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의 가톨릭 교회
세계 선교의 새 시대
세계 탐험과 식민지 건설 : 중세기에 있어서 교회의 주요 임무는 고대 희랍-문화와 그리스도교를 파괴하던 게르만 민족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7세기에 이르러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이 이교도들의 침입으로 그리스도교 세계는 지역적으로나 숫자적으로 감소되었고, 유럽과 동양 사이의 통로가 폐쇄되어 이제 그리스도교는 거의 완전히 '유럽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세계 탐험에 나서면서 교회는 세계 선교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유럽인들은 동양(특히 인도)과 통상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이슬람 제국 때문에 육로를 통한 무역이 불가능하여 동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포르투갈 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함으로써 인도 항로를 개통하였고, 카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하여 포르투갈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마젤란은 세계일주 여행을 하였다. 1542년에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고, 1557년에 포르투갈은 중국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이곳은 극동 무역과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스페인의 카스틸랴 왕국도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룸부스로 하여금 서항로를 통해서 인도로 출범케 하였다. 콜룸부스는 4차례에 걸친 항해를 통해서 중남미의 여러 섬과 지방을 발견하였다. 그 외에 많은 스페인 항해사와 탐험가들이 프에르토 리코, 쿠바, 파나마,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를 발견,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국가 후원의 선교
지리상의 신발견과 식민지의 건설은 유럽인들이 동양과 직접 통상하려는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인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복음의 세계 전파에 나섰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1454년에 칙서를 통해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권과 점유권을 승인하였고, 교황 갈리스도 3세는 '그리스도회'를 설립하여 그 책임자인 포르투갈의 왕이나 왕족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고 선교사들의 생계유지와 신변안전을 보장할 의무를 요구하는 대신에 교회 감독권과 주교 임명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조치는 '국가의 교회 후원'(파드로아도 Padroado)이라고 불린다. 이 제도에 의하면, 포르투갈 왕이 식민지의 선교 지방에 파견할 주교 후보를 추천, 임명하면 교회는 나중에 형식적으로 승인하고 주교로 성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콜룸부스가 제1차 탐험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스페인의 카스틸랴 왕가는 스페인 출신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포르투갈의 왕이 소유한 모든 권리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특권과 의무를 부여하는 동등한 조치(파트로나토 Patronato)를 취하였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두 탐험 세력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양국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도상에서 남북으로 선을 그어 대서양의 서부 지역(아메리카)은 스페인에게, 동부 지역(아프리카, 아시아)은 포르투갈에게 무역 독점권과 선교의 의무를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교회 선교 후원 제도는 교회가 처음에 의도한 대로의 선교 수단이기 보다는 군사적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는 동기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정복자들은 강제로 원주민들의 종교를 근절시키고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키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따라서 토착민들에게의 선교 활동을 가톨릭 점령군의 사업으로 보았고 선교사를 식민 정치의 협조자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의 선교는 강력한 식민지 정책이 확립되고 원주민의 토착종교가 저항하지 않는 곳(중남미 지역)에서만 성공할 수 있었고 고대 문명국가인 인도, 일본, 중국에서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또한 선교 방법에 있어서도 선교의 중심세력이었던 두 수도회, 즉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신앙의 토착화에 무관심하였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확립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고수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식민지의 토착문화를 무시하고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가톨릭 신앙을 그대로 주입시키고자 하였다.
