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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후기의 유다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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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기에스라-느헤미야)

 

1. 고레스칙령과 귀향

역대기서는 바벨론 포로민이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귀향하게 된 배경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난다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지으라고 명한 것이다(대하 36:22-23). 당시 페르시아는 바벨론을 무혈 점령하고 정복지 백성들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관용정책을 폈다고레스가 바벨론에 끌려 온 사람들은 이제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 좋다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한 것이다(사 45:1).

 

동시에 그들이 돌아갈 때 자기들이 섬기는 신상(神像)을 가지고 가도록 허락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538 B.C.E.).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는 포로후기의 유다공동체를 묘사하고 있다.

 

 

2. 역대기 사가의 신학

 

그 동안 역대기서와 에스라-느헤미야서는 동일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역대기사가(CH)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여겨졌다그러나 최근 역대기의 저자와 에스라-느헤미야의 저자가 다르다는 견해가 대두되면서 각각의 특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히브리성서(MT)는 에스라-느헤미야를 한권의 책으로 묶고 있으며 역대기상하 역시 한권으로 되어 있다그 두 권의 책은 우선 문체가 서로 다르며 신학적인 견해도 차이가 있다그 한 예로 역대기서의 저자는 북쪽사람들을 제의에 포함시키려는 개방성을 유지하는 반면에에스라-느헤미야 저자는 철저히 남쪽 유다 중심의 배타성을 견지한다그러나 아직까지도 저자문제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대체로 일치된 견해는 역대기사가의 작품은 최소한 두 번 이상의 편집과정을 거쳐 완성된 복합물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에스라-느헤미야의 순서에 관한 문제이다마소라 본문에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에스라-느헤미야는 성서의 순서를 따라 읽어 가노라면 내용의 일관성이 없고 시대적 흐름에도 어긋난다그 동안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느헤미야가 먼저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으며그 다음에 에스라가 왔다그 증거를 보여주는 쉬운 예로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유다인의 명단'에 에스라가 빠져 있다(느 7:5-73). 느헤미야가 먼저 파견되어 성벽을 건축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이룩한 다음에종교인 에스라가 와서 새로운 형태의 유다교를 확립했다는 것이 대체로 일치된 시각이다따라서 느헤미야서 안에 있는 에스라에 대한 구절(느 8:1-9:38)은 에스라 7-10장과 연결될 때 보다 자연스럽다왜냐하면 느헤미야가 바벨론에 돌아간 다음에 에스라가 도착했으므로 그 두 사람의 활동기간은 서로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따라서 현재 모습의 느헤미야서는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의도적으로 관련시켜 그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강조하려는 편집자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그러므로 느헤미야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먼저 살펴보고 에스라의 종교활동을 고찰해 보는 것이 포로후기의 팔레스타인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다백성들도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이 새로운 공동체는 이전의 유다왕국이 아니다바벨론에 의해 유다 왕국은 멸망하고 이제는 페르시아의 한 속주가 된 유다공동체이다따라서 새 공동체는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리 반가운 것이 못됐다유다의 지배층들이 바벨론에 있는 동안 예루살렘에 남아 그 땅을 지킨 사람들은 폐허된 잿더미 위에서 여러 종족이 혼합하여 살고 있었다아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후부터 사마리아 지역은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신을 섬기며 살고 있었다(왕하 17:24-41).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본토에 남아 있던 유다인 역시 거의 비슷한 환경속에서 지내왔음이 분명하다(라 4:2).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귀환명령이 내려지고 바벨론에서 살고있던 유다의 왕족과 지배층이 다시 돌아와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그도 그럴것이 그들은 이미 포로민이 아닌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적인 힘을 업고 의기양양하게 귀향한 것이다페르시아는 제국에 충성하는 사람을 그 지방 총독으로 삼고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은 제국의 이익에도 부합된 것이었다이집트와의 국경지대에 예루살렘을 재건함으로써 군사·정치적인 교두보를 만들고자 했으며 재건된 예루살렘은 제국의 상권형성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었다따라서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재건에 재정적으로 적극 도와주었으며 유다인은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성벽을 세움과 동시에 성전을 재건축할 수 있었다.

