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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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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집정관(Consul)



집정관은 군단(6000명)을 거느리는 위치이다.

작전을 짜고 전투에도 직접 참가하였으며 병사들을 통솔하기도 하엿다. 집정관에게는 한명당 2개의 군단을 거느릴 권한을 주었다. 로마때 2명의 집정관이 어디를 갔다고하면 군사 24000여명이 움직였다는 얘기이다.

집정관은 투표를 통하여 뽑았다.
후보를 선출한 다음, 그 중의 한명을 황제가 직접 선택하였다. 집정관 투표는 매년 3월에 하였다. 매년이란 건 집정관의 임기가 1년이란 뜻이 된다(참고로 사병들의 징병기간도 1년이었다). 집정관은 전투에서 패했더라도 처벌 받지는 않았다. 지금은 당연할지 몰라도 고대에서는 패한 장수는 처벌하는 것이 되었다(카르타고의 경우, 패한 장수는 무조건 사형). 로마는 패배에 대해 집정관에게 관대했다. 오히려 패한 장수를 다시 출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백인대장(Centurio)


백인대장은 백명의 병사가 모인 백인대의 직속 지휘관이자 로마의 말단 장교이다.

병사들은 이 백인 대장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다. 백인대장의 선출방식은 백인대가 투표를 하여 해당 백인대 중 한 사람을 뽑는 방식이었다. 집정관은 로마 원로원에서 투표를 하다보니 귀족출신이 많지만 백인대장은 그렇지 않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카리스마 넘치는 베테랑이 뽑히는 영광스러운 자리인 것 이다. 이런 백인대장은의 자리는 매우 명예로왔다. 집정관에 대하여 말할 때는, 요즘 학벌 따지듯이 백인대장을 몇 번 했는지를 따질 정도였다.

왼쪽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은 기수이다. 백인대장 옆에서 깃발을 들어 군단병들이 자기 부대 위치와 지휘관의 위치를 확인 시키게 하였다

 

 

 


군단병(Legionary)


기병은 귀족 부잣집 도련님의 전유물이었다. 로마에서는 징병 후 모든 장비는 사비로 대었다. 즉 기병을 할려면 오래전부터 길들여서 친하게 지내는 말이 한 마리 있어야하고, 말 사료비 등 유지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징병될때는 부자 귀족가문에서는 기병으로 많이 지원했다. 로마군은 언제나 훈련을 하건 전투를 하건 평균 20Km를 행군해야하는데, 기병이라면 갑옷을 입은 군단병보자 매우 편했으리라 짐작된다.

전투에서 기병은 군단병의 보조 역할을 했다. 전투시 군단병의 좌우에 서서 군단병이 포위되지 않도록 했다. 포위당하면 전투에 얼마나 불리한지는 스타크레프트 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기병은 좌우익에 서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주력유니트인 군단병이 포위되지 않게 했다. 그러나 전투임무보다 기동력을 이용해 정찰임무나 패주하는 적을 쫒는 임무에 비중이 컸다.

로마의 기병은 큰 변화가 없었고, 장비등도 그리스의 것을 모방한 수준이엇다. 이유는 백병전을 주로 펼치는 로마가 주력유니트인 군단병에 더 신경을 썼기때문이다.

 

기병(cavalry)


기병은 귀족 부잣집 도련님의 전유물이었다. 로마에서는 징병 후 모든 장비는 사비로 대었다. 즉 기병을 할려면 오래전부터 길들여서 친하게 지내는 말이 한 마리 있어야하고, 말 사료비 등 유지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징병될때는 부자 귀족가문에서는 기병으로 많이 지원했다. 로마군은 언제나 훈련을 하건 전투를 하건 평균 20Km를 행군해야하는데, 기병이라면 갑옷을 입은 군단병보자 매우 편했으리라 짐작된다.

전투에서 기병은 군단병의 보조 역할을 했다. 전투시 군단병의 좌우에 서서 군단병이 포위되지 않도록 했다. 포위당하면 전투에 얼마나 불리한지는 스타크레프트 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기병은 좌우익에 서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주력유니트인 군단병이 포위되지 않게 했다. 그러나 전투임무보다 기동력을 이용해 정찰임무나 패주하는 적을 쫒는 임무에 비중이 컸다.

로마의 기병은 큰 변화가 없었고, 장비등도 그리스의 것을 모방한 수준이엇다. 이유는 백병전을 주로 펼치는 로마가 주력유니트인 군단병에 더 신경을 썼기때문이다.
 