새로운 선교 정책 : 식민지 정책과 유럽 중심의 선교 방법은 예수회의 등장으로 도전을 받았다. 동양, 특히 인도, 일본, 중국은 예수회의 선교 활동 지역이었다. 프란치스코 드 사비에르와 알렉산드리 발리냐노가 일본에서, 마태오 릿치가 중국에서, 로베르 드 노빌리가 인도에서 새로운 선교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토착민과 의식주를 함께 하였다. 또한 이들은 원주민들이 신앙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우선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한편 교회 당국은 국가의 교회 후원 체제에서 벗어나 선교 업무를 직접 관장하기 위해 1622년 포교성성을 설립하여 새로운 선교 지침을 수립하였다. 포교성성은 수도회의 선교사들과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재속신부들도 선교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그 결과로 1658년에 '파리 외방전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선교 지방의 교회가 '유럽의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1627년에 우르바노 신학교가 설립되어 방인 사제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포교성성은 지방교회가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해서 주교좌를 증설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가의 교회 후원 체제와 마찰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법적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편법으로 ‘교황대리 감목 제도’가 신설되었다. 이 교황대리 감목은 주교가 아니라 명예주교의 직책을 갖고 교황의 대리자로서 주교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58년부터 포교성성은 이 주교들을 파견하였으나 국가의 교회 후원 제도에 의해 임명된 기존 주교들은 포교성성의 선교사들을 배척하였다. 이 불행한 사태는 1853년에 교황청과 포르투갈이 협상, 합의함으로써 제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사들의 충돌은 후에 선교 방법에 있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인도에서 예수회원 노빌리가 개종한 신자들에게 미신이 아닌 이상 토착 신앙과 전례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순응 방법에 대해 다른 선교사들이 논쟁을 불러 일으켜 결국 1704년에 교황 끌레멘스 11세가 예수회의 토착화의 방법을 단죄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조상제사문제로 마태오 릿치가 시행한 순응 방법이 1715년에 금지되었다. 교회의 조상제사 금령은 1742년에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칙서로 재확인되어 1939년에 이르러서야 해제되었다. 이 금령은 교회 박해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교회의 선교 정책에 있어서 교세 확장의 장애물이었다고 오늘날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시대를 맞이하였다. 교황과 로마 성청은 교회의 쇄신 작업에 임하면서 각 지방 교회와 교구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관할권은 이미 교황 식스또 5세에 의해 설립된 15개의 추기경단과 각 국가에 창설된 교황 대사관을 통해서 내외적으로 증대하였다. 이 추기경단은 특수한 관리 업무를 행사하였고, 교황 사절들은 교황청의 직속 관리로서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교황청의 중앙집권 체제는 교회 쇄신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필요하였지만, 교회 쇄신이 정착화된 후에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각 국가의 군주들과 지방 주교들은 중앙집권의 정책을 지나친 간섭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각 국가에서 일기 시작한 국가지상주의와 이에 따른 국교회사상은 17-18세기에 특히 프랑스(갈리아주의), 독일(페브로니오사상), 오스트리아(요셉주의)에서 교회를 괴롭혔던 반가톨릭 운동을 일으켰다.
국가지상주의-국교회사상
갈리아주의 : 이는 프랑스의 왕권, 프랑스 교회의 교권, 프랑스 국회의 권리, 교황권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면서, 프랑스의 교회는 로마 교황권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창한 사상이며 반가톨릭 운동이었다.
삐에르 삐투는 그의 저서, 「갈리아(프랑스)교회의 자유」('갈리아주의'<갈리까니즘>란 명칭의 유래)에서 프랑스 왕의 교회 권한을 주장하였다. 즉 프랑스 왕은 국가 차원의 공의회를 개최하고, 프랑스 주재 교황 사절의 관할권을 제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교황을 걸어 전체 공의회에 기소하고, 교황 칙서의 타당성과 그 실천에 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의 정치가인 아르망 장 뤼 쁠레시 리쉘리외와 추기경인 쥘레 마자렝 등이 받아들여 프랑스는 이교의 위기에 도달하였다. 더욱이 태양 왕 루이 14세의 절대 군주주의 영향으로 국교회사상은 절정에 달하였다.
프랑스 국회는 1663년에 소르본느 대학 당국에 공의회 우위 사상을 승인하고 교황의 교리에 대한 무류성을 부인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682년 3월 19일, 프랑스 성직자의 집회에서 '갈리아 교회의 4개 항목'이 선언되었다. 이 선언문은 보수에 주교가 루이 14세가 원하는 왕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프랑스 교회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이탈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초안하였다.
