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설교 자료를 수집하여 모았습니다.
필요한 부분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제목 : 설교를 흥미로 채우는 법 본문 :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불행을 느끼고 있다. 가정이 이상적이지 못할 수
도 있다. 또는 경제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 과중한 일에 억눌려 있을
수도 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메뉴에
대한 식욕을 억누른다. 설교자로서 내가 할 일은 복음의 향기로 근심 걱정으로 여윈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할 때 끊임없이, '사람들이 내게 기울이는 미약한 주의를 어떻
게 유지하고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주의를 오래 끌지 못한다. 주일에 교회 휴게실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듣고 있다 보면, 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빨리 거룩한 예배로부터 미식축구나
야구 또는 돈 벌이와 정치 문제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가는가를 보고 놀라게 된다.
따라서 나의 한 주동안의 주요한 책임 중 한가지는 설교를 가지고 그들의 주의를 끄
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적절성을 알아 보기 위해서 내 설교 자료로 하여금 "그래서요?" 테스
트("So what?" test for relevance)를 거치게 한다. 성경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성
경은 적절하다. 그러나 나는 설교를 성경만큼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람들이 떠나면서, "그래서요?"가 아니라 "알았습
니다"라고 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하는 방법이 지성과 감정과 의지
에 설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성에 설교하라
신학은 지성에 도전한다. 나는 많지 않은 사람들만이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마도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 그들이 자기들의 삶의
배후에 있는 세계관-삶의 철학-을 살펴보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설교할 때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자 한다.
나는 나의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넓혀 주고자 애쓴다. 나는 사도신경 시
리즈 설교를 하는 중에, "천지를 만드신"이라는 문구에 대해 설교했을 때 그렇게 했
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를, 경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법칙에 따라 작
용하는 폐쇄 체계(a closed system)로 본다. 그렇다면 "천지를 지으신"이라는 표현이
어디에 맞는다는 말인가? 유물론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
기 때문에, 나는 폐쇄 체계에 대한 대안을 조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발견
했다. 나는 자연 과학과 이론 물리학을 건전한 신학과 연결시킨 좋은 설교를 가지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지성에 접근하는 것은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성을 사로잡으려고 애썼다 나는 그들의 생각과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 그들이 복음
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씨름했다.
의지에 설교하라
의지에 설교할 때,나는 반응을 기대한다. 나는 사람들이 설교된 바에 기초해 행동
하기를 원한다 목사인 나는 부흥회 설교자보다 더 점잖고, 덜 요구적이 되기가 쉽다.
여러 해 동안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에 모든 것을 얻거나
잃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대개 어떤 굉장히 큰 조치보다는 방향이 올바른 작
은 운동을 기대한다.사람들의 의지란 자연히 움직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작더라
도 방향이 올바른 운동을 격려하는 말씀과 예화를 선택하려 애쓴다. 나는 의도적으
로 격려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대개 사람들은 "도전"보다는 격려에 더 잘 반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야단치는 것 보다는 자극과 격려를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사람들에게 감당할 만한 말씀을 제공하려고 애쓴다.
의지는 교활한 피조물이다. 의지는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도전을 받을 필요가 있
다. 의지에 설교하는 데 있어서의 비결은 어떤 종류의 자극이 여러분의 설교 대상들
에게 가장 빠른 효과를 나타내느냐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감정에 설교하라
얼마 전에, 나는 거부 당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고 있었다. 그렇게 친숙한 주
제는 설교를 듣는 사람을 졸게 만들기 쉬운 주제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흥미를
추가할 수 있었을까? 감정이다.
