 수준 등 기타 모든 면에서 단일화하라는 소리도 무리라고 생각한다.

2. 목사나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은 대학원 수준이라야 한다.

공통적인 요청이 있다면 신학교육의 수준을 높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특별히 목사나 선교사(Full Time Minister)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은 대학원 수준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대학 학부(Undergraduate)수준에서의 실시하여 오던 교역자 양성 프로그램은 대학원(Graduate)수준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다음 몇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일반 사회의 교육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이는 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현재 우리나라 대학 재학생이 74만명 정도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인구는 매년 20만명이상 누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 나아가면 2000년대에는 고등학력 인구가 1,100만을 상회할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전국민의 20%을 넘는 숫자로써 도시 지역에는 적어도 60-70%이상이 될 것이다.

2) 이런 추세로 나가면 2000년대에는 교회에서 일하는 평신도 임직원이 대부분이 대학 졸업자가 될 것이다. 이에 그들의 지도자가 될 목회자는 모름지기 그들의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은 타문화권에서의 사역할 선교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타문화권에 사역하는 선교사는 그 지역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게 될 경우가 많을 것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3) 그보다도 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자체에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신학교육은 대학원 수준의 교육이 바람직하다. 일찌기 미국에서 신학교육의 기초를대학졸업후 3년 과정의 신학석사(Master or Divinity)과정에 두고 있으며,유럽 여러나라의 신학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얻은자 중에서 교역에 종사코자 하는 자를 2년 정도의 특별교육을 받은 후 교역에 임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우리나라에서도 신학대학원을 지원하는 대학 졸업자의 수가 많은 점을 감안할 때, 교역자 양성의 중심을 대학에서 대학원 수준으로 올릴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생각된다. 이미 상당 수의 교회(교단) 가 목사 안수의 기초교육을 신학대학원 졸업으로 하고 있는 실정은 이의타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II. 신학교육의 목적이 확실하여야 한다.

1. 오늘의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긴장

오늘의 신학교육에 있어 크게 거론되는 문제는 오늘의 신학교가 교회가 바라는 목회자나 선교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선 신학교육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신학교육을 시행하고 있느냐 하는 기본적인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신학교들 간에 상반되는 긴장이 있어 왔음을 우리는 안다 루엘하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에 있어서 신학교가 하나의 신학을 배우는 센터가 되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교역자를 훈련시키는 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냐의 논란이 극심해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 같다. 우리 가 신학교를 신학을 배우는 전당(center)으로 생각할 적에는 교회를 위한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라고 할 때, 그 신학교는 학문을 닦음으로 그 신앙을 지켜 나가게 해야 하는 책임을 약화시켜 나간다는 것을 염려하게 된다. 그렇다고 신학교가 이 두가지를 다 하고자 할 때에는 신학교의 책임이 너무 과중하다고 느끼게된다. 이런 면에서 양면, 곧 교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것과 배울의 전당으로 한다는 두 가지 주장을 상호 연결시킨다는 것은 어렵고도 괴로운 작업입니다.3)

과거 오랫동안 신학교들이 이 문제 때문에 홍역을 겪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학교육에 있어서 이론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신학교육을 말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늘 학적인 추구(academic pursuit)에 머물러 가져오곤 했다. 그리하여 신학교육이 그 시대의 문제에 상관치 않고 문제들에게 완전히 고립된 교육을 해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시대의 문제들을 미숙한 대로 다루어 버리면서 존속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오늘에 있어서 생활의 여러가지 면들이 신학에서는 등한시되어 왔다.

어떤 때에는 학문적인 관심만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에 대한 관심도 때로는 초월하고 따라서 교회와 신학자, 특히 교회 평신도와 신학자들 간의 대화에 있어서 깊은 간격(gap)을 조성했다. 더 나아가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신학적인 혼돈과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상실함으로 인하여 당황하고 실패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린젤(Lindsell)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학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신학적인 방랑아(vagabondae)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들이 애당초 시작할 때 다짐했던 그 교리적 입장에 충실히 머물러 있는 학교가 거의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신학교들이 서로 부정하는 모순된 신학적 견해가 혼합된 추태를 보임으로 인해 학생들로 하여금 혼돈과 고민에 빠지게 하고 있다.4)

