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적에 아버지께서 윤원형과 정난정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전북 장수군에는 '번암면'이 있었는데, 번암 출신 중에서 채제공이라는 몰락한 선비가 있었는데,
1560년대 윤원형이 문정왕후의 권력을 믿고 영의정에 올라 천하를 호령할 당시
유명한 풍수지관(地官)을 통하여 지방(?)에 가묘를 한개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마침 몰락한 채제공이란 선비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장례 치를
돈도 없자 무턱대고 한양에 윤원형 대감을 만나러 갔습니다.
힘들게 만난후에 채제공은 헌법책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로 말하자면 '경국대전'이 헌법이었다.)
윤원형 대감은 당시 막강권력을 가진 자였으니
집에 그런 책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책을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 하는 말..
"<산 사람이 쓸 묘자리에 죽은 사람을 묻지 말라~!>는 법은 없군요."
라고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고나서 지방으로 내려온 채제공은 바로 어머니 시신을 지고 윤원형 대감이
만들어 놓은 가묘에 묻어려고 시도를 했고, 지키던 사람이 관아에 고발을 하면서
윤원형 대감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합니다.
윤원형 대감은 그제서야 채제공 선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관아의 수령에게
지시하기를 그곳에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라고 했다고 합니다.
무사히 장례를 마친 채제공은 다시 한양에 윤원형 대감에게 가서 죄를 빌었고,
자신의 치세가 오래가지 않을 것을 예감한 윤원형 대감은....
자네가 나중에 잘 되면 오늘을 기억해서 내 자식들이라도 챙겨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근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윤원형은 1560년 인물이고, 채제공은 1700년대 숙종, 영조,정조 때
인물이기 때문에 시대 차이가 너무 큽니다.
또한 '채제공'의 호가 '번암'이지만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는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윤원형이나 정난정이 하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으니 대충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나 봅니다.
조선시대에 신분구조는 크게 3가지(양반,상민,노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생했는데, 당시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납니다.
(1636년에 발생한 병자호란때에는 의병활동이 거의 없는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죠.)
당시 95%의 국민들이 5%의 양반을 위하여 존재하던 상황이었으니, 양반이 될 수만 있다면
목숨까지 걸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군대힘이 미약했던 정부에서는 왜적을 죽이면 그 숫자에 따라서
첫단계: 신분을 해방시켜 주고
둘째단계: 벼슬을 준다 는 식으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의병이 되어서 왜적을 몰아내는데 기여를 했지만
악용하는 사람들은 조선사람의 시신에 왜적의 옷을 입혀서 제출하는 폐해가 발생합니다.
그만큼 양반이 될수만 있다면 못하는 짓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실제적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호남지방에 돈 많은 상민(?)이 약2억에 상응하는 쌀을 조정에 바치면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요청했지만 조정의 논의끝에 (바친 사람은 안되고) 큰아들 한명만 양반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소문을 듣고 황해도에서 돈많은 상민(?)이 약7-8억을
내 놓고 신분상승을 당부합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결국 그 금전을 돌려주고 신분상승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1500-1600년대에는 정말 신분상승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 신분구조를 네단계로 분류한다면...
1. 양반 : 일을 안하고 기와집에서 노비를 부리면서 쌀밥을 먹으며 벼슬을 할수 있음.
2. 중인 : 벼슬 밑에 보조일을 하거나 의원, 번역/통역인, 관리 등을 함.
3. 상민 : 농업,어업,수공업,상업 등에 종사했고, 군역,세금을 냈다.
(백정,줄타기, 광대,무당,기생 등은 상민이었지만 거의 노비와 비슷한 대접을 받음)
4. 노비 : 최하층 신분으로 성이 없고 이름만 존재하며, 매매가 가능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조선후기에 김득신 화가 작품 = 노비알현도
나귀를 타고 큰 갓을 쓴 사람이 양반이고, 그 앞에 끌고 가는 사람이 중인,
뒤에서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노비로 보이고, 공손하게 절을 하는 사람이 상민.
상민 옆에 관기(관아에서 몸을 파는 기생)로 보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비참한 삶을 살면서 감히 신분상승을 꿈꿀 수가 있을까요?
이런 신분구조에서 타파하고 싶은 욕망이 더해져서 명종(1960년대) 때에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고
홍길동 이란 소설이 나와서 신분구조를 극복하는 모습..