그 내용은 교황권의 약화, 공의회 우위 사상, 프랑스 교회의 자율건, 교황의 무류권에 대한 거부 등이다. 이것은 1690년에 교황 안렉산데르 8세의 항의를 받게 되었고 결국 루이 14세는 1693년에 취소하였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페브로니오사상 : 독일에서도 주교들이 그들의 자주권을 주장하였다. 이 사상의 주요 교리는 트리어의 주교인 요한 니꼴라우스 폰 혼타임의 저서인 「교회의 상태와 로마 교황이 합법적 권한에 관하여」에서 나타나고 있다.
혼테임은 '유스띠노 페브로니오'라는 익명으로 이 저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페브로니오 사상'이란 명칭이 나왔다. 이 사상에 의하면 천국의 열쇠는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교회, 즉 주교들로 구성된 전체 공의회에 부여된 것이며, 주교들은 그 임무를 교황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받았다. 로마의 교황은 다만 보편적 교회의 일치를 이루고, 교회법을 보존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주교들은 교황이 갖고 있는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페브로니오사상은 국왕의 수위권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갈리아주의와는 다르다.
1786년 독일이 대주교들이 피스토이아 종교회의와 엠스 집회에서 페브로니오의 원칙을 받아들여 뮌휀의 교황 대사관 설립에 대처하였다. 이들은 교황 사절의 교황 전권 대리자 위치를 반대하였다. 교황 끌레멘스 13세는 페브로니오의 사상을 단죄하였다.
요셉주의 : 국교회사상은 가톨릭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황제 요셉 2세는 국가지상주의 이념(요셉주의)에 의해서 1781년에 교회 개혁을 단행하면서 교회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고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몰수하였다. 황제는 종교적 관용법을 공포하여 가톨릭의 유일종교 사상과 그 실천에 종지부를 찍고, 개신교와 유대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가하면서 모든 종교는 국가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주교들은 국가에 충성 선서를 이행할 의무가 있고, 신부들은 국가의 공무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왕가와 교황청의 국교 관계는 1850년까지 단절되었다.
이단 운동 - '얀세니즘'의 발생
벨지움 이프레스의 주교인 오또코르넬리오 얀센이 그의 저서「아우구스띠노」에서 여러 신학이 혼합된 이단을 내세웠다. 이 사상은 외적으로는 경건심과 엄격주의를 제창하면서 내면적으로는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원죄설과 은총론을 편견적 과장으로 내세우고, 여기에 칼뱅의 신학을 첨부하였다. 얀센의 사상은 쌩 끼장(쟝 뒤베르기에 드 오란느)을 통해서 프랑스에 전파되었으며, 경건한 수도생활로 덕망을 떨치고 있던 뽀르 로아얄 수녀원이 중심지가 되었다. 이 수녀원을 중심으로 많은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이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프랑스 얀센파들은 '끼랑파'라고 일컬어졌음) 이들 중에는 「팡세」로 유명한 블레즈 파스칼도 있었다.
얀센파들은 예수회원들의 해이한 윤리 신학을 비난하고, 엄격한 교회 규율의 준수와 성사 배령을 주장하고 특히 엄격한 공심제를 강조함으로써 일반 신자들의 영성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들은 로마 교황청과 오랜 동안의 논쟁으로 가톨릭 교회와 대립하고 있다가 교황 인노첸스 10세와 끌레멘스 11세에 의해서 단죄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적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루이 14세에 의해서 프랑스로부터 추방되었고 뽀르 로아얄 수녀원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는 얀센파들이 존속하게 되었고 1723년에는 우트레트 주교좌를 설립하여 교계제도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를 떠나는 고(古) 가톨릭 교회가 되었으며, 교계가 독일에서 설정되는 데에 이바지하게 된다.
계몽사상
계몽사상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서 발전한 사조로서 18세기 유럽의 정신문화를 특징짓는 지성운동이다. 이 운동은 서양 정신사에 나타난 마지막 사상으로서 지적 문제에 있어서 모든 지식과 진리를 인간의 이성, 직접적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경험론적 합리주의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존의 권위, 전통, 제도, 관습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배격하면서 관용의 인도적 이상, 정의사회 구현, 인간의 윤리와 복지의 향상에 이바지하는 데에 학문적 방법을 사용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서양에서 중세기적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묶여있는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써 현대적 발전을 가능케 한 사상가들이었다.