다른 한편, 어떤 신학교들은 실제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또 하나의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의 관심과 생각은 오늘의 세상사에 있다. 즉 오늘의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관여하고 또 관심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오늘의 사회복지 문제, 정치적 개혁,더 나아가서 사회혁명등의 세계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걱정하고 있다 이들은 종종 기독교를 "교회없는 기독교"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편 이에 대한 반발로써 어떤 사람들은 신학교육이란 단지 어떤 교회에서나 한 교파에서의 사역을 준비시키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의 진리와 신학교육을 제한하고 마침내 선교의 한계도 제약(restrict)한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신학교들이 해야할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2. 복음주의 신학교의 사명과 역할

복음주의 신학교(Confessional School of Theology)란 역사적 기독교 시상에 굳건히 서서 그것을 지키려는 학교로서 늘 그 영적인 유산을 살려나가려고 애쓰는 교육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주의 신학교는 그 영적인 유산을 오늘의 시대를 위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하며 세상과의 대화에서 이런 생생한 영적 요소들의 의의를 증거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은 학생들이나 교회가 신학적 불확실의 바다에 빠져 신앙생활의 다이나믹을 상실하고 마침내는 신앙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복음주의적 신학교는 교회를 중요시 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향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유일한 도구(the instrument)이다. 이런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학교란 교회의 일부이지 결코 신학교가 교회와 완전히 격리되어있는 기관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신학교육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 믿음 안에서 훈련시키는 책임을 담당하고 있는 기관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신학교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선교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육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connunity)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교는 교수나 학생이 다 마찬가지로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원숙하게 성장해 가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복음주의 신학교에서의 도전과 반성

최근에 이르러서는 애초 복음주의 신학교로 출발한 학교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우리가 이해하기는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교는 교역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교회가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를 시작할 때에 그 나름대로의 신학적 정체성(its own theological identity)이 있었다. 그러나 교육 기관이 근대(비판적이요 과학적인) 시대에 돌입하면서 이런 신학교들은 자유주의에 의한 도전을 받아 적지 않은 신학교들이 자유주의 신학교로 변질된 것을 본다. 그리고 이들은 신학함에 있어서 개방적이라고 자처하며 마치 자기들이 발전한 것처럼 말한다.(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개방적 자세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보다 폐쇄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운 신학사상에 대해서는 아주 개방적이지만 보수적 입장에 대해서는 아주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자유주의적 근본주의 사고(Liberal oriented fundamentalistic mentality)라고 부르고 싶다. 이리하여 이들은 학문의 자유(Liberalism)라는 명분을 내세워 지금까지의 전통적 교리를 재해석한다 하며 역사적 교리를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거나 도는 파괴하고 있다.

그들의 학문추구는 학문을 추구로 전락한다면 이리하여 교회에 절충주의 또는 신학적 다윈주의(Theological Pluralism)를 자랑스럽게 도입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것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신학교육으로서는 실패임이 틀림없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교역자가 목회에는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5) 이점에 있어 한국의 신학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아니,보수신학교라고 하는 곳에도 보이지 않게 이런 경햐에서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에 필자는 최근에 오덴이는 쓴 책6)과 그의 말을 소개하고 싶다. 이 책에서 오덴박사는 근래의 신학에서 비판적인 근대주의적 접근 방법이 어떻게 신앙의 손실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또 교회에 생산적인 결과보다는 좌절(frustration)을 가져오게 했는지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비판적인 접근이라는 것이 우선 전통적인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교리와 전통을 현대인의 사고에 맞도록 재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에서 결국 신학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런 방법은 초대 교회의 신학자들, 즉 호교가들(Apologists)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호하고 교회에서 그 주어진 진리를 고수하려고 노력한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오덴박사는 강조한다. "텍스트에 머물라! 원 텍스트에 귀를 기울이라...성경을 상고하라. 그리고 초대교회의 전통,종교개혁자들의 텍스트 위에서 신학을 개진하라. 그리고 이 신학 테스트들은 성경을 거룩한 경전으로 믿으며 전통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에서 읽도록 하여야 한다."이런 권고는 오덴 자신이 오랫동안 불트만 학파, 심층심리학,행동주의 등등에 심취되어 학문하며 방황하다가 전통적인 신학의 캠프로 홈커밍(home coming)하면서 한 말이다.

