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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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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과학과 창조 신학” 




1. 창조, 모든 것의 출발 

  모든 성경의 말씀은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딤후 3:6).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받은 계시의 책이다. 이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소개한다(계 10:6). 창세기 전반부(1-3장)는 창조주 하나님이 스스로 밝히는 창조에 대한 자기 선포이다. 창조의 하나님은 성경의 첫 말을 ‘태초’(bereshith)라는 말로 시작한다. 세상은 시간 안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다. 즉 창조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다. 하나님이 바로 시간의 주관자요 창조자였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시간의 주관자이므로 하나님 이외 피조세계의 미래를 정확히 내다볼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함부로 단정적 어조로 미래와 종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사 47: 12-14). 물질과 시간은 창조된 것이므로 세상은 우리 사람의 육체처럼 유한하며 끝을 가진다(계 20:11). 이방의 종교 사상들이 우주와 세계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는 순환적 시간관(circular view of time)을 가진데 비해, 기독교가 직선적 시간관(linear view of time)을 가지는 이유이다. 이 특징을 가장 먼저 찾아낸 사람은 신학자 어거스틴(St. Aurelius Augustinus, 354-430)이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이 두 가지 시간관을 구분한다. 시간을 보는 관점이 시간의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은 전혀 다름을 알아야 한다(벧후 3:8). 공간과 물질은 이렇게 시간 속에서 비로소 삼위일체적 완성된 세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세상은 시작되었다. 


2. 창조 신앙으로 본 과학 

2.1. 설교자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 
  라틴어 「Scientia」는 사람의 지식을 말한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Science」라는 단어가 유래하였다. 19세기 말 이 말을 일본 사람들이 ‘과학’(科學)이라고 번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과학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지식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지식 체계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종교의 지식체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성경이든 과학적 데이터든 모두 해석을 통해 산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오늘의 상황(context) 아래서 이 둘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독교와 과학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담을 쌓아온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창조에 대한 설교는 성경과 과학을 단순히 융합하는 작업은 아니다. 신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설교자는 창조에 대한 설교를 위해 성경 본문의 지평이 과학적 데이터를 참조하여 해석자 지평을 “변혁”(transformation) 시켜야하는 고도의 작업임을 명심해야 한다. 

2.2. 창조 질서를 다루는 하등학문으로서의 과학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기술되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두 권의 책(말씀의 책인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인 자연)이 늘 불필요한 긴장을 유지하여 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서를 통해 계시하고자 했다면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당연히 성서는 권위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오류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분이시기는 하나 창조주 하나님 스스로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비록 성경이 과학의 언어로 서술 되지는 않았으나 과학의 이름으로 탐색하는 일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즉 과학은 창조의 질서를 탐구하는 하등학문인 것이다. 