3. 예루살렘의 재건세스바살스룹바벨

 

예루살렘이 복구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네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그 첫번째로 유다의 왕손이었던 세스바살이 유다공동체 재건을 위해 고레스의 명령에 따라 성전건축을 착수한다(538 B.C.E.). 고레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간 성전기구들을 꺼내어 당시 유다 총독으로 있던 세스바살에게 건네주고 재정적으로 적극 돕는다(라 1:1-11; 5:13-15). 에스라서에 의하면 세스바살이 성전공사에 착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곧 사라지고 대신 스룹바벨이 성전공사를 재개한 것으로 보인다(라 3:1-13).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성전재건이 다시 착수되었으나(520 B.C.E.) 원주민의 반대에 직면한다사마리아인을 비롯한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성전재건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유다의 지배층들은 그들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라 4:1-2). 자기들의 시도가 좌절되자 그들은 성전재건을 방해하는 구체적 계획을 세운다아닥사스다 왕에게 글을 올려 유다인이 성읍을 건축하여 페르시아에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고발한다유다인이 성을 재건축하면 힘을 키워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세금바치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 한다(라 4:11-13). 그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일리있다고 인정하는 페르시아 왕은 조서를 내려 유다인이 성을 건축하는 것을 중단하게 함으로써 작업은 일시 중단된다(라 4:21-24). 스룹바벨은 다시 다리오 왕에게 편지를 보내 유다인의 성전건축은 고레스왕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반역의 의사가 없음을 천명한다(라 5:6-17).

 

다리오 1(522-486)의 허가를 다시 받아낸 유다인은 결국 B.C.E. 515년에 성전을 완공한다(라 6:13-15). 페르시아가 사마리아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허락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레스(559-530)의 후계자 캄비세스(530-522)가 사망하면서 페르시아의 점령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대체로 이집트와 페니키아가 선봉에 서고 그리이스가 후원했던 이 반란들은 페르시아를 위협했다이에 페르시아는 이집트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유다를 재건함으로써 군사적·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다유다는 정치적으로 페르시아에 동조하면서 종교적인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정비하여 제사장 중심의 새로운 개혁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유다 역시 페르시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4. 정치인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Artaxerxes I, 465-424) 왕에 의해 유다로 파견된다느헤미야는 대략 B.C.E. 445-430 년 동안 유다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페르시아의 정치적·재정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유다성들의 재건에 착수한다페르시아의 정부관리였던 느헤미야는 왕의 총애를 받고 유다 재건에 필요한 물자를 별 어려움 없이 조달 할 수 있었다(느 2:1-10). 그러나 느헤미야의 정책에 반발하는 원주민들의 방해가 있었다원주민들을 다스리고 있는 지도층들이 느헤미야의 출현으로 자기들의 권력기반이 흔들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이 과정에서 성전재건 대열에 빠진 일부 유다인도 그들과 합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느 2:19-20; 4:1-14; 6:1-14). 원주민들이 귀환한 유다 지도층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은 대체로 이렇다자기밭과 집을 저당잡혀 자녀들을 먹일 식량을 마련해야 하고 밭과 포도원을 판 돈으로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이다자녀들이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들을 속량할 집 한 채 없다는 것이다(느 5:1-5). 유다의 지도층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렇듯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그들은 유다의 총독들에게 과중한 세금부담으로 시달려야 했으며폐허된 땅에서 경제활동마저 원할하지 못했다설상가상으로 포로에서 되돌아온 유다인과의 갈등으로 신분의 계급화가 발생해 원주민들이 노예로 속출하는 사태가 빈번해진 것이다페르시아의 정치력을 등에 업고 귀향한 유다인은 원주민과의 동화를 거부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형성한다상업자본주의가 성행하고 사유재산제도가 발전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계급간의 갈등이 노골화되었다이러한 현실을 본 느헤미야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부채를 탕감하여 경제적인 부담을 완화시켰으며느헤미야 자신도 한 동안 총독의 녹을 받지 않고 근검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5:6-14).

 