나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전후(戰後)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는 처칠의 팬이다. 그래서 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그의 엄청난 영향력을 회상
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딱딱 소리를 내는 라디오에서 그의 유명한 연설에 귀를 기
울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
을 것입니다!" 폭탄이 떨어지고, 대공화포 소리가 들리고, 밤하늘을 가로 질러 비취
는 서취라이트의 섬광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불독 같은 결단은 우리가 그 끔찍스러
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칠은 전쟁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
었을 때, 놀랍게도 처칠은 낙선했다. 처칠이 행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람
들은 그를 수상으로 선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아주 조
용한 목소리로, "그는 거부당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동안, 그들은 거부가 의미
하는 바를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끌었다. 처칠이 거부된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들의 감정을 예수 그
리스도께서 거부당하신 사실로 옮기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혹자는 우리가 지성을 희생하여 감정에 호소할 수도 있다고 정당한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로서는 사람들의 감정을
교묘히 이용하기보다는 그 감정을 잊어버리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순전히 지적인
문제는 지나치게 무미건조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생명을 더해 준다. 감정은 사람
들을 반응으로 인도한다. 사람들은 감정과 일체가 된다.
유머는 감정을 유도하기 때문에 내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유머
는 놀라운 종이나 무서운 폭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필립 브룩스의 설교에 대
한 정의 -설교는 인격을 통해 전달되는 진리이다 -가 옳다면, 나는 유머를 통해서
진리를 전달해야 마땅하다. 내가 유머를 즐기기 때문이다.
유머는 또한 설교 중에 정신적인 휴식을 제공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따금씩 휴
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유머는 설교의 매력을 더하는 방식으로 휴식을 제공한다.
잠깐 동안의 웃음이 지나간 후에, 사람들은 더 큰 만족을 얻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또는 어떤 것-커다란 기침 소리 같은-이 설교의 분위기를 어지럽힐 때, 훌륭한 유머
가 담긴 말대꾸가 사람들의 주의를 설교자에게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설교자가 되라
설교할 성경 본문이 내가 일생 동안 다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나는
설교를 다 했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설교의 무미건조
한 부분들을 공략한다. 한 동안 시리즈 설교를 해 온 경우에,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
각한다. '가만 있어봐. 이건 정말 무미 건조하군. 여기서 빨리 벗어나서 피해를 최소
로 줄이자!'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성경적인 자료와 씨름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잠재의식 속에서 재미없는 것으로 무시해 온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주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지
루하게 만들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독특한 각도를 발견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 나는 본문의 호기심을 일으키는 측면을 발견할 때, 내가
할 말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해가
가면 갈수록 내 설교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내 생각을 재미있게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든 설교자에게 있어서 끝이 없는 과업이다.
아이디어들이 나를 자극해 준다. 나는 김이 빠지기 시작할 때 사람들과 대화하기
를 좋아한다. 대화는 사람들과 삶과 신앙에 관해서 계속 흥분하게 해 준다. 또한 대
화는 설교에 흥미를 더하는 방법들을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대화가 나를 세상 풍조
에 밝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주일 저녁에 열두어 명 되는 사람들을 우리 집에 초청해 커
피와 디저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한다. 나는 단지 사람들을 불러 그들의 흥
미를 끄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할 뿐이다. 나는 그들이 어디 출신이고, 무엇
이 그들의 흥취를 자극하고, 그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 는가를 듣는 것을 좋아한
다.
그런 대화들은 종종 서로의 이해를 풍성하게 해 준다. 언젠가 판사와 의료 윤리학
교수가 함께 자리에 앉았을 때, 대화 내용이 낙태로 바뀌었다. 그 교수는 밀워키의
낙태 병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행했다. 그는 의료 윤리에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판사는 가족들의 복지를 다룬 오랜 경험을 근거로 그 대화
에 개입했다. 이어지는 대화는 우리 모두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게 재미 있었던 것이 언제나 내 회중을 즐겁게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
의 음악적 취향이 회중의 취향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비록 내가 유럽 역사에 큰 관
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별로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에 덧붙여, 나는 전형적인 남성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반면에, 나의 교구민들
대부분은 당연히 여자들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취향과 관심사가 기준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나는 단
지 나와 꼭 같지 않은 사람들을 흥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또는 항상 눈을 열어두어야 한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 「글래머 (glamour)」나
「미즈(Ms)」같은 잡지를 후딱 넘겨보곤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때때로 나는 설득
력 있게 잘 쓴 기사들이 세속적인 사고를 들여다 보는 창문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다. 나는 종종 노트를 한다. 나는 흥미 있는 자료를 접촉함을 통해서 세속적인 생각
을 접하고 세상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내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예화들을 산출해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에 관심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동의할 필요가 없다. 전부를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
에게 재미있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
아야 하는 것이다.