이런 오덴의 말은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될 것이다. 오덴박사의 비판과 제언은 오늘의 복음의 시학교 캠퍼스에서도 한번 깊이 새김질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요즈음 복음주의 신학교 캠퍼스에서도 가끔 돌아다니는 다음과같은 말을 들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 1학년에 들어 올때는 "목사"인데 2학년이 되면 '장료가'되고 3학년이 되면 '집사'가 되고 4학년이 되면 '평신도'의 신앙이 되고 만다. "그러면 졸업할 때의 그 신앙은 어떤 것일까?

오덴박사는 이어 말한다. "신학은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방법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옛방법,우리가 잘 아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되어져야 한다. 근대 비판적 신학교육은 이미 시대적 페물(already way out of date)이 되었고 그들의 과격한 신학의 주장(약속)이 가져오는 것은 권태증과 근대주의 온갖 아이디어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하면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르자, 이것이 사실인것 같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기회에 모든 신학자가 자신들의 신학하는 자세와 방법에 있어 과감히 반성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신학하는 분위기(Contexts)가 초대교회의 공동체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바꿔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다의 물고기는 바다 물에서만 생기는 것과 같다. 이럴 때만이 오늘의 복음주의 신학교육이 교회에 도움을 주며 애초에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신교육은 커리큐럼이나 학생회 훈련 모든 면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특히 세가지 분야,곧 영적인 훈련, 학적인 훈련, 그리고 실천적인 훈련을 적절하게 시행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III. 복음주의 신학교의 교육목표

1. 신학교육에서의 통합적 훈련의 필요

하나의 효율적인 신학교육은 학문적인,실천적인 그리고 영적인 교육에 철저를 기하는 것뿐 아니라, 이 세 분야가 피차간 건전한 조화를 잃지 않고 온전한 수준에 이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면 이 조화있는 성취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것이 오늘의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큰 문제로 대두된다. 왜냐하면 신학 훈련을 위한 신학교의 수학기간이란 극히 제한되어 있고 요구는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위적인 비유를 든다면 과거에는 신학의 파이(pie) 가 세가지로, 즉 성서적인 연구(성서신학),이론적인 연구(이론신학),그리고 역사적인 연구(역사신학)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세가지가 신학교의 교과과정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것이 보다 적응성을 갖기 위해서는 신학교육이 그외에 많은 분야의 프로그램들을 추가해야만 하게 되어졌다. 곧 인격을 성숙케하기 위한 영성 훈련과 실제 교역에 능숙하게 하기 위한 실천적 훈련 등,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된다. 이렇게 된다면 과거 학문적인 추구에 집중되어 있던 수학기간이 굉장히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요구되는 그 많은 과목들을 어떻게 조화있게 배정하고 제한된 기간에 적절하게 교육할 것인가? 여기에 우리는 하나의 큰 어려움을 안게 된다. 신학교가 실천적 훈련에 주력하면 결국은 성서신학, 이론신학 같은 학문적인 교육을 위한 시간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 문제는 신학교의 학제,곧 신학교육의 수학년한 문제,그리고 커리큐럼의 구성문제와 직렬된다.그러므로 이 문제들이 다음 시간에 따로 심도있게 다루어질 것이지만)여기에서 필자는 이 어려움을 경감하며 신학교육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말한 세 분야를 통합하여 교육할 필요를 주장하면서 다음의 몇가지를 제의하고자 한다.