 

 


콜로세움
圓形競技場 Colosseum



로마의 포로로마노(고대명은 포룸로마눔) 동쪽 저지에 있는 원형투기장.

긴지름 188m, 짧은지름 150m.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라고 한다.

이 저지는 네로황제가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못을 만들었던 장소로, 근처에 거대한 헬리오스상(콜로수스)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와 혼동되어 원형투기장을 콜로세움이라 통칭하게 되었다.

고대의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 투기장>이었다.

72년 베스파시아누스황제가 착공하여 80년 티투스황제가 헌당식을 올렸다. 이때, 기념흥행으로 100일에 가까운 투기(鬪技)가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는 도미티아누스황제시대에도 계속 이어졌고 네르바황제와 트라야누스황제 때에도 개축 또는 증축공사를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벼락을 맞아, 그때마다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6세기 전반까지 행해졌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외관(外觀)은 4층으로 되어 있고, 밑에서부터 도리스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콤포지트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층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아레나지하에는 맹수우리와 기구보관실이 있다.


<제국의 적들>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만들기위해 로마군단은 많은 전투를 했다. 어떠한 야만족과 국가, 인물들이 로마에 맞서서 싸웠는지 알아보자.

 

인물

한니발 -

한니발 전쟁(로마인이 지칭한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이탈리아 반도내를 돌아다니며 로마에 위협을 주었던 희대의 명장. 카푸아에서 대치중에 포위망을 뚫고 수도 로마까지 달려가 위협을 준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카르타고인이었던 그는 신카르타고(현재의 에스파냐 부근)에서 코끼리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가기위해 알프스 산맥을 10일만에 넘고 갈리아인들을 모아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 갔다. 그러나 자마에서 로마의 집정관 스키피오에게 패한다. 기원전 183년 음독자살하여 생을 끝낸다.


아틸라 -

훈족의 왕. 5세기 전반의 민족대이동기에 지금의 헝가리인 트란실바니아를 본거로 하여 주변의 게르만 부족과 동고트족을 굴복시켜 동쪽은 카스피해에서 서쪽은 라인강에 이르는 지역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로마를 위협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갈리아에 침입하여 오를레앙을 공격하였다(451). 이에 대하여 서로마는 서고트 및 프랑크와 동맹군을 편성하여 맞아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아틸라는 철군을 개시, 돌아오는 도중 마우리아쿠스의 벌판에서 연합동맹군에게 패하여, 서유럽의 정복을 단념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북이탈리아에 침입, 로마에 육박하였으나, 로마교황 레오 1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그 후 본국으로 돌아와 재차 동로마 침입을 기도하였을 때 급사하여 대제국도 붕괴되었다. 그의 이름은 "니벨룽겐의 노래" 등의 전승문학에는 에첼·아틀리 등으로 나타나 있다.


국가(민족)


카르타고 -

티레의 고대 페니키아인이 북아프리카의 튀니스만 북 연안에 건설한 도시 및 도시 국가. 한때 서유럽까지 영역을 넓혔지만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 그 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카르타고 도시 자체는 카이사르가 재건하여 로마제정시대때 크게 번영되었다.

갈리아 -

북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일대, 즉 라인 알프스 피레네 및 대서양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말하는데, 포강 유역의 북이탈리아도 이에 포함된다. 북이탈리아는 BC 3세기 말 로마의 속주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쪽의 갈리아라는 뜻)가 되었으며, 남프랑스는 BC 118년 속주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 저쪽의 갈리아)가 되었다. 갈리아 인들은 글자가 없었기에 로마인들에게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갈리아 전역을 평정하여 로마 영토로 만든 사람은 BC 58~BC 51년 갈리아 전쟁을 수행한 카이사르였다. 그 후 로마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AD 21년 이후로는 갈리아인의 저항이 완전히 없어졌다. 로마제정기에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아퀴타니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벨기카의 4주(州)로 나누어져 로마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또한, 포도주, 곡물, 식료품(치즈, 맥주 등) 도기(陶器)의 생산과, 직물업, 금속업 등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도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부터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4세기에는 알라만족, 프랑크족, 작센족이 침입하였고, 5세기에는 부르군트족, 서고트족도 들어와, 5세기 말에는 갈리아 전체가 게르만인에게 점령되었다.

