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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랍비, 신부, 목사 이 세 사람이 모여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방법을 정하기로 논의 했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의 헌금을 드릴 것인가에 대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먼저 신부가 말했습니다. ‘먼저 땅 바닥에 선을 긋고 내가 가진 돈 전부를 공중으로 던져 선의 오른쪽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드리고, 왼쪽은 내 것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군요.’ ‘나는 땅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동그라미 안 쪽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 것, 바깥쪽은 내 것으로 정하겠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무슨 소립니까, 하나님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다 바쳐야 합니다.’ ‘나는 모든 돈을 공중으로 던지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공중에 머물게 되는 돈은 하나님 것이고 땅에 떨어진 것은 내 것으로 하겠습니다.’ 우스운 얘기죠. 교회에서 찬양을 하다보면 찬양을 드릴 때 문제되는 요인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손을 높이 들 수가 없다. 나는 율동을 따라하라는 것은 제일 싫다. 찬양하면서 옆 사람하고 인사를 하라던가 손을 잡으라고 하라는 것 그 자체가 싫다. 이 외에도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이 몇 개 더 있습니다. 아주 어색할 수 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정서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국인의 습성에 상반될 것이라는 판단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힘들어하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내 기준, 내 판단으로 찬양을 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내 영혼이 자유롭다면 어떤 영적인 표현도 주저하지 않을 것을, 찬양을 하면서 의식하는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움츠려들고, 찬양이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게 되고, 옆 사람 때문에 어색해 하면서 찬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가다 교회 집회를 하면서 찬양예배를 드리게 되면 일어서서 자유롭게 찬양하는 젊은이들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따라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 주신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혹 식구들이 모여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손자 손녀들이 재롱을 떱니다. 온갖 애교 섞은 콧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온 식구가 즐거워하며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4,5살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온갖 고민을 쌓아 안은 듯 심각하게 표정을 짓고 있다면, 할아버지, 할머니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나는 땅바닥에 선을 그어 놓고, “하나님 저기 좁은 곳에 떨어지면 다 하나님 뜻대로 하시고, 이곳에 떨어지면 내 맘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맛보길 원하는데, 나는 내 자유의 한계선을 그어 놓고 넘어가지 않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찬양을 부르면서 내 입맛에 맞는 곡들만 골라 부르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유 자유 나는 자유 하리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내 마음에 기쁨과 감사, 찬양의 자유가 없다면 아주 심각한 중병에 걸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는 입술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 축복을 누리고 안 누리고는 내가 결심해야 합니다. 내 속에 진정한 자유가 없다면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마음을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부른 찬송은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유, 성령님이 함께 동행 하는 자유를 맛볼 때 비로소 진정한 찬양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뜨겁게 찬양함으로써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음을 보여드리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과 육신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최고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
칼럼
자유 없는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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