느헤미야는 개혁의 일차 조치로 백성들을 제비 뽑아 1/10만 예루살렘에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살게 한다예루살렘에 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솔로몬의 후손들이었다(느 11:1-36). 이것은 일종의 강제이주 정책으로서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제국의 통치와 상업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동시에 예루살렘은 유다인의 종교생활을 위한 새로운 국면을 조성했다스룹바벨에 의해 완성된 성전에서 야훼신앙이 회복되었고유다인들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유다전통을 다시 새롭게 확립하고자 했다바벨론포로기 동안 팔레스타인에 남았던 사람들의 종교활동이 다른 이방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동안 상당히 변질되었고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 역시 포로이전의 상황과 많이 달라졌다포로기에 발전된 새로운 형태의 유다교(Judaism)에 익숙한 느헤미야는 안식일 준수를 강조한다안식일에는 모든 상업활동을 중단시켰으며 심지어는 안식일에 성문밖에서 기거하는 상인들의 출입까지도 봉쇄했다(13:1-22). 느헤미야의 새유다주의는 민족차별주의로 이어지는 배타적 유다주의로 발전한다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다인과 이방 여인사이에 낳은 자식들이 유다말을 하지 못한다느헤미야는 이들을 비판하고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금한다(느 13:23-27). 이방여인들 때문에 유다인이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었다는 느헤미야의 주장은 이전보다도 훨씬 강도 높은 배타적 유다주의를 낳게 한다유다 민족주의는 제사장 에스라에 의해 계승되고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다주의가 자리를 잡아간다.

 

5. 종교인 에스라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2(Artaxerxes II, 405/4-359/8)의 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온다(대략 398 B.C.E.). 성서는 에스라가 아론의 16대 손이라고 전한다(라 7:5). 율법학자요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할 일을 부여받는다우선 누구든지 원하면 에스라를 따라 유다로 귀환할 수 있다(7:13). 이것을 보면 모든 포로민들이 유다로 귀환하지는 않았으며 그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삶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는 바벨론 땅을 떠나 황폐한 유다로 되돌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강제성을 띠지는 않았지만 에스라를 따라 유다로 돌아가면 정치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페르시아 왕의 조치이기도 하다이것은 마치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일본에 있는 자국인을 한반도에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한반도에 들어 온 대가로 그들에게 정치적 특권을 부여하고 한국인을 지배할 권한을 주거나 재정적으로 궁핍하지 않도록 배려했을 것이 뻔하다.

 

에스라는 (자기가 가지고 온 율법에 따라 유다의 민정을 시찰하기 위해바벨론에서 모은 재물을 유다로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그 돈은 예루살렘 성전에 바칠 제물을 유다인의 민정을 시찰하는데 사용되었다그 밖에 쓸 일이 있어 자금이 필요하면 페르시아 궁에서 지원하겠다는 왕의 확약이 있다(라 7:14-20). 또한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은 조공과 세금이 면제되는 특권을 누렸다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재판관으로 삼고 백성들의 송사를 주관하게 했으며 그들을 가르치는 일까지 일임 받았다(7:21-25). 이쯤되면 에스라는 명실공히 페르시아의 대리통치자임이 분명하다그는 율법학자요 제사장으로써 유다 백성을 가르치고 재판하는 일까지 맡아봄으로써 유다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여진다페르시아는 에스라를 앞세워 유다에 친페르시아적인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하지만 그의 공적인 지위는 분명하지 않다그는 아마 당시 유다의 총독으로 있던 바고아스와 협력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여겨진다.

 

에스라 역시 느헤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유다인의 잡혼을 철저히 금했다그는 느헤미야 보다 한술 더 떠서 이미 이방여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경우라도 그 여인을 내쫓고 유다사회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아내뿐만 아니라 이방 여인사이에서 낳은 자식까지 다 내보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전재산을 몰수하고 유다사회에서 내쫓겠다는 것이다(느 9:1-12). 성서는 많은 백성이 에스라의 일에 동조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레위인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에스라의 강압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했다(라 10:15). 인륜은 천륜이라 했던가아무리 이방 여인과 함께 사는 것이 야훼의 율법에 거슬린다고 하지만 이미 형성된 가정을 깬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팔레스타인에 남았던 사람들은 사회여건상 유다인끼리만 살수는 없었다유다가 멸망한 후 팔레스타인은 이질 종족간의 결혼이 보편화되었고 나름대로의 신앙전통을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그런데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의 지도층들은 자기들이 만든 규정에 의해 남아있는 자들을 심판하고 그 뜻에 따를 것을 강요한 것이다오늘날의 기독교인은 포로후기의 역사서를 읽을 때 주의할 것이 있다그것은 당시 유다인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위해서 유다인들은 원주민에게 비인간적인 결단을 촉구한 것이다아내와 자식까지 내몰아치면서 유다공동체로 들어가야만 할까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심각하게 던져질 물음이다어쩌면 신유다공동체의 주역들은 종교를 빙자하여 인권을 무시하는 무자비하고도 광적인 율법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오늘의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비판해야 될 것이다.

페르시아는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당한다(주전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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