프랑크 -

단일 부족명이 아니라 살리족 ·리부아리족 ·카티족 등 라인강 중, 하류의 동안에 거주하는 여러 소부족의 부족집단에 대한 호칭이다. 살리족이 지도적 지위에 있었으며, 민족이동기에 라인강을 넘어 갈리아 지방으로 퍼졌다. 5세기 말에 살리족의 수장인 메로빙거왕가의 클로비스가 통일왕권을 수립하여 프랑크왕국을 건설하였다. 카티족이 통합된 것도 이 무렵이다. 프랑크왕국의 확대와 더불어 프랑크족의 계획적 식민이 행해졌는데, 그들은 고지를 버리지 않고 팽창 발전하는 형태를 취했으며, 또 아리우스파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 다른 게르만 제부족과 다른 점이다. 이들의 통일성도 베르됭메르센의 두 조약에 의한 왕국 분할과 동시에 붕괴되었다. 서프랑크(프랑스 지역)는 갈로 로망적 요소에 동화되고, 동프랑크(독일지역)는 다른 부족과 같은 국가 구성상의 한 부족에 불과하게 되었다.

훈족 -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간 흉노의 일부가 곧 훈족이라는 설에는 이론이 있다. 4세기에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375년 흑해 북안의 동고트족을 무찔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고, 이어서 다뉴브강 하류의 서고트족에 육박했다. 서고트족의 일부는 훈족의 압박을 피하여 동로마에 이주하였는데, 이것을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발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4세기 말의 루아왕 때에는 오늘날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어, 주변의 게르만 제부족을 복속시켜 흑해 북안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일대제국을 수립했으나, 대제국으로서의 내부적 기틀이 잡혀 있지 않았다. 아틸라는 약탈을 일삼았고, 로마제국에 큰 위협을 주면서 다시 서진, 갈리아에의 침입을 꾀하자 서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는 451년 로마군과 게르만 제부족의 연합군을 이끌고 북프랑스의 카탈라우눔의 평야에서 이를 무찔러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틸라는 이탈리아 침입을 꾀하는 등 훈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나, 453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적의 대제국도 급격히 분열, 쇠퇴하여 훈족은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 타민족과 혼혈,동화되어 소멸되었다.


로마의 문화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 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로마의 정치제도와 로마법은 오늘날의 유럽의 정치체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많은 용어들이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이다.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 영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 등 여러 근대 국가의 법률적 기저가 되었다.

로마법의 발달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문법의 단계인데, 이는 종교적 관습과 혼합된 매우 엄격한 神法의 시대를 말한다. 그 다음이 12표법이다.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것은 12표법이라 할 정도로 이것은 중요하다. 이는 신법이 시민법으로 바뀌는 법의 세속화 현상과 법과 관습의 성문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의 민법과 약간의 공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로마의 법률 기관이 확장되고 법무관(Praetor)직이 창설된다. 시민법은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 후 로마는 영토를 확대해가면서 이민족의 관습을 법체계 속에 섭렵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게 된 것이 만민법이다. 만민법은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 노예 제도와 계약, 상거래 등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이 법은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 내 이민족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을 보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하에 활약한 울피아누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하게 된다. 마침내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이 발달한다.

자연법은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유래한다. 자연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물이며 스토아 철학에 그 근원을 둔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황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한다. 이 법은 국가보다 우위에 있어서,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어쨋든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탁월한 업적에 속한다. 자연법은 실정법보다 우월한 만고불변의 자연권에 연결된 고정법이다. 현실적으로는 원로원 등 전통 기득권층의 특권을 초월하여 황제의 명령권, 입법권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같은 과정으로 발달한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한다.

로마법은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이르러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으로 집대성된다.