2.3. 성경, 과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일정한 영역의 경우 분명 과학적 검토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문제는 성서해석에 있어 과학적 해석이 필요한가와 더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성경은 창조의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성경은 우주가 시작될 때 시간(태초)이 창조되었음을 선포하고, 우주의 연대 문제는 과학적으로도 관심 사항이므로 과학적 논증의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 과학이 아무리 성경과 다른 언어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책인 자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밝힌 것처럼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성경을 탐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1509-1564)도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이 부분을 분명히 한다. 칼빈은 당시 천문학 체계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모세는 천문학적 내용을 기술하는 데 있어 통속적으로 글을 썼고 상식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언어로 기록한 반면, 천문학자들은 전문가들로, 인간의 두뇌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도의 언어로 기술하였다’고 보았다. 이 같은 칼빈의 해석 방법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가 누구에게든지 이해할 수 있게 묘사되었다는 종교 개혁 이론에 기초한다. 성령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공통된 학교를 개설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주제를 다룬다. 모세는 교육받은 자의 교사만은 아니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교사였다. 따라서 "모세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 평범한 언어를 채택했다. 그렇다면 성경은 보통사람들을 위한 책이므로 천문학 및 다른 어려운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시편 주석에서도 칼빈은 성경의 저자들이 과학적 사건에 대해 감각이 느끼는 대로 묘사했지 과학적 용어로 묘사하려 하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성령께서는 천문학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가장 단순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교훈을 내리기 위해 성령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아무도 그 말씀이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셨다.” 예를 들어 사반과 토끼는 일반적으로 되새김 동물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 사반을 되새김질 동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무조건 과학적 논리로 풀려고 하면 오히려 성경을 미련한 책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적 논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금 새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해석자는 자기 스스로 사반은 되새김 동물이 아니라는 과학적 해석을 전제하고 과학의 언어로 성경을 보지 말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이 해석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이 말하는 되새김의 범위를 훗날 생물학자들이 만든 분류학(taxonomy)의 틀에 갖다 넣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박쥐를 새라고 표현한다고 박쥐는 분명 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도 동일한 오류라 볼 수 있다. 
  멸종된 생명이나 검증 불가능한 동물에 대해서도 창조론과 무신론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성경에 나타난 리워야단이나 탄닌, 라합, 비히못 등을 공룡이나 어룡 등 과거에 멸종해버린 자연적 동물로 보느냐(the naturalistic perspective) 아니면 신화적인 동물로 보느냐(he mythological perspective) 상징적인 존재로 보느냐(the emblematic perspective)에 따라 해석 전반에 대한 다양한 단면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역사적 동물이냐 상상 동물이냐 아니면 역사적 동물이기는 하나 멸종된 이후 그 이미지가 변색되어 온 것인가 그런 부분들이 해석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관점이 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가 하는 사실이 중요할 수 있다. 즉 과학적 해석 자체가 성경의 권위 내지는 무오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같은 해석의 다양성을 통해 먼저 계시로서의 성경과 세속적 신화 사이에 어떤 충돌과 연속성이 있었는지를 배우고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과학과 관련된 이러한 성서 해석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 논쟁, UFO와 외계생명체 논쟁, 생명공학 논쟁, 의약 분쟁, 생명의료윤리 등등 여러 이슈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들 주제들을 판단해야 하는 당위성을 깨닫게 된다. 즉 여러 부분에서 과학을 도구로 한 성경적, 신학적 해석의 중요성이 금 새 드러나게 된다. 과학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영역은 이밖에도 다양하다. 그 중 하나는 생태적 환경과 관련한 과거의 역사를 탐색하는 부분과 특별히 초과학의 영역이랄 수 있는 태초의 창조를 수용하는 데 있어 과학의 역할은 중요하다. 진화론에서는 제임스 허튼 이래로 동일과정적인 지질학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성경은 대격변론적인 홍수의 역사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하고 구분해야 하는 가하는 점 등이 바로 성서의 일반 계시 영역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당위성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첨단 과학 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 과거 해석자들보다 훨씬 풍부한 이해의 범위와 경험을 가지고 텍스트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신학자 슐라이엘 마허가 말한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최소의 공통 분모라 할 수 있는 선이해(preunderstanding)가 넓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즉 계시의 점진성 아래에서 과학적 자료들은 성경 해석에 일부분 공헌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세속의 과학적 성과에 대해서도 부단히 관심을 기울이며 바른 성경적 설교에 적용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2.4. 과학적 방법과 성서 
  과학의 일반적인 방법은 먼저 관찰의 대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관측하여 자료를 분석하고 필요하면 실험한다. 시간과 상황과 조건을 달리하여 어떤 조건 아래에서도 실험의 결과가 동일하게 나타나면 비로소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여기서 일반적 과학적 방법이란 
성서적 해석에 많은 제한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창조의 사실에 대해 관측하고 실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의 한계가 과학적 설명 즉 성경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필요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성경 해석처럼 과학적 방법 자체가 가진 논리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비록 창조를 관찰한 사람이나 창세기 대홍수 사건을 재현(再現) 하거나 직접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과학적 해석은 가능한 것이다. 
  과학적 해석의 유용성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은 과학적 방법의 틀 안에서 성서 해석의 한계를 가진다. 과학 자체의 한계가 있다. 기원에 대한 과학적 입증 자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성서가 말하듯 믿음의 영역으로 남는다. 창조와 진화도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결정적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에 있어 과학은 분명 이렇게 제한적이다. 기독교는 과학의 영역이 “영원히 자연에 순종하는 과학”이 아니라 때로는 창조주인 신이 직접 개입하여 그 질서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기에 더욱 그러하다. 