계몽사상은 중세기의 비인도적인 종교재판과 고문의 철폐, 종교 차별의 폐지뿐 아니라 인권 투쟁의 승리를 갖고 왔다. 이것은 1776년에 있었던 미국이 독립선언과 1789년에 프랑스 국회에서 공포한 인권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계몽사상에 의한 18세기의 긍정적 산물이다. 그러나 계몽주의자들 중에는 무신론자 또는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 있어 이들은 교회와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계몽사상이 일어나게 된 근원 중의 하나는 프로테스탄트의 등장과 이에 따른 종교전쟁이다. 16세기까지 그리스도교 세계는 일치, 단결되었으나, 종교개혁으로 그 단일성은 파괴되었다. 이러한 대변동은 신앙에 대한 회의의 원인이 되었다. 더욱이 1550년경부터 1648년 사이에 일어난 비참했던 종교전쟁은 서구인에게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를 불러 일으켰다.
18세기에 이르러 서양에서는 종교가 잔인한 행위의 기원이 되었다는 확신이 고조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에 대한 적개심이 무르익었다. 또한 계몽사상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이 시대의 종교적 관용주의에서 나타나고 있다. 계몽주의자들은 모든 종교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라 보고 있었다.
계몽사상과 교회
이신론의 등장 : 계몽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조는 합리주의 철학이었다. 이 근세의 새로운 사상은 가톨릭 교회에 대해 교회 사상 가장 큰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 철학적 합리주의는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의 이성을 자율적으로 사용하여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과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합리주의가 영국에서는 종교 문제에 적용되어 신의 계시를 무시하는 학설을 내세운 신학적 합리주의와 더불어 종교를 하나의 자연적 현상으로 격하시키는 자연종교의 체계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사조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를 갖고 있으며 신의 계시는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롭다.
이러한 자연종교의 사상은 이신론으로 발전하여 가톨릭 교회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신론의 특성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신은 존하며 인간의 숭배 대상인 동시에 윤리적 의무의 근거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이성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여기서 이신론은 모든 종교문제는 인간 이성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내세움으로써 이성의 역할을 중요시하였고, 그리스도교 진리의 기준은 성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서는 상식선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증명될 수 없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성서 연구는 인간의 윤리적 의무를 찾는 데에 그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이신론자들은 신은 선행을 행하는 이에게 상급을 주고 죄인에게는 벌을 내리기 때문에 회심하여야 한다는 상선벌악에 대한 믿음만이 참된 종교의 본질적 요소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이신론은 종교를 윤리적 행위로 축소시켜 순전히 인간성의 교육 요인으로, 교양의 도구로 간주했다. 따라서 이신론자들은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아 어느 종교든지 모두 좋은 것으로 주장하는 종교적 자유를 내세워 종교의 다양성의 정당화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후에 각 국가가 헌법에 종교적 관용 즉 종교의 자유를 넣는 데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종교적 전통이 없는 미국이 처음으로 헌법에 종교적 관용주의를 적용하였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유럽의 각 국가들도 신앙의 자유를 법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므로 가톨릭교가 국교화되어 있던 국가에서 다른 종교의 신앙도 법으로 승인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교세는 외적으로 그만큼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프리메이슨 비밀결사 : 합리주의적 이신론은 지식층에 가장 많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 사상은 1717년에 영국에서 조직된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단체에 의해서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유럽 지역에서 널리 전파되었다. 이러한 성공적 전파의 이유는 이 운동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 사회정의 등의 계몽주의의 매력적인 정신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은 영국 지방에서는 별로 문제가 없었으나 프랑스에서는 교회와 성직자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조직에 대해서는 정부당국도 호의를 갖지 않았다. 그것은 이 단체가 비밀결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 끌레멘스 12세는 1738년 칙서를 반포하여 가톨릭 신자들이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면 파문을 받으리라는 경고를 내렸다.