로마 문화의 특색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국가 생활의 표현으로서 확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는 정복자로서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조각, 구조물, 대리석 기둥 등을 약탈하여 그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을 장식하였다. 원수정 초기에 제국을 에워싸고 있던 국가적 영광의 분위기 속에서, 건축 분야는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라틴적인 특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권력과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대규모의 토목건축, 예컨대 도로, 교량, 댐, 저수지, 항만, 상하수도 시설 등을 축조하게 된 동기는 광범한 제국의 통치상 필요한 실용성이다. 건축 양식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혹은 메소포타미아 등의 양식들을 모방하였으나, 그 구조가 견고하며 착상의 규모가 크며 장식적인 특색이 있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원형 아아취를, 기둥에는 그리스의 세양식을 사용하고, 로마인 독자적인 것으로는 도옴, 특히 궁륭(穹?)을 독특한 교차형으로 발전시켰다. 건축의 주재료는 석재, 콘크리트, 벽돌, 대리석 등이었다. 로마인이 처음 시작한 콘크리트법(이탈리아 지질이 화산질 지형으로 주위에 흔한 화산재와 석회석을 혼합)은 건축물을 매우 견고하게 하는 공법이었으며, 근세에 부활되었다. 로마인이 만든 교량이나 도로는 전대의 어떠한 민족도 능가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스페인의 세고비아의 水道라든지 로마의 아피아路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사용되고 있다. 그외 신전, 포룸, 극장, 투기장, 경마장, 욕탕, 기념 건조물, 바실리카와 같은 대규모 공공 건물이 있다. 로마의 대표적인 신전은 돔 양식의 판테온 신전(아그리파 건축, 하드리아누스 개축)인데, 직경 43.2미터의 거대한 원형 신전으로 북쪽 입구 부분에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붙박은 돌출부를 갖추었다. 내부는 천장에 있는 직경 9미터의 天窓에서 원형의 공간에 쏟아지는 ㅂ이 대리석 바닥의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으며, 주위에는 일곱 개의 커다란 벽감(壁龕)이 있어, 마르스, 비너스 등의 신상이 세워져 있다. 그 외 목욕탕과 경기장(앞 장 참고) 등이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의 의복생활을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의 복식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로마의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되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복식의 재료와 형태도 다양해졌다. 로마인들이 의복을 입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였는데,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급을 나타내고,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 부, 나이 등을 자신들의 의복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토가는 시민의 유니폼같은 것이었는데, 점차 의례용의 관복이 되면서 색과 장식선, 입는 방법등이 엄격해졌다. 대개 표백하지 않는 양모(후일 실크가 수입되면서 실크도 사용)로 된 키의 세배(약 8.3제곱미터 가량)나 되는 타원형의 긴 천으로 어깨에서 발 끝까지 감싸게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의 회합에는 보통 베이지나 갈색의 토가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다만 입후보한 사람들만이 눈에 두드러지게 새하얀 토가를 입었으므로, 흰 색깔을 의미하는 'candidus'라는 라틴어에서 후보자 'candid'라는 말이 나타났다.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들은 진홍색 혹은 자주색의 띠로 장식하여, 서열에 따라 휘장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 지붕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는 토가는 공공 생활에서 덮어주고 감싸주고 점잔을 떠는 옷이었으나, 그리 편리하지는 못하였다. 여름에는 무겁고 겨울에는 추웠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왼손으로는 토가의 왼쪽 자락 끝을 잡고 있어야 하였으므로 오른 손만이 자유로왔던 것이다. 이는 즉 평화시의 옷이라는 의미로서 전쟁시의 병사들의 옷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았는데, 토가를 입었을 경우 머리와 손만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인들은 '머리와 토가와 오른 손'의 세가지로 대표되어 졌다. 그외 토가 아래 입는 튜니카 등이 대표적인 의상이었는데, 남녀 어느 계급에서나 보편적으로 착용되었다. 튜니카는 길이가 무릎에 미치는 셔어츠로서, 초기에는 넉넉한 실루엣에 소매없이 허리띠를 맨 형태에서, 후기에는 간단한 T자형의 원피스 형태가 되고, 신분에 따라 지위나 계급을 상징하기 위해 끌라비라는 수직선 장식을 하였다. 일을 할 때나 걸어다닐 때는 남자는 튜니카만을 입으면 되었는데, 잠옷으로도 사용되었다. 떼베나는 프릴이 달린 소형의 숄로 튜니카위에 걸쳐 입는 상류 계급의 복식이었다. 형태는 만원형, 장방형, 원형 등이 있었다. 그 외 팔루다멘툼은 귀족 계급이 착용하는 일종의 망토형의 군복으로 제정시대 중기 부텨 착용되었으며, 울이나 실크가 주로 쓰여졌다. 여자들은 스톨라라는 긴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를 튜니카 위에 입고 허리께를 벨트로 묶었다. 귀부인들은 파라솔과 부채를 아울러 갖고 다녔다.

 

참고 문헌)

윤장섭, 서양 건축사, 동명사, 1990.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한길사, 1997-

로마제국,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90.

F. Dupont, Daily Life in Ancient Rome, Blackwell, Oxford, 1996.

The Legacy of Rome, ed. C. Bailey, Oxford, 1940(rep).
 

B. Nicholas, An Introduction to Roman Law, Oxford, 1979(r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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