("현대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중에서)
======================================================================================== 제목 : 설교의 커뮤니케이션 본문 :
어렸을 때 시장에 가면 말을 아주 잘하는 연사가 있었다. 그 사람은 동네 할머니들을 모아 놓고 춘향전 이야기를 하는데 할머니들은 그 연사의 말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설교하는데 가장 어려운 대상은 역시 어린이들일 것이다. 우선 어린이들은 어려운 말은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오래 참고 앉아 있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린이들에게 감동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상당한 말재간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설교자의 자질 중에 말재간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말재간이 좋은 사람은 설교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유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재간은 설교자에게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용은 없는 상태에서 말재간에만 의지할 때 진실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 중에서 어떤 후보가 너무 과장된 표현을 많이 한다고 해서 지지율이 깎인 적이 있었다.
스펼젼 목사 시대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가슴둘레가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마이크가 없는 상태에서 수백명 혹은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설교를 해야 했기 때문에 성량이 어느 정도 이상 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목사의 영성이 뛰어나고 설교가 좋다 하더라도 목소리가 적어서 전달이 되지 않으면 아무래도 설교자로서 부적합했던 것이다.
설교를 하거나 듣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즉 설교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신 말씀이라는 믿음이 필요하고, 듣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인간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인 중에서 설교자의 인격에 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한다고 해도 감동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와 교인들 사이에 친근 관계(rapport)가 형성되었을 때 그렇지 못할 때 보다 훨씬 높은 설교의 전달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설교의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
커뮤니케이션은 세 가지 요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즉 말하는 사람과 전달 매개체와 그리고 듣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설교의 경우에는 설교자와 설교 그리고 교인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설교에서 중요한 것이 기독교의 설교는 거의 예배의 형식을 통하여 전달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설교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현상이다. 물론 예배의 형식 없이 그냥 강의실에서 전혀 예비적인 절차가 없이, 예를 들어서 찬송이나 기도 등, 바로 성경 강해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되고 거의 대부분은 예배의 형식을 통하여 설교를 듣게 된다. 그 이유는 기독교에는 설교를 단순한 메시지의 전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알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날 때에는 모든 절차와 예절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왕을 알현할 때에는 아무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을 두고 말한다. 그러니까 반드시 예배 가운데서 설교를 듣는 것이 옳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서 설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설교자에게 최고의 권위가 주어진 셈이다. 그는 이 강점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교인들에게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요즘은 교회의 구조면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종래에는 강대상이 교회 전면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강대상은 한 쪽 옆으로 비켜나고 가운데를 무대처럼 만들어, 나와서 찬송도 할 수 있고 율동도 할 수 있도록, 참여를 강조하는 형식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과거의 구조가 일방으로 설교를 조용히 듣고 아무 말 없이 복종하는 스타일이라면 요즘은 자신을 예배 가운데 표현하고 교인들이 예배에 직접 참여하는 형식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멀티비전까지 설치하여 예배에 시각적인 효과까지 높이는 방식으로 나가고 있다.