2.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에서의 교육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신학교육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분위기와 공동체에 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신학교육이란 전인간 (whole man)을 위한 교육이기에 그가 생각이나 행위나 느낌에 있어서 늘 성령의 영감에 호응하는 사람이 되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청지기가 되도록 훈련하는데 있다. 일반세상 교육에서도 사회 공동체(community)의 요구를 중요시하고 있듯이 신학교육에 있어서도 영적인 훈련과 아울러 공동체를 위한 교육도 매우 중요하다고 느낀다. 어떤 신학 교육자는 말했다. "이와같은 영적인 사람 형성에 있어서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community)이다... 곧,함께 살며, 생활하며, 먹으며, 그리고 함께 기도하면서 신학생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선교의 열심과 형제우애를 가지고 어떻게 함께 생활할 수 있는가를 실제로 배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의 채플, 교직원 기도회 학생 수양회같은 프로그램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신학교는 일주일에 2회에 채플을 갖고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참여케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채플에는 교직원도 모두 참여케 하여야한다. 신학생에게는 한학년,적어도 한 학기만이라도 생활관에 입사하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영성훈련을 받게 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곳에서 그들은 함께 먹고, 자며, 매일 새벽기도회를 하며 경건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또한 교목실을 설치하고 학생들의 그룹별 성경공부,기도모임등을 통하여 제자화운동을 전개하여 모든 학생을 제자화하는 작업과 함께 2E-O전도도 시행하여야 한다고 본다. 건축가가 집을 세워나가다가 기초가 허술한 것을 발견하면 그 기초 수리를 먼저하고 집을 세워나가야 하는 것 같이,신학생 가운데 아직도 신학공부할 "기초"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기초를 갖게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여기에 신학교 교수는 실제로는 이중적 사명,곧 전도자와 가르치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신학대학의 캠퍼스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는 우선 모든 신학생이 거듭난 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견지에서 신학교는 일년에 춘추 2회에 걸쳐 심령 부흥회를 갖기를 권한다. 이는 모든 학생이 거듭나는 체험을 갖게 하며 아울러 성결한 생활로 나가도록 인도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영적인 공동체-교육이란 외형적인 방법이나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에 참여하는 교수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서 학생들을 지도할줄 알 때에만,이 일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교수들의 자질문제가 아주 중요하다. 오늘날 대학의 교수라면 의례히 박사라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학적인 성취가 늘 신앙적 성숙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믈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그러므로 교수와 직원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을 돌보고 일년에 두 차례 매 학기마다 교직원을 위한 퇴수회를 가지며 교직원의 친목 도모 뿐 아니라 심령부흥과 사명감을 새롭게 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3.세계선교를 지표로 하는 현장 사역에서의 교육

론데스(Lowndes)는 이 모든 것을 종합시키는 장으로써 현장실습(Field work)을 제안한다.8) 현장실습이 그들이 신학교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여러가지로 배운 것을 한번 종합하면서 봉사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런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교수와 목회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생들이 목회실습 프로그램을 할 수 있다면 학생들은 교실에서 배운 내용이나 거기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세상의 생활 속에 있는 문제들과 접촉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배운 이론과 지식으로 현실과 부딪쳐 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교실과 교수와 동료 학생들에게 돌아와서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승리와 실패를 나누게 된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적으로 추궁하던 모든 것을 이제는 땅을 딛고 함께 걸어가는 교육으로 향상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6-8학점의 목회실습을 이수하도록 하여야 한다.일주일에 한번씩 그룹별로 학생들이 교수와 만나 사역현장에서 경허만 것들을 함께 토의한다. 이런 목회실습을 통하여 보다 종합된 신학교육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하여는 보다 적극적인 현지 목회자의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장 사역이라는 것은 교회 목회와의 연관만이 아니다. 학생들이 생활하고 있는 캠퍼스가 바로 사역현장이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신학교육은 사역(전도)하는 콘텍스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신학을 가르치실 때에 상황이요,바울 사도가 신학을 개진할 때의 상황이 아니었던가?여기에 신학교에서는 전도를 가르칠 뿐 아니라 캠퍼스에서 실제로 전도를 하는 일을 힘쓰게 하여야 한다. 모든 학생들에게 필수과목으로 "전도의 이론과 실제"라는 과목을 이수케 하며, 실제로 학생들이 전도에 참여하는것을 강조해야 한다.이는 전도폭발,전도요원 양성과 같은 프로그램을 변행함으로써 보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실제 참여와 더불어,신학교육의 교과과정은 "세계복음화"라는 예수님의 대부분에 그 지표(Lodestar)를 두교 편성되고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학교에서는 선교과복이 필수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의 해외선교여행 등, 선교활동을 권장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위하여 신학교육이 설립되었다면 교회의 본질적 사명완수가 그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모든 족속을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대 분부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교육기관이 개교회의 개척과 그 교단의 교역자양성9)에 그 목적을 두었다면 이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세계선교라는 맥락에서보다는 개교단 확장에 급급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신학교육은 교회가 세계선교의 주요한 기관(Agent)임을 인식하는 가운데 우선적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세계선교 대 분부가 신학교육의 지표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특히, 앞으로의 세계선교의 한국교회 주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세계교회의 중심과 지도력은 한국교회와 같은 제3세계로 옮겨지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한 신학교육에서는 주님의 세계선교의 대 분부가 신학교육의 지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개교회의 개척,성장도 세계선교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Kaiser 박사가 말했듯이 신학교육에서 "세계선교라는 지표(lodestar)를 잃는다면 그 신학교육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10)

