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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는 아주 냉철한 사고를 가지고 있던 임마누엘 칸드는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여인으로부터 청혼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미적 거리자 답답해하던 여인은 분명하게 말해 달라고 다그칩니다. 칸트는 생각을 해 보겠다면서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책들을 모조리 모아 결혼에 대한 찬성, 반대 의견들을 연구하며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분석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여인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 ‘내가 당신의 딸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여보게... 너무 늦었네, 내 딸은 벌써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은 엄마가 되었네..’라는 대답을 들었답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사랑은 철학적 이론이나 과학적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시작해서 내 마음에 담긴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것을 이론적으로나 우리의 사고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게 될 때 능력이 되며 사람을 감동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이 세상을 논리로 다스렸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고사하고, 이율배반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단칼에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는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보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사랑 그 자체 인 것입니다. 목사님이 자녀를 잘 키우는 집사님 집에 심방을 가서 자녀 3명 중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막내가 병들었을 때 막내를 가장 사랑했고, 둘째가 집을 떠나 방황했을 때 그 때는 둘째를 가장 사랑했으며 큰 아이가 학교성적과 이성문제로 괴로워할 때 그때는 큰 아이를 가장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사자는 새끼가 병들면 병든 새끼를 절벽에 던져버립니다. 독수리는 상처 입은 새끼를 둥지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부모는 자녀가 고통당할 때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십 차원 더 높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고, 고통 속에 울부짖을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초기에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기 위해 나온 책 ‘진실한 담화’(TrueDiscourse/2세기의 사상가 쎌서스-Celsus-가 씀)라는 책은 초창기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기 위해 나온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들은 논리와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사도 나누기 전에 사랑한다 하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한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이 비평이 맞지만 그러나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이 얼마큼 깊이 있는 사랑을 생활화하고 있었는지 증명해 주는 글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경제적 상황, 사상적 배경, 사회적 지위, 인종과 민족을 알아보고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인사도 나누기 전에 사랑하고, 알기도 전에 사랑한다."는 초대교회의 신자들의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전하는 사랑을 한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않았기에 죽을 죄인을 위해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 처럼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도 이 계절에 실천했으면 합니다. |
칼럼
상식밖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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