교황이 금령을 내린 이유에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교황은 종교의 보편성의 위험을 우려하였다. 왜냐하면 '프리메이슨'의 회원들은 각 종교를 일종의 자연적 덕행으로 알고 여기에 만족하였고 모든 종교를 동등한 바탕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비밀조직은 공공의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의 공동선을 파괴하였다. 아울러 교회는 '프리메이슨'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계몽사상의 긍정적 의미 : 계몽사상이 교회에 부정적 결과만을 초래한 것은 아니다. 교회는 계몽사조로부터 얻은 것도 적지 않다. 교회는 낡아빠진 신심생활이나 의미를 상실한 전통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계몽사상가들의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주위 사회에 신뢰받을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나기 위해서 관습의 폐단과 시대착오적 생활양식을 비판하면서 계몽주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교리교육, 교회의 조직과 운영, 설교방식, 전례생활에 있어 개혁한 사실은 오늘날 인정을 받고 있다. 독일에서도 계몽주의의 정신을 갖고 있던 고위 성직자와 수도회의 장상들은 박학한 인물들이었고 그 직책을 신앙심 깊게 수행한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계몽시대의 사조 속에서 교회생활을 위한 혁신에 큰 공헌을 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대혁명은 계몽주의의 이상적인 관용주의와 합리주의를 외적으로 표현한 사건으로서 유럽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교회에 대해서도 전환점을 이루게 하였다. 1789년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하였다. 이 삼부회는 프랑스의 세 신분 계급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신분은 당시에 전인구의 1퍼센트 미만인 성직 계급으로 귀족출신의 고위 성직자들은 중요한 사회적 지위와 많은 재산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평민출신의 하위 성직자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제 2신분은 귀족계급으로 이들도 특권과 부를 향유하고 있었으나 전 인구의 2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소수의 두 특권 계급에 비해 제3신분은 프랑스 국민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평민들로서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1789년 5월 5일에 삼부회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소집되었을 때에 처음에는 제1계급과 제3계급은 서로 협조하였다. 그런데 회의운영이 투표방식에 대해서 각 신분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제3신분이 6월 23일에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개최하였고, 제1신분의 하급 성직자들은 여기에 동조하였다. 8월 4일과 5일 사이에 있었던 '회생의 밤'에서 일부 자유주의적 귀족과 성직자들은 국민의회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중세의 봉건적 특권을 평민들을 위해서 포기하였고, 의회는 노예제도의 폐지와 함께 "모든 국민은 출생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직책에 취임할 수 있다"고 8월 5일 새벽 2시에 선언함으로써 봉건제도는 단번에 붕괴되고 말았다. 3주일 후인 8월 26일에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을 공포하였다.
교회의 세속화
프랑스 교회 : 프랑스 국민의회의 극단파는 교회재산 문제에 있어서 반교회적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샤를르 모리스 드 딸레랑-빼리고르드 주교가 국가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공채를 지불하는 데에 사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제의를 반대하여 의회에서 퇴장하였다.
이후에 국민의회는 교회를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 휩쓸렸다. 의회는 1790년 2월에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수도단체를 해산시켰고, 4월에는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법이 공포되었다. 7월 14일에는 프랑스 성직자 기본법인 '성직자 공민헌장'이 선포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교구의 수를 줄이고, 성직자는 국가의 봉급을 받으며 교구 주민의 대표로 선출되는 세속 관리로 바뀌어졌다.
이제 프랑스 교회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국가적 기반 위에 새로 조직되어 국가에 예속되는 '국가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조처에 대해 교황이 비난, 항의하자 국민의회는 11월에 모든 성직자들에게 헌장을 지지한다는 선서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전체 성직자들 중에서 3분의 2에 달하는 성직자들이 이 요구를 거부하자 박해가 일어나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투옥 또는 국외 추방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박해는 혁명당국과 국민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회를 주었다. 선량한 많은 국민들이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 편에 몰렸고, 이는 반란과 내란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성직자 공민헌장'은 프랑스 대혁명이 처음으로 저지른 대실책이었다.
1791년 10월에 새 헌법이 공포되고 이에 의해 선출된 입법의회가 개회되었다. 이 입법의회는 1792년 9월에 공포정치 시대가 시작되면서 끝을 맺었다. 이 시대에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뜨를 비롯하여 많은 성직자, 귀족, 의회의원, 대중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공포의 독재 정치가들은 그리스교를 폐지하고 여기에 '이성의 공경'으로 대체하였다.