4. 신학교육이 세계선교를 그 지표로 세운다면 이에 뒤따라야 할 과제가 있게 마련이다.

a) 첫째로, 신학교육 과정에 "선교학"에 관련된 과목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신학교육에서는 교회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순학문적 방법(Academic Approach)이 그 우위를 차지한 실정인 것 같다. 때문에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을 신학교육의 중심으로 회복하기 위하여는 최소한도 "선교학"과목이 필수과목으로 설정되어 선교의 본질,역사,사명등을 가르처야 할 것이다(한국의 신학대학 가우데 '선교학'을 필수로 하는 학교는 한 둘에 불과하다).이 과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과목들은 중진교수들에 의하여 강의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b) 더 나아가 "선교학부"를 독립시켜 선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거나 선교대학원 (School of Mission)을 세우는 일을 권장할 만하다.

c) 신학교육은 교과과정에 의한 교실에서의 강의로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신학교육은 교회와 신학교육이라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보완되어야 한다.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 신학교육을 학생들의 공동체의 생활과 과외 학생 활동으로써 선교운동에 접하고 참여하는 훈련을 따라야 할 것이다. 예를들면
1. 선교사들을 통한 선교 상황에서의 접촉
2.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회
3. 단기선교활동 참여(국내외) 등

5. 교회와 함께하는 신학교육

위의 프로그램을 성취함에 있어서 그 외 여러가지 제안이 있겠으나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학교육은 교회 목회자들과 협력하여 이행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학교 측에서의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아니 그에 앞서 교회의 이해와 협력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 백성을 신학적으로 교육시키는 신학교육 자체가 교회가 시행해야 할 과제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실,신학생 후보를 가르는 것은 개교회가 아닌가? 그런 신자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동안에도 그들을 개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며 양육을 계속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에 교회가 "신학생"을 교육한다고 인식하고 지도하게 되면 오늘의 신학교육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또한,신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교단이 인정하는 교역자가 되기까지는 지방회 또는 노예에 소속되어 목사 후보생의 훈련을 받게 되어 있는데, 이 기간이 명실공히 교역자 양성 기간으로 연장, 활용되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신학교는 이런 것들을 활용하여 교회와 보다 밀접하게 신학생을 교육시켜야 한다.이렇게 할 때에 신학교육이 단순한 아카데미즘에 빠지지 않고 "교역자"를 교육시키는 과업을 효율적으로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교회의 신학교육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되어질 때에는 교회는 신학교육에 대한 재정지원도 성의껏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함으로 오늘의 신학교가 당면하고 있는 재정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맺는 말

위에서 말씀드린 것은 교역자(특히 목사와 선교사)양성을 위하여 보다 적절한 신학교육을 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일 뿐임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바라는 이상적 목표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요원하다. 신학교육의 문제와 딜레마는 아직도 미해결인 채로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다. 이것이 곧 신학교육의 출발점인 것을 상기할 때 우리는 이 과업을 위하여 감히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신학교의 졸업 때 쯤이면 우리가 종종 느끼게 되는 실망감에도 불구하고 이들 졸업생들이 2,3학년후에는 개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음을 때때로 발견하고는 격려를 받게 된다. 우리의 가르친 바 교육이 완전히 성취되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하나님의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그리고 오늘의 신학교육을 통하여서 하나님 자신이 역사하고 계신다. 이것이 곧 신학교육에 있어서의 우리의 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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