한번은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교인들이 나는 보지 않고 전부 옆의 벽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쪽 벽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거기에 설교자의 얼굴이 비취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육성으로 크게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감동을 받았지만 이제는 육성으로 크게 설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설교가 마이크를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의 준비이고 준비된 설교자이다. 필립 부룩스가‘설교는 설교자의 인격을 관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을 했을 때 설교자의 인격과 설교자의 준비가 설교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보스톤 시내에 가보면 필립 부룩스가 설교를 했던 성공회 예배당이 있다. 그 벽면에는 사도들의 상의 세워져 있는데 그 끝에는 그 교회 설교자였던 필립 부룩스의 상도 세워져 있다. 그것을 보면 그 교인들이 설교자로서의 필립 부룩스를 얼마나 존경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설교자의 준비는 두 가지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하나는 한 평생에 걸쳐서 설교자 자신의 인격과 영성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면 설교자 자신의 인격이 깨끗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만일 자기 자신이 죄에 빠져 있다면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하면서 자기 자신의 양심이 괴로울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기름이 흐른다 하더라도 관이 녹이 슬거나 구멍이 나 있다면 기름이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설교자의 인격에 흠이 있으면 그 아무리 좋은 설교라 하더라도 제대로 전달될 수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설교의 한 편 한 편을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인격이 훌륭한 목사라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준비된 말씀이 없다면 그는 그 아까운 시간을 횡설수설하면서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모스는 말하기를‘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치 않겠느냐’(암 3:8)고 외쳤다. 다시 말해서, 설교가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의 부담을 느끼게 되어 있다. 그러나 준비된 설교가 없는 사람은 설교 시간이 돌아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2. 설교의 좋은 전달을 위하여 기억해야 할 것
아무리 좋은 설교라도 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거나 감동이 되지 않으면 설교의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 설교는 간단 명료한가?
복잡한 설교는 교인들이 알아듣기 어렵다. 그러니까 설교 전체의 내용이 설교자의 머리 속에 정리 될 수 있어야 하고 이번 설교에서 어떤 내용을 설교할 것인지가 설교하기 전에 설교자의 머리에 명확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할 때 설교 원고에 너무 의존해서 한 자 한 자 읽어 나간다면 그 설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일단 설교 원고는 보되 그 내용을 그대로 읽지 말고 교인들의 눈을 보면서 설교를 해야 한다. 교인들과 눈이 마주칠 때 교인들은 자기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을 것이다.
둘째, 이 설교는 은혜스러운가?
먼저 지금 설교하려는 내용이 설교자 자신에게 은혜스러워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은혜스럽지 않은 내용은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스러울 리가 없다. 설교자는 자기가 준비한 설교에 먼저 마음이 녹아지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감동할 수 있을 때 교인들도 그 설교에 감동할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아무리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하더라도 내용은 반드시 은혜스러워야 한다. 왜냐하면 죄를 책망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치료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세번째, 이 설교는 재미가 있는가?
설교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오직 언어를 매개체로 해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집중할 수 없으면 흥미를 잃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설교를 하되 마치 텔레비젼의 화면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생동감이 나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 생활의 가장 가까운데서 가져온 비유들이 많아서 생동감 있게 그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씨뿌리는 비유를 들을 때 바로 옆에서 씨뿌리는 사람이 있는 것 같으며 그물 던지는 어부들을 말씀하실 때 우리가 어부들 옆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그렇게 생동감 있게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예리한 관찰력이 필요할 뿐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설교를 생생하게 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설교자의‘상상력’이다. 설교자는 상상력을 통하여 교인들을 이천년 전의 상황 속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 어떤 분의 설교는 얼마나 생생했는지 그가 위쪽으로 손짓을 했는데 교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는 것이다. 과거 청교도 시대 어느 목사님은 절벽 가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맹인의 설명을 얼마나 실감나게 했든지 교인중에 어떤 사람이 설교 중에 벌떡 일어서면서‘안돼!’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사실 설교자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교인들을 데리고 깊은 바닷속의 요나에게 데리고 갈 수도 있고 가까스로 도망치고 있는 롯의 불붙은 소돔성으로도 데리고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장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지나치게 상상력에 의존할 때 공상 소설을 하나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아 허황된 이야기로 끝날 위험도 있다.
어렸을 때 어떤 한 목사님은 문학가였는데 우리들을 상상의 날개를 통하여 바닷가의 한 오두막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대단히 뛰어난 언어적인 표현으로 우리를 매료시켰다. 그런데 지금까지 남는 것은 바닷가의 그 오두막집이고 화려한 언어의 유희밖에 없다.
네 번째, 이 설교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설교자가 자기가 설교할 내용에 확신이 없으면 그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강의나 변명에 불과하게 된다. 만약 설교를 하려고 앉아 있는데 아주 유명한 신학자가 거기에 교인 중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거나 혹은 자신보다 명성이 높은 설교자가 거기 있다면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요즘은 교인들이 과거처럼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고 나름대로 다 사회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는 유명한 박사도 있고 교수도 있고 장관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 이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확신만이 설교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성경이 바로 해석되어질 때이다. 성경이 바로 해석되어지면 이 세상의 어떤 논리도 이길 수 있는 확신이 마음속에 생기게 된다. 그것이 없으면 설교자는 그 수많은 교인들 앞에서‘기죽고’ 말 것이다.