2.5. 과학과 성경 기적(奇蹟)의 문제 
  기적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면 다양하다.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의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18세기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은 기적은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The Natural History of Religion)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자 복음주의 신학자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존재할 수 없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즉 기적은 과학적 설명은 가능하나 과학의 잣대 안에 통제 받아야 되는 대상이 아니다. 설교자들도 디지털 시대에 세뇌되어 과학을 마치 절대선, 절대군주처럼 여기며 설교하는 누(累)를 범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성도들은 과학에 묶인 설교보다 과학을 초월한 전능자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창조과학과 창조신학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은 오늘날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린 단어이다. 이 어원의 출발점은 헨리 모리스(1918-2006)로부터 기인한다.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도 창조과학과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본래 창조과학은 헨리 모리스의 독창적 사상이 아니었다. 모리스는 자신이 창조론에 눈을 뜬 계기가 안식교 신자였던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 1870-1963) 때문이었다고 그에게 공을 돌리고 있다. 
  과학적 창조론은 창세기 자체를 세계가 어떻게 물리적으로 창조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하나의 전제적 사실로 주장한다. 창조과학에 있어 신은 창조의 첫 순간에 개별적인 유기체들의 종류, 즉 모든 종(種)을 고정(fixity of kinds)시켜 놓았으며, 종들은 진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서의 진리는 지질학적 사실들과 생물학적 사실들과 충돌하지 않는다. 과학적 창조론의 이론은 주로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설립을 주도한 헨리 모리스(H. Morris)와 듀안 기쉬(D. Gish)로부터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과학이 구체적으로 주장하는 신념의 내용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맥리안과 미국 아칸소 교육위원회 간의 소송 사건(Mclean v. arkansas Board of Education)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 적이 있다. 첫째, 세계는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되었다. 둘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 셋째 현존하는 종들은 고정(fixity of kinds)되어 있으며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대진화, Macroevolution)은 불가능하다. 넷째, 원숭이와 인간의 조상은 다르다. 다섯째, 지질학적 형성은 대격변(catastrophy, 즉 Genesis Flood)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산에서 바다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은 대홍수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구의 창조는 젊다. 즉 6000년 내지 1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 창조과학의 이 같은 입장은 창조과학이 신학의 변증학보다는 험증학 영역에 좀 더 가까움을 보여준다.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과 험증학(Christian Evidences, 驗證學)은 구분 없이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하나 용어가 다른 만큼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 辨證學)은 비기독교철학에 대응하는 기독교 철학의 증명을 말한다. 즉 변증학의 목표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 함으로써 기독교의 유신론(theism)을 논증하는 데 있다. 따라서 변증학의 영역은 어떤 한 부분(예를 들면 과학적 변증)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라고 보면 된다. 기독교 유신론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으로 이어지는 전우주적 하나의 통일체 적이므로 변증학은 매우 포괄적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변증학은 모든 신학의 공동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변증과 교리(敎理)는 상호 협조적인 관계를 가진 다고 볼 수 있다. 즉 변증학과 신학은 서로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 험증학은 기독교의 사실성에 관심을 가지는 학문을 말한다. 좁게 말하면 기독교 변증학에서 그 존재를 논증한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푸시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의 타당성과 참 됨을 변증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버나드 램(Bernard Ramm)은 험증학이 철학적이며 이론적이라기보다 과학적이며 역사적인 영역에서 기독교의 사실성의 증명에 관심을 가지는 학문이라 했다. 기독교의 전제론적(presuppositional) 변증학자인 코넬리우스 반 틸(Conelius Van Til)도 험증학을 과학(광범위한 의미의 과학을 말함, 즉 학문에 가까운 말)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유신론을 변호하는 학문이라 정의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변증학은 특히 기독교 신론의 지위를 확보하기를 목적하고 험증학은 주로 기독교의 경험 사실에 관한 정해(正解)를 유지하기에 노력한다. 따라서 전자는 사실보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후자는 철학보다 사실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된다.”(『험증학』, 박형룡 저작 선집 Ⅻ,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8, 23)라고 하였다. 이것은 반 틸(Conelius Van Til)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이단과 무신론자들과 안티 기독교인들의 점점 더 노골화 되어가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 변증적, 험증적 설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당연하다. 창조과학이 보다 더 과학적 험증에 가까운 반면 창조신학은 바로 창조에 대한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기독교 변증의 학문이라 할 수 있겠다. 


4. 창조,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설교에의 적용) 

  창조 교리는 성경에서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중요한 신학적 진술이므로 창조와 구속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구속주 하나님이심으로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교회가 중요한 공동 선언인 니케아 신경과 사도 신경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창조 교리는 발전하지 않고 구속 교리만 발전해 온 감이 있다. 그것은 20 세기 들어 구약신학과 교의신학 양편에서 영향력 있는 두 신학자인 구약신학자 폰 라드(Gerhard von Rad, 1901-1971)와 교의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주도한 구속 신학의 번영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볼 때 창조 세상(자연)은 늘 구속 은총 앞에 무기력하거나 구속에 종속될 뿐이었다. 이들이 우려했던 것은 창조신학이 구속신학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을까하는 불필요한 노파심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창조와 생명이 전제되지 않고 중심이 되지 않는 구속 신학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창조교리를 구속교리에 종속 시키려한 폰 라드에 반대한 구약학자 슈미트(Hans Heinrich Schmid)가 말하듯 “창조교리는 주변적인 것이 아니고 명백하게 근본적인 문제이며 모든 신학은 특별히 창조를 말하지 않아도 창조신학”이다. 사실 창조를 무시하고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주의 시작이 창조요 인간의 시작도 창조요 천국도 새 하늘과 새 땅, 곧 재창조의 장소이다. 창조를 떠나서는 구속을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신학적 전제를 <복음을 위한 창조신학>이라고 표현하려 한다. 설교자들은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의 이 같은 관계를 바르게 지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설교를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려고 한다. 

