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 1~13절
1. 오늘의 본문은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다. 누가복음 16장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비유는 조금 난해하기도 하다.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 가며,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바를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선 이 본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1절의 "또한"이다. 장을 달리 하여 이 비유가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15장 후반부의 탕자 비유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접속사 "또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또한"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들을 병렬할 때 쓰는 접속사이다. 국어사전에는 이를 "어떤 것을 전제로 하고 그것과 같게"라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를 탕자 비유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잃은 양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 탕자 비유. 연달아 네 가지 비유로 설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아마도 설교를 듣는 이가 어려워했던 모양이다. 이 비유들은 서로 직접적인 연관성도 있고 차이도 있다. 아마 이를 통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2. 본문은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어떤 부자와 그의 청지기에 대한 문제다. 이 인물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어떤 부자가 생각하는 소유에 대한 개념이 오늘날의 우리와 많이 다른 것 같다. 청지기 또한 마찬가지다. 생각하는 게 남다르다. 우선 어떤 부자부터 곰곰히 따져 보자.
ㄱ.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다.
ㄴ. 어떤 부자는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을 듣는다.
ㄷ. 어떤 부자는 청지기를 불러 꾸짖고, 청지기가 보던 일을 셈하게 하고 일을 못하게 한다.
ㄹ. 어떤 부자는 청지기가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을 보고 지혜 있다 칭찬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내가 어떤 부자라고 가정해 보자. 만약 내 종이 내 소유를 낭비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면, 나는 우선 그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 파악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직접 하거나 다른 사람이 시키더라도 소유를 낭비한 종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어떤 부자는 해당 청지기에게 시킨다. 이를 보아 어떤 부자는 청지기가 일부로 소유를 낭비했다고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청지기로 하여금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파악하라고 시킨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소유의 낭비다. 소유의 낭비가 무슨 말일까?
영어 성경의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이와 비슷한 해석을 하고 있으며, 유진 피터슨의 더 메시지에서는 청지기가 자신의 자격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돈을 늘렸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유진 피터슨의 해석에 따르면 이해가 싶다. 우리는 세리장 삭개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 삭개오와 지금 등장하는 어떤 부자의 청지기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어떤 부자의 청지기라는 직위를 이용해 웃돈을 부르고 차익을 개인의 자산으로 챙긴 것이다. 어떤 부자는 청지기 스스로 이를 만회할 기회를 주었다. 이후 청지기가 일의 뒷처리를 하자 칭찬한다. 내가 어떤 부자였으면, 청지기를 불러다가 곤장을 때렸을 것이다. 아마 이 어떤 부자는 '사람>법>소유'의 순으로 가치를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청지기를 보자. 앞서 말한 것처럼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다. 정확히 낭비보다는 주인의 소유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남의 금품을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어떤 부자가 이웃에게 빌려 준 빚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청지기가 이후 빚을 탕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탕감해 주는 만큼의 돈을 청지기가 착복했으리라.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토색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한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부자 또한 마찬가지다. 청지기가 자신의 행동을 돌이킬 때에 칭찬한다. 삭개오와 청지기는 어떻게 자신들이 이제까지 해 오던 일들을 돌이킬 수 있었는가? 그것은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누가복음 16장 3절)
청지기는 이제까지 자신의 직분이 주는 힘을 빌어 살아왔다. 이 직분이 빼앗긴 이후에 그는 삶이 막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힘으로는 능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왜 이런 구석에 몰리게 되었을까. 그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다. 주인의 재산으로 자신의 부를 부정하게 늘렸다. 주인의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과정에는 이웃들의 희생이 있었다. 빚을 삭감하는 것이 아니라 더하여 자신의 재산을 늘렸으니, 이웃은 이 청지기에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원한이 주인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이 청지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체 또한 힘이 없어 스스로 살아갈 힘이 없다.
우리네 삶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한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 보려 해도 하는 족족 실패하고 넘어지기 일쑤다.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었으나, 내 자산을 모으기 위해 이웃에게 피해를 보게 하지 않았나 돌이켜 볼만 하다. (한 목사님은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오히려 피해를 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시며, 무엇이든 양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의 말이었다면 권면이 되었을 터이지만, 호위호식하신 분의 입술에서 듣게 되니 맞는 말이어도 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는 자신의 직분의 힘을 악용해 이웃에게 피해를 주거나 성처를 주지 않았나 돌이켜 볼만 한다.
청지기는 삭개오와 마찬가지로 외톨이였다. 어느 누구 하나 그를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그때에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그때 위로는 주인에게 옆으로는 이웃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붙들게 된다. 청지기는 빚을 탕감하는 것으로 삭개오는 가난한 자를 돕고 토색한 것을 갚는 것으로 말이다. 나는 이것을 회개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매듭을 짓고 나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한 구절이 풀린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누가복음 16장 8절)
회개가 지혜다. 회개하면 위로는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옆으로는 이웃과 화평하게 살 수 있다. 이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삭개오에게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할 때의 그것 말이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4. 비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그러고보니 네 가지 비유의 앞의 세 가지는 그 대상이 세리와 죄인들이었다면 마지막 비유는, 즉 오늘의 본문은 제자들에게만 들려주신 비유다.) 이 거대한 반전 앞에 또 머리를 굴릴 뿐이다. 성령 하나님 지혜를 허락하소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9)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0)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2)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나.(13) (누가복음 16장 9~13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는 어떤 부자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다. 이 식민지배하에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부가 같은 민족의 눈물과 피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이 어떤 부자는 예수를 영접하기 전의 삭개오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나는 이 부자가 불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불의한 재물로 예수 그리스도는 친구를 사귀라고 했다. 혹 이 부자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 어떤 부자는 빚을 탕감해 주는 청지기를 칭찬한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신 것이다. 청지기는 어차피 불의한 재물이니 손을 써서 그중에 일부를 가로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귀가 맞게 돌아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이다. 이 말은 재물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재물을 사용하는 데에 쓸모가 있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왜 구분하고 분별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이웃과 나누어 친구가 되기보다는 이웃의 것을 가로채더라도 자신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이기심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제 10~12절만 짚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 10~11절은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이다. 청지기의 잘못을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잘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돈이건 간에 주인의 재물에 충성되어야 함을 말하고, 이렇게 할 때에 참된 것을 맡긴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요셉이 떠오르는 것은 억지가 아니리라. 애굽의 총리가 된 그에게 이스라엘의 생명이 맡겨졌다. 이를 통해 12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12절에 등장하는 "너희의 것"이 무엇일까?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누가복음 6장 20절)
가난이 무엇일까? 나는 가난이 세상의 소유가 없는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나그네의 삶이 가난이다. 나그네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가득할 것이다. 요셉의 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