다섯째, 설교의 비언어적 요소
설교는 주로 언어를 수단으로 이루어지지만 언어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언어외적인 요인이 은혜 받는데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의 활동이다. 기독교의 진리 전달이 가지는 특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중적으로 진리가 전달된다는 것이다. 즉 귀로는 사람의 언어가 들리지만 마음속에 성령께서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믿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시는 활동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성령의 내적인 깨우침과 감동이 없으면 그 설교는 전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 준비하는 일 외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10)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설교를 통하여 능력이 나타나도록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특히 설교자 자신의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는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설교하는 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성령을 속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리차드 백스터라고 하는 청교도 목사는‘참된 목자’라는 책에서 많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 죄를 자신은 범함으로 지옥에 가 있을 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 구원을 받게 했다고 해서 설교자 자신의 구원이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활을 함으로 지옥에 떨어질 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설교자의 비언어적 요소로서 표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얼굴에 나타나는‘기쁨’은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얼굴에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한다면 듣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설교자의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기쁨은 교인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역시 청교도 목사 중에 로버트 맥체인이라는 목사가 있었는데 그가 설교단에 섰을 때 교인들을 그가 하나님의 지성소에서 바로 나왔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설교자는 설교가 끝난 후에 비로소 설교의 영향을 깨닫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는 설교가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면서 이미 주님이 그의 설교를 통하여 큰 능력을 행할 것을 느끼며 특히 기도가 시작했을 때 이미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3. 여러 목회자들의 설교 전달 방법
과거에 주님이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던 말씀의 종들 중에서 뛰어난 전달의 능력을 가졌던 사람 중에 조지 휫필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존 웨슬레에 비하여 덜 유명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최고의 복음 설교자였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육성으로만 약 삼만명 정도가 들을 수 있었다고 하니 그는 목소리 자체가 특별했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칠, 팔만명 정도가 그의 설교를 들었다고 하지만 약간의 과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출판업자가 그의 설교를 출판하자고 했을 때 그는 “내용은 책에 담을 수 있을지 몰라도 천둥과 벽력은 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그의 설교에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으며, 그것은 글로서 표현할 수 없는 전달 능력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설교를 할 때마다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울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들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아서 쓰러져 기절하는 자들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비를 맞으면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탄광촌에서 설교를 했을 때에는 탄광에서 막 나온 광부들의 검은 얼굴에서 끊임없이 두 줄이 생기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거기에 비하여 훨씬 전의 사람이지만 칼빈은 말이 느렸던 것 같고, 사람들이 받아 적을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사람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 같은 경우에도 웅변적이기보다는 메시지 자체를 가지고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쳤던 목사였는데 그는 눈이 지독한 근시안이어서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설교 원고를 들고 설교를 했는데도 그의 설교를 듣고 교인들은 통곡하게 되었으며 강단에서 대표 기도를 하던 어떤 목사는 그의 설교가 너무나도 통렬해서‘에드워즈씨,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신가요?’라고 부르짖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찰스 스펼젼 같은 경우에는 웅변적이면서도 특히 언어의 마술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언어 감각을 가진 설교자였다. 스펼젼 목사는 정식 대학 교육이나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할아버지의 서재가 그의 신학교였다. 그는 거기서 많은 청교도 서적들을 읽었으며 존 번연의‘천로역정’같은 책은 백번 이상 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진실로 뛰어난 상상력과 언어적인 표현능력을 가진 종이었으며 한번은 왕실에서 설교를 하기 전에 설교를 연습하느라고 몇 마디 하는 말을 듣고 그곳을 수리하던 사람이 은혜를 받아서 회개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설교자였다.