1799년 11월에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독재정권은 무너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도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지만, 종교를 정치적 요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국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1801년 7월에 교황과 정교조약을 맺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이 신봉하는 종교로서 가톨릭 교회를 수복하기로 확정하였다. 동시에 교회는 몰수된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가 성직자들을 돌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 조약에 비밀히 '77항의 파생 조문'을 첨부하였다. 교황 비오 7세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많은 고초를 당하였고,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그를 황제로 도유(塗油)하였다. 새 황제는 1808년에 바티칸 시를 점령하고, 1812년에 교황을 파리의 퐁덴블로에 감금하고서 바티칸 시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은 패전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독일 교회 :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입한 곳에는 어디서나 사회적 혁명이 수반되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프랑스인의 침입이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교회의 세속화)를 지니고 있다. 1803년 2월에 레겐스부르그에서 독일제국의 대의원들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이 결의문은 22개의 교구와 80개의 제국 수도원과 200여 개의 수도원들의 재산 몰수와 국유화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독일 교회는 물질적 기반을 상실하였고 국가적 뒷받침도 잃고 말았다. 이제 제국 교회의 멸망과 함께 교회는 절망적인 열세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라는 부정적인 면 뒤에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이제 교회는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귀족들의 주교좌 독점과 과대한 성직록이 폐지되었다. 그 외에 중세기 봉건주의의 소산인 고위 성직자와 하급 성직자의 심한 차별 의식이 사라졌고, 가난해진 교회는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을 위한 교회가 19세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독일의 신성 로마제국에 예속되어 있었던 제국 교회가 국가와 분리됨으로써 독일 주교들은 로마 교회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교회의 세속화는 로마 교황에게는 종교적 승리를 가능케 해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단결되었고 국가주의와 국교화 사상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이제 가톨릭 교도들의 공동체 의식이 깨어나 오늘날의 가톨릭 운동의 시초로 볼 수 있는 수많은 조직체가 신설되었다. 수도회가 재건되었고 새로운 수도회가 독일에 도입되었다. 신심의 활성화와 더불어 독일 교회는 사회문제에 개방된 자세를 취하면서 사회봉사와 같은 새로운 사목방법으로 민중을 대하였다. 19세기 독일의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
공의회 개최 배경 : 교황 비오 9세는 1864년 12월 8일에 처음으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21명의 로마 주재 추기경들에게 비밀히 의견을 타진하였다. 이 중에서 2명의 추기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교황의 계획을 찬성하였다. 그런데 찬성하는 추기경 가운데, 여섯 명이 정치적 면에서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걱정을 드러냈고 두 명의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전통적 신앙으로 내려오던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도 정의되어 교회의 공식적 결정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교황은 유럽과 가톨릭 동방 교회의 주교들에게도 공의회 소집의 계획을 알려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러한 반응의 동기는 당시에 교회 안에서 거론되고 있는 학설들이 전통 신앙에 위험한 경계에 달하여 신학적 정리가 필요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1860년 이후에 민족주의적 통일운동의 결과로 신생 이탈리아가 로마시를 제외하고서 교황령을 점령하였고, 교황권의 영향력에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교회는 교황청의 권한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었다.
