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에서는 지나가버리는 일은 과거요, 진행중인 것은 현재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은 미래라 칭한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시제 속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늘 현재만 있는 것이다.
직선적인 시 계열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는 자꾸 유한한 틀에 갇히게 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지적인 이성에 의존할 때 영원은 우리가 상상해 보지도 못하는 영역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 그것도 우리에게 준 뇌의 5%정도 밖에 사용치 못하는 존재 우리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살고 있으니 이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미련한 일이 또 있을까?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저 맹목적인 동의나 따름이 아니다. 무엇을 믿는 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자유로운 인식가운데에서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되고 그 지식으로 인하여 동의로 이어지며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창조주의 유무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인생은 나그네의 삶이다.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가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말이다. 어느 곳으로 가는가? 성경에서는 두 가지의 길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과 넓은 문으로 가는 길이다. 좁은 문은 우리 육신의 소욕을 좇는 길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좇아 성령으로 행하는 길이다. 좁은 문은 죄 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통과 할 수 없다. 그 길은 매우 협착하여 혼자만 간신히 통과 할 수 있다. 죄 된 행위, 경건치 못한 친구, 세상의 우상, 잘못된 확신 등 자기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부정할 때만 통과 할 수 있다. 생명의 길은 좁고 곧 바르다. 그러나 멸망의 길은 넓고 구부러져 있다. 즉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오른 쪽으로 치우쳐도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사정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완곡하게 적용하기도 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길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현재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목적지가 분명하고 방향만 올바르면 조금 늦어도 괜찮고 조금 힘들어도 괜찮은 것 아닌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지금 나는 방향을 제대로 잡고 가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 방향을 결정하시고 계신 분이시다.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인도하시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