우리 나라 목회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준 바가 있는 영국의 로이드 존즈 목사는‘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말할 정도로 논리적이면서도 열정적인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진지한 것이 특징이었으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로이드 존즈의 설교는 교리적인 설교가 특징인데 대개 교리적인 설교는 지루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열정적인 설교로 지루하기는커녕 설교 중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체험하게 하는 능력의 설교를 했다. 특히 로이드 존즈 목사는 성령의 부으심 (unction)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설교자가 설교하는 중에 자신의 의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설교가 이끌려 가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한번에 마치려고 했던 설교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여러 주에 걸쳐서 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런 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믿었다. 그의 설교의 특징을 몇 가지 요약을 해 보면 (1) 성경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2) 성경 해석에 있어서 교리적인 접근 (3) 성경 자체의 논리와 순서를 중요시 (4) 성경 해석 과정을 교인들과 함께 나눔. 그는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일방적으로 이런 뜻이라고 말하지 않고 교인들 앞에 여러 해석을 제시한 후 바른 해석이 아닌 것부터 하나씩 제거함으로 해석 과정을 공개했다. (5) 가상적인 대화를 제시함으로 설교에서 극적인 효과를 높임 (6) 반복되는 철저한 진술 (7) 찬송가 가사를 가끔씩 인용함 (8) 철저한 적용과 도전을 통하여 교인들에게 결단을 요구함 등을 들 수 있다.
로버트 슐러 목사의 설교를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데 대단히 웅변적이었으며 그의 연극 배우 수준의 언어 구사력을 맛 볼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설교로 큰 영향을 끼친 설교자들의 특징도 한 가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분은 대단히 웅변적인 분이 있다. 내용이 복음적이면서 웅변적일 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떤 분은 음성의 효과가 탁월한 분도 있다. 과거에 타임즈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음성에 대하여‘스타카토’식 발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대개 불분명한 발음보다는 정확한 발음이 더 영향력이 있고 느린 말씨보다는 약간 빠른 말씨가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머리나 몸을 흔들거나 팔을 휘젓는 것이 설교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때로는 분위기를 산만하게 할 수도 있다.
4. 설교자의 청중 분석
목사는 다양한 성격의 교인들에게 설교를 해야 한다. 교인들 중에는 장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교수도 있을 것이며 무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학식이 높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교인 중에는 몇 대째 예수를 믿어서 종교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우 부인을 따라서 믿은지 몇 달되지 않아서 목사가 하는 대부분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초신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단번의 설교로 이 모든 사람들을 다 만족시킨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교자가 설교 중에 영어 표현을 많이 쓰면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교인들은 불편해 할 것이며 오래 믿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설교를 길게 하면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초신자들이 힘들어 할 것이다.
설교를 젊은 사람들에게 맞추어서 감각적으로 튀는 설교(?)를 하면 노인들이 심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며 어른들에 맞추어서 평범하게 하면 젊은 층이 불만을 느낄 것이다. 한번은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던 분이 도회지의 유식한 교인들이 많은 교회에 부임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교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유식한 설교를 하려고 애를 많이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도한 스트레스는 그의 건강을 망쳐서 결국 목회를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는 젊은 층과 나이 든 층의 설교 경향이 뚜렸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주로 나이가 든 성인층은 쉬운 설교를 원하고 위로하고 축복해 주는 은혜스러운 설교를 원하는 편이다. 그래서 너무 죄를 책망하고 까다로운 설교를 하면 교인들을 잃어 버릴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젊은 층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 복음적이면서도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젊은 층을 붙잡으려고 하면 나이든 층을 잃을 가능성이 많고 나이든 층을 염두에 두면 젊은 층을 잃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앞으로 목회자는 어느 층을 주된 청중으로 생각하고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목회의 성격에도 많은 고민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는 전천후 설교자이어야 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린아이에게 맞게 설교를 하고, 젊은 층에는 젊은 층에 맞게 설교를 하고, 노인들에게는 노인에게 맞게 설교를 해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할 수 있는 대로 한 영혼이라도 더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주무기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스타일의 목회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형이 될 것인지 생각을 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회의 규모에 있어서도 작은 개척 교회의 경우에는 교인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기 때문에 교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설교하기 쉽다. 그러나 교인들의 사정을 잘 안다는 것이 마이너스 효과를 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책망하는 설교를 할 때 교인들 중에는 목사님이 자기를 미워해서 그런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설교에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일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교회는 목사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정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허공에 대어놓고 설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교회는 목사의 설교로 하나가 되며 성장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진리를 담은 그릇이다.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4:7)라고 할 때 이것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말씀이다. 교회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규모가 크다 하여도 질그릇에 불과하다. 교회가 영화로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담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목사는 교회가 진리를 담은 그릇으로써 신실한 공동체가 되도록 말씀으로 양무리를 먹일 책임이 있다.