공의회의 준비 과정 :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교황 비오 9세는 1868년 3월 9일에 추기경들로 구성된 준비위원회를 두어 공의회의 의제를 설정하는 데 착수하였다. 3개월 후인 1868년 6월 29일에 비오 9세는 칙서를 통해서 "1869년 12월 8일에 로마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공고하였다. 아울러 공의회에서 다룰 의제를 다섯 가지 즉 신앙 교리, 교회 규율, 수도회, 외방 선교,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으로 규정하여 각 의제의 초안을 준비하는 분과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열리기도 전에 교회 안에서 의견이 양분되었다. 대다수의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18세기의 갈리아주의의 반교회사상과 프랑스 대혁명의 반동으로 19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교황권의 지상주의를 제창한 '울트라본타니즘'의 영향을 받아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소수의 자유주의파 신학자들과 독일, 오스트리아, 아메리카의 주교들은 이 정의의 선포가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이미 1868년 2월 6일자의 '치빌타카톨리카'라는 예수회의 잡지는 교황의 무류권에 대한 정의와 그 신조화를 요구하는 논문을 실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신학자이며 교회 사가인 될린거는 익명으로 신문에 논문을 기고하여,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권이 정의되는 것에 반대, 역사적 사실(교황 호노리오 1세의 이단 승인)을 들어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유럽 국가의 일부 통치자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의 교리는 중세기적 교회의 국가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여 공의회에서 이 교리를 신조로 규정하는 데서 파생되는 중대 결과를 경고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교황은 1869년 11월 27일에 칙서를 통해 공의회의 일정을 알리고 의제 결정권은 교황에게 속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공의회의 의안을 준비하는 4개 위원회의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물론 교황의 무류권 문제는 공의회의 의제로 선택되지 않았지만 자유주의파들이 위원회의 구성에서 제외됨으로써 이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의회의 진행 과정 : 우선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리위원회에서 합리주의, 유물론, 자연주의, 범신론 등의 오류를 반대하여 초안한 신앙 문제를 심의 개정했다. 교황은 1870년 4월 24일에 계시와 신앙에 관한 교의적인 헌장 '하느님의 아들'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교황의 무류권에 대한 심의가 착수되었다. 무류권을 지지하는 교부들은 4백여 명의 주교들의 서명을 받아, 이 문제를 의제로 선택하도록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교황의 무류권과 수위권 문제는 공의회의 교부들을 양분시켰다. 반대파들은 원칙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이의가 없으나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치열한 찬반 논쟁이 7월 4일에 종결되고 무류권에 대한 교회의 정의가 예비 투표에서 가결되었다. 이 투표 후에 일부 주교들은 교황의 허가를 받고 최종 투표 전에 로마를 떠나 기권하였다. 7월 18일에 있었던 제4차 회기에서 찬성 533표, 반대 2표로 교회에 관한 헌장인 '영원한 목자'가 통과되었다.
이 정의가 선포된 다음 날인 7월 19일에 보불전쟁이 발발하여 신생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을 보호해 주던 프랑스 군대가 철수,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 시를 장악하여 교황은 1870년 10월 20일에 공의회를 연기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다른 안건을 마무리지을 공의회는 끝내 속개되지 못하였다.
공의회의 결과 :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영원한 목자'헌장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의 신조 선포로, 과거의 콘스탄스 공의회의 공의회 우위 사상에서 시작되어 18세기의 갈리아주의자들이 계속 주창하던 국교회 사상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헌장은 20세기 초에 가톨릭 교회 안에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적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현대주의'의 교회 침입을 저지하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결과 외에 공의회는 일련의 불행한 사건을 초래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교황의 무류권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반대하여 교황청과의 정교협약을 파기했다. 독일의 주교들은 대부분 최종투표 전에 로마를 떠나 기권하였지만 무류권에 대한 정의가 선포된 후에 공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였다. 이것은 될린거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파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870년에 본과 뮌헨 대학 신학자들을 위시하여 여러 곳에서 바티칸 공의회를 거부하는 서명 운동과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마침내 이 반대파는 1871년 9월에 뮌휀에서 집회를 갖고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참된 가톨릭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고(古)가톨릭 교회'를 설립하여 전통적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1873년 6월에 브레슬라우 대학의 교회사 교수이며 학창인 라이켄스가 네덜란드 데벤터의 얀센파 이단 주교인 헤르만 하이캄프에게 독일의 첫 주교로 축성되었다. 이로써 고(古)가톨릭 교회의 본 교구가 설정되었다.
이렇게 분리된 교회는 1874년에 비밀 고해, 금육제, 단식제 등을 개혁하고 1878년에 혼인의 불가해소성, 혼인 조당, 전례 축일, 사제의 독신 생활을 철폐하였다. 이 교회는 1054년 이전의 첫 7개의 공의회의 결정을 초기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였고, 반면에 트리엔트 공의회와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이 교회는 1932년에 영국의 성공회와 완전 통합하였다.