  첫째 성경적, 복음적 창조 신앙을 설교해야 한다. 창조를 믿는 종교는 많다. 설교자는 이신론(理神論), 만유내재신론(萬有內在神論), 유출설(流出說), 범신론(汎神論), 영지주의 창조론 등이 왜 바르지 못한 기원론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바른 복음적, 성경적 창조 신앙(기독교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성경 창세기 전반부(1-12장)에 계시되어 있는 최소한 다음의 21가지 기원에 대해 명료하게 설교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은 먼저 우주와 생명의 근본(기독교 세계관의 창조)와 관련하여 (1) 우주의 근본(물질과 공간과 시간의 기원), (2) 빛의 기원, (3) 물의 기원, (4) 천체(해, 달, 별)의 기원, (5) 식물의 기원, (6) 동물(새, 물고기, 육상동물)의 기원을 설명한다. 둘째, 인류(기독교 세계관의 타락)과 관련하여 (7) 안식의 기원, (8) 인류의 기원, (9) 죄의 기원, (10) 노동의 기원, (11) 죽음의 기원, (12) 남녀의 기원, (13) 결혼의 기원, (14) 가정의 기원, (15) 살인의 기원, (16) 문명의 기원, (17) 각 종족의 기원, (18) 국가 제도의 기원, (19) 언어의 기원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구원(기독교 세계관의 구속)과 관련하여 (20) 히브리 민족의 기원과 (21) 예수를 통한 구속에 대한 약속의 시작을 보여 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차별되는 초월 종교요 진리로서의 21가지 기원 계시(창조 신앙)에 대해 설교자는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더불어 성경은 이를 통해 다음의 사실들을 우리 인류에게 계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설교해야 한다. (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시며 영원하시며 인간과 달리 어느 것에도 의존하는 분이 아니다. (2) 하나님도 인격을 가지셨고 인간과 인격적 교제를 원하신다(1:26-2:25). (3) 하나님은 세상 창조를 기뻐하셨고 인간 창조를 무척 기뻐하셨다. (4)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범죄한 인간을 반드시 심판하신다(3:8-24), 6:5-8= 대홍수 심판 경고, 11:1-9= 바벨탑 사건, 18: 16-19:29= 소돔과 고모라 심판). (5) 하나님은 자비 하시다(3:21=가죽 옷 입히신 사건, 4:15= 살인자 가인 보호, 6:8= 노아에게 베푸신 은혜, 18:32= 10인의 의인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심판 치 않으시겠다는 아브라함과의 약속 대화). (6) 하나님은 권능이 무한하시다(18:14=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 이삭의 약속, 26:12-16= 이삭에게 백배의 농사 소출의 은혜를 베푸심, 50:20= 요셉을 구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권능의 하나님 등). 

  둘째 창조 신앙을 설명함에 있어 설교자는 창조와 구속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되지 않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잘 구분해서 설교해야 한다. 창조 신앙에 담긴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여 비본질적인 것을 구원의 본질처럼 설명하려들거나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을 외삽(外揷)하여 단정 짓는 성급함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를 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은 기독교의 근본(본질)이다. 하지만 외계인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가, 창조의 연대는 언제였는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인가 사람인가 등등의 경우에는 아직 성경과 신학과 과학이 모두 동원이 되어도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종말의 때와 시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바 아니요”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때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일부 증거들에 대해 여전히 여백을 남겨놓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궁금하기는 하나 이런 것들이 신앙의 궁극적 문제는 아니다. 성경에도 없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섣부른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성경이 범상치 않은 계시의 문서임을 인지하고 회중들이 더욱 기도와 성경과 신앙의 신비에 대해 도전하고 분발하는 계기로 유도하는 것이 옳다. 

  셋째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자연주의의 문제점을 설교해야 한다. 기원에 대한 무신론적 자연주의는 반드시 그 종착역이 무신론적 유물론과 우연주의, 자연주의 진화론 등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설교자로 알려진 고(故)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복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복음주의는 과학에 있어 자연주의 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끔 성경의 진술이 몇 가지 과학적 발견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 과학보다 성경의 진술이 참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달리 과학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과학은 늘 가변적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 1902-1994)가 말한 대로 과학은 반증(反證) 가능해야 과학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창조”와 관련하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 가운데 겸손하게 설교해야 한다(벧전 3:15-16). 피조물인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세상에 대해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창조 신앙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공격적으로나 논쟁하듯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특별 은총(구속)과 자연 은총(과학) 앞에서 여전히 허물투성이의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도 언젠가 거울을 마주 보듯 깨달을 수 있는 그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엄’(Magnalia Dei)을 담대히 선포하라! 

-목회와 신학 2014. 1. 별책부록(그 말씀 주제별 설교 시리즈-창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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