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앎이 아니라 삶입니다.
어느 달동네 꼭대기 쯤에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한분이 사셨습니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보듬어 줄 사람도 없지만
할머니는
늘 감사하며 행복할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삶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의 아름다운 믿음에 대한 소문은
달동네 마을은 물론,
지역전체로 퍼지기 시작 했습니다.
할머니에 대한 소문을 들은
그 지역 목사님들이 모여
그 할머니를 방문하여
어떻게 그렇게 충만하게 사시는 가를
알아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목사님들이 할머니에게 필요한
이것 저것을 준비하여
할머니가 사시는 곳을 찾아 갔습니다.
마침, 할머니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찬송을 흥얼 거리시며
손빨래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목사님 중에 한분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뭐가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하세요?"
혹시 예수님이 다녀 가시기라도 하셨나요?
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이 할머니께서 잘못 들으셨는가 하여
재차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이 다녀 가셔서 그렇게 좋으신 거예요?"
그러자, 할머니는 허리를 펴시고 일어 서시며
"아니야, 예수님이 다녀 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사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목사님들은 그제야 할머니가
그렇게도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감사하며
충만하게 사시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앎이 아니라 삶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대하여 알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말한다고 하여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앎과 삶은 비례 하지 않습니다.
염소는 뿔이 있지만
뿔이 있다고 다 염소는 아니듯이,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많은 지식이 있고
예수님 때문에 바쁘고
예수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한다고
믿음의 size가 큰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용어를 많이 쓴다고
신령한 것이 아니듯이
교회 근처에 산다고,
예배를 자주 드린다고,
하루 종일 설교를 듣는다고 하여
믿음이 좋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교인들 중에
절대 다수가 이미
아니면 현재 주님과 별거 중이거나,
이혼 하신 분들이 꽤 있는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신앙은 현재 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내것이 아닙니다.
지금 충만해야 하고
지금 감사해야 하고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제대로 믿는다면
그렇게 불신자들 처럼 살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것은,
그렇게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렇게 작으시고 무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믿음은 앎이 아니라 실재 입니다.
믿음은 주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이며,
내 삶에 개입하셔서
나와 함께 살림을 사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삶을 공유하고 나누시는 것입니다.
많이 힘드시고, 많이 낙심이 되고,
많이 죽고 싶을 정도로 어려우십니까?
혹시 주님과 별거 중은 아니신지요?
반대로 하나님을 생각만해도
기절할 정도로 좋고 기쁘십니까?
그렇다면 상황이야 어떻든
주님이 당신속에 살고 계신 중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앎보다 삶이며,
일보다 관계이며
모든 인류보다 당신의 영혼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앎으로 충만한 1000 명보다
달동네 할머니 한분을 더 애타게 찾고 계실 겁니다.
참으로 주님과 별거 중이 아니라면
달동네면 어떻고, 궁궐이면 어떻고
세탁기면 어떻고, 손빨래면 어떻고
지펠이면 어떻고, 아이스box면 어떻고
가난하면 어떻고, 부요하면 어떻고
무명하면 어떻고, 유명하면 어떻고
성공하면 어떻고, 실패했으면 어떻고
고기 먹으면 어떻고,
물말아 총각 김치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내 안에 사시므로
기절할 정도의 영성과 믿음이라면
사방의 음침한 골짜기인들
어찌 찬양 안 할수 있습니까?
그분으로 인하여 최고의 부자 이니까요.
ㅡ 옮긴 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