관기(기생)의 딸이므로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춘향이가 최상의 벼슬구조인 '암행어사'와
결혼을 하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소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소설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숙종 대에 경종을 낳은 장옥정(장희빈)은 비록 궁궐에 '나인'으로 출발했으나
중전까지 오르기도 했지요.
하지만 장옥정보다 훨씬 대단한 '신분극복의 1인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난정의 아버지는 무관으로 잘 풀려서 정2품(부총관)까지 승진한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시 관기(관아에서 월급을 받는 매춘부) 이씨를 첩으로 얻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입니다.
결국 신분은 '상민'에 속하게 됩니다. 기생의 딸이니 기생이죠.
당시 상황으로보자면 도저히 불가능한 신분상승을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합니다.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그녀의 오빠인 윤원형은 불교를 신봉했고,(당시 양반은 거의 유교)
절에서 문정왕후의 회임을 빌기 위해 기도하러 왔다가 보우대사의 소개로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정난정은 첩이 되는 조건으로 윤원형에게 계약서를 요청합니다.
“당신의 후사를 이어주면 나를 정실로 맞이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주세요.
평생 무시당하는 소실로 살 바에야 차라리 비구니가 되겠어요.”
이렇게 첩으로 시작하였고, 문정왕후를 만나면서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정권의 핵심에 서게 됩니다.
당시 대윤(윤임이 중심)을 격파하고 소윤(윤원형이 중심)이 권력을 독점한 사건인데
윤임은 윤원형의 9촌 아저씨 관계이며, 윤임과 세아들, 그리고 친형인 윤원로까지 모두 죽인 사건입니다.
1549년(명종4년)에 첩의 소생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게 됩니다.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은 양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법은 오직 정난정을 위해서 1회용으로 반짝 했다가 사라집니다.)
1551년(명종6년)에 윤원형의 조강지처 김씨를 고발해서 쫒아냅니다.
첩이 아니라 당당하게 아내가 된 것입니다.
정난정은 본부인을 내 쫓고 모든 재산을 뺏아서 굶주리게 했으며,
밥을 달라고 왔을 때에 독을 넣은 음식을 줘서 사망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독한 심정이 있었기에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1553년(명종8년) 윤원형이 종1품 의정부 좌찬성에 오르면서 '정경부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1563년(명종18년) 윤원형이 정1품 영의정에 오르면서 정난정은 정1품 정경부인이 됩니다.
노비와 다름없는 신분에서 여인으로서는 최고 자리에 오른셈입니다.
정난정은 남편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관매직을 일삼고, 많은 돈을 끌어 모아서
여기저기 로비를 합니다.
지금도 최순실이란 사람이 청화대를 들었다놨다 하는 마당에 당시에는 얼마나 더 심했겠습니까??
노비와 같이 천한 사람이 최고 자리에 올라갔으니, 시기질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정난정은 그 권력을 이용하여 관기 그리고 첩에 불과했던 어머니를 아버지 가문 선산에
아버지 바로 곁에 무덤을 차지하게 합니다.
(정실 부인의 무덤을 날려 버렸으니 당시 상황으로서는 홍길동보다 더한 일입니다.)
모든 권력은 명정왕후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그해 8월 21일에 윤원형이 파직되었으며,
정난정을 질투한 사람들의 상소가 빗발치게 됩니다.
결국 다시 상민으로 돌아갈 바에는 정경부인 신분으로 죽음을 선택하여 그해 11월03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5일 뒤에 윤원형도 자살로 끝을 맺습니다.
(부인을 따라서 죽을 정도라면 상당히 사랑한 것으로 느껴 집니다.)
자살을 해서 그런지? 당시 파평윤씨 권력이 대단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윤원형 부부에게 죄를 물을 뿐.. 자식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습니다.
파평윤씨 무덤가(포천)에는 파직됨으로 초라한 무덤으로 남아 있습니다.
<파주 교하에 위치한 무덤. 좌측이 윤원형, 우측이 정난정>
(비석은 최근에 새로 한듯...)
나폴레옹이 말하기를 <불가능은 없다!>라고 했지요.
사실 불가능을 극복한 사람들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갖춘 덕목이 있다면
어쩌면 '잔인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표를 향하여 달릴 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무자비하게 제거하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다음에도 그 버릇이 남아 있다보니 원수(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정난정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꽃이 10일 이상을 피지 못하고 지며, 권력은 10년을 넘지 못한다.
잘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을지?~!
오늘도 한번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