5. 강해설교와 목회
모든 목회자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할 수 있는 대로 큰 교회에서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서 설교를 하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 나라 대사관의 규모가 상대하는 나라에 따라서 모두 다르다. 미국 같은 나라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와 대사관의 규모가 같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도시의 규모나 주위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규모가 크고 작을 수 있다. 그러나 변함없이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도시 교회이든 시골 농촌 교회이든 대형 교회이든 작은 개척 교회이든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교회 문제의 거의 대부분은 목회자의 자질에 달려 있는 것 같은데 그 중에서도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는 것은 앞으로 스스로 성경을 연구해서 교인들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밥은 아닌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교회에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해서 교인들을 먹여야 한다. 그런데 3년 신학 교육으로 성경을 다 배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굶주리게 되고 목회자 자신은 덜 중요한 일에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된다. 탁월한 설교자는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장시간 씨름하는 가운데 누구든지 탁월한 설교자로 성장할 수 있다. 단지 문제는 그런 투자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그런 시간을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설교에는 과학성과 예술성이 있다. 우선 성경 해석은 엄밀한 과학적인 작업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 해석은 자기 멋대로 생각나는대로 해서는 안되며 문법에 맞게 그리고 성경 저자의 의도에 맞게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설교는 성경 해석한 자료 자체를 그대로 교인들에게 먹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일주일 동안 세상과 싸우느라고 지치고 상한 심령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설교자는 연구한 말씀을 요리해서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강해 설교보다는 주해설교가 더 본문에 가까운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만큼 강해 설교는 설교자의 의도가 많이 가미된 것이며 의도를 가진 설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말씀의 청지기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그 권리를 사용해서 교회를 유익하게 해야 한다. 설교의 과학성은 배울 수 있고 모방할 수 있지만 예술성은 그 본인에게 고유한 것이며 본인에게 있어서도 노력할수록 더 자라게 된다.
예를 들면, 의대를 갓 졸업한 인턴 의사는 수술을 할 때 불필요하게 많은 부위를 절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사의 경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절개하는 부위는 줄이면서도 정확하게 수술을 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설교는 의사들의 수술 실력과 같다. 이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수술을 해 보는 이상으로 중요한 훈련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은 직접 부딪쳐 보는 것이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설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field)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의대생들에게 아무리 해부에 대하여 강의를 해도 실습할 수 있는 시신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실제로 자기가 맡은 교회나 부서에서 설교를 함으로 자라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강해 설교를 하면 하루 사이에 교회가 크게 성장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강해 설교는 결코‘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그 대신 오히려 교인들이 처음에는 힘들어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강해 설교를 시작하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 말씀을 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은 확실하게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어지게 되며 결국 이들을 통하여 급작스러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가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오직 설교로 말을 하게 되어 있다. 설교자는 자기 변명을 하기 위하여 단상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에게 가장 복된 것은 내가 지금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으며 그것이 교인들에게‘아멘!’으로 받아들여질 때이다.
김서택/서울대 공대와 동대학원, 그리고 총신대신대원(M. Div.)에서 공부하였다. 지금은 대구 동부교회 담임목사로 대구 계명대학교 겸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난의 시대에 찾아온 하나님」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제목 : 제자훈련과 설교,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본문 :
어떤 면에서는 제자훈련과 설교의 역할이 다른 것 같습니다. 설교는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전체 성도를 향한 함포 사격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해서 진압이 되면 소총부대가 중앙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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