도전받는 교회
교황령의 붕괴 :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황이 세속 군주로서 1천여 년 동안 통치하던 교황령(교회 국가)은 그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어 영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1791년 프랑스에 있었던 교황령은 프랑스의 새 공화정부(제1공화국)에 편입되었고 1808년에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교황령을 점령하였다. 이 교황령은 나폴레옹이 패전, 실각한 후에 비인회의에서 수복되었다.
그러나 교황령은 이탈리아의 통일국가를 추구하던 민족주의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당시의 교황 비오 9세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로서 교황령의 정치적 민주화 개혁을 단행하여 민족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848년 말에 민족 진영의 극단파에 의해 교황령의 첫 수상이 의회에서 살해되고 교황은 로마를 떠나 피신하였다. 1849년에 교황은 프랑스 군주의 도움을 받아 민중 봉기를 진압하고 교황령을 되찾은 동시에 그의 자유주의적 태도를 전제적 자세로 바꿨다.
여기서 민족주의자들은 교황 중심의 이탈리아 연방국가 건설이나 교황 체제의 형성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사르디니아의 왕인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 예수회원들은 축출되고 국가혼인 제도가 의무화되는 동시에 교회 법정은 폐쇄되었다. 성직자의 특권이 취소되었고 관상 수도원들도 탄압을 받았다.
피에몬테의 수상인 가밀로 가부르는 1858년 7월 이탈리아의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여 1859년에 롬바르디아를 획득하였다. 교황령을 보호해 주던 오스트리아가 철수하자 여러 곳에서 혁명이 일어나 교황 통치가 끝나고 피에몬테와 사르디니아가 통합,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영웅인 지우제페 가리발디는 반교회적 인물로서 1860년에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하고 같은 해 9월 18일에는 라모리씨에르 장군 휘하의 교황 군대를 굴복시켰다. 마침내 1861년 3월에 이탈리아 왕국이 창설되었고 빅토리오 엠마누엘은 왕이 되었다.
이제 교황령은 대부분 상실되었고 로마만이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교황령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그러나 1870년에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군대가 교황령에서 철수하자 피에몬테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 교황령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바티칸 궁으로 물러난 비오 9세는 침략자들에게 엄중하게 항의하고 파문하였으나 허사였다.
1871년 5월 13일에 이탈리아 왕국의 새 정부는 소위 '보호법'을 공포하여 교황청 문제를 일단락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오 9세는 이 법을 거부하였고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교황은 1874년에 칙서를 통해서 현 정부가 시행하는 선거를 거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조처는 결국 선의의 가톨릭 정치인의 현실 참여를 막아 반교회적 과격파가 정권을 장악케 하였다. 이 문제는 후에 무쏠리니와 교황 비오 11세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독일제국의 문화투쟁 : 1701년에 설립된 프로이센 왕국에서 가톨릭 교회는 활기에 넘친 교회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수상인 비스마르크의 등장과 아울러 프로이센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 그리고 독일제국의 탄생 이후로 교회의 사정은 악화되었다. 특히 보불전쟁의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교황에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의 무장해제에 있어서 프랑스 성직자들의 협조를 촉구하도록 요청하였고,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제국의 건설과정에서 독립주의를 주장하는 바바리아의 가톨릭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반발을 무마하도록 부탁하였으나 교황은 모두 거절하였다. 이것이 신생 독일제국과 교황청이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은 헤겔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반교회적 분위기에 휩싸였고 옛 프로이센 국교의 부활이 시도되었다. 더욱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정의, 선포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국가에 위험한 존재로 오인되거나 압력 단체로 간주될 수 있었다.
한편, 1852년에 프로이센 의회에서 주로 가톨릭 교회 신도로 구성, 결성된 중앙당이 1871년 3월 선거로 독일제국의 의회에서도 주요 세력으로 등장, 제국 안에서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억압 정책을 미리 배제하고자 "종교의 자유가 새 제국 헌법에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서 비스마르크는 반성직자주의의 성격을 띤 국민자유당과 프로이센의 종교교육상인 아달베르트 팔크의 지지를 얻고 중앙당과 투쟁하고자 하였다.
독일제국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1873년에 루돌프 위르코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