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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세기 3장에 보면 동문서답을 하는 한 예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아담은 “네, 제가 나무 밑에 있습니다.”라고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물어보지도 않은 것을 말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 우리가 잘 알 듯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는 손을 대지 말라!” 그러나 그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 열매에 손을 대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서기를 꺼려합니다. 그래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러한 이야기가 기록되던 당시(BC900년경) 이스라엘 사회에는 불의한 죄가 너무 많았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농경문화 속에 들어가 그 생활방식을 배워서 살아갈 때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농사를 짓는 자신들에게 농사에 필요한 비를 주고 풍요로움을 준다는 바알 신을 섬기는 종교적 타락의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또 십계명에서 보듯이 너무 엄격하게 윤리를 강조하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서 떠나서 자기들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고도 싶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와서 유혹하는 뱀들이 많았습니다. “왜 너희들은 야웨의 계명에만 충실해야 하느냐? 야웨를 모르는 이방 사람들도 얼마든지 잘 살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행복해질텐데 무엇을 두려워 하느냐? 하나님의 명령이란 마치 과수원에 심어놓은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 아니냐?”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유혹을 받으며 점차 타락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20장에 보면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동성애하는 사람들에 대해 돌로 쳐서 죽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시 바알 신을 섬기는 가나안 사람들이 행하던 성적 타락의 관습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고 영향을 받고 있었나를 잘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의 저자는 어떻게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는지를, 즉 인간의 죄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담과 하와가 자유롭게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유혹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바로 이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이런 잘못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이 혼란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사회의 부패와 범죄들, 생태계 파괴의 문제, 성적 타락, 가정의 파괴, 삶의 가치관 혼란 등 모든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는 것 같은데 오히려 허무함과 삶의 갈증을 느끼고 방황하게 됩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것 같은데, 정작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는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던졌던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는 왜 네가 피조물로서 지켜야 할 자리를 떠나버렸느냐는 책망과 함께 또 동시에 아담으로 하여금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었음을 알면서도 “내 욕심이 죄를 지었다”는 솔직한 고백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박이 싫어서 자유해 보려고 명령을 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금지령이 부당한 것 같아서 항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할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있습니다. 나무 밑에 숨어서 벗은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이중삼중으로 자신을 숨깁니다. 결국 자기 잘못이 아니고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여자가 자기를 범죄케 하였다고 책임을 전가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세상사는 것이 참으로 복잡합니다. 신앙적으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것들이 늘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하나님의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더 이상 동문서답을 하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라, 진실 되게 내 모습을 보이면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하며 살아간다면 삶의 새 힘이 늘 우리 안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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