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1907년도에 조선- 평양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지금이 2014년이니 107년이란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래 사진은 1907년 평양에서 찍은 사진으로서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 모습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당시로 돌아가서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보고 그분들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물어보고 와서(글을) 쓰고 싶다.
(그러면 조금 더 상세한 상황과 그들이 당면했던 어려움을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재림교회사에서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적지않은 한계가 있다.
100 여년의 역사를 뛰어 넘어 지금 그들의 모습만 봐도 눈빛이 선교 열기로 번쩍인다.
- 참고서적: 김재신-북한교회사, 한국선교100년사, 이영린-한국재림교회사 외 -
1907년 평양교회에서 찍은 것으로 볼 때에 평양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했던 사람들 그리고
가까이에 있었던 순안본부에 있는 선교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해외선교사가 많지 않아서 스미스 목사님 부부와 사엄태 여선지자 뿐으로 보인다.
* 그들(외국인 선교사들)이 감당해야 했던 환경
쿠니야히데 전도사가 1904년 8월 평안남도 진남포에 왔을 때도 체험했겠지만 그 당시는 벼룩,
이, 빈대가 참으로 많았다. 그것이 매체가 되어서 돌림병도 많았다.
사엄태 여사는 부조와 선지자(그 당시 고대사화)를 통번역하면서 아메바성 '이질'과 싸웠다.
얼마나 환경이 견디기 힘들었으면 (미국에 잠시라도 가면 다시 돌아올 자신이 없어서)
고대사화 통번역을 모두 마친 이후에 미국으로 1919년 초에 갔으며, 악화된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었다.
또한 스미스 목사 부부 역시 4살된 딸과 14살 아들을 순안땅에 묻어야 했다.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순안진료소 의사로 온 로설 의사 역시 어린 남매를 잃었으며,
하워드 리(이희만) 교장 선생님도 6살 딸을 잃었다. 그들 묘는 동일한 곳 주변에 매장했다.)
스미스 목사 부인(Addle Bille)은 선교 출장을 다니던 어느날 도적떼가 쏜 총알이 날아와서
베개에 맞는 일이 있었다. 그 이후 무서워서 밖을 나오지 못했는데, 어느날 눈을 떠 보니
하얀 옷을 입은 3분의 천사가 주변에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외출이
가능했다고 증언했다.
그만큼 그들 환경은 열악했으며 그들의 선교생활 자체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 정말 대단한 조선인 사역자 이성일(李誠一)
윗 사진 아랫쪽 우측에서 두번째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분이다.
(개인적으로 이분에 대해서 많이 궁금하며,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사역자로서 강창호, 임기반, 김승원, 이봉승, 이성일 등 5명이 활발하게 시작은 했지만
1943년 12월 말 일본에 의하여 교회가 해산될 때까지 (위 5명중에서) 남아서 열심히 헌신한 사람은
이성일 뿐이다. 그 당시는 일본 지배하에서 2차 세계대전과 극심한 가난, 질병 등으로 인하여
요즘보다 신앙을 지키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며, 대부분의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떠났다.
하지만 여인의 몸으로 그러한 신앙적 뚝심을 보였다면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원래 선돌'감리'교회 출신으로 임기반 장로의 전도로 그녀의 시어머니와 함께 개종되었다.
그 당시 여성의 나이 14세가 되면 무조건 시집을 갔다고 선교사들은 증언했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함께 재림교회로 개종을 했으며, 그 많은 신앙적 위협을 극복했다는 점이
신기하고 놀랍다. 정말 안타까운 점은 교회가 해산된 이후에 그녀의 행적이다.
아마도 북한(조선)에 머물렀다면 1950년 6.25 전쟁 이후에 신앙적인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쉽게도 그녀의 행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 기타 인물들
이봉승은 서울(서대문)로 본부를 이동했던 1909년에 함께 온 분이다.
하지만 한덕헌, 안덕실에 대한 자료는 아직 못 찾고 있다.
(어딘가 있을 듯 한데...~!)
* 그 당시 화폐가치
그 당시 강대모루 교회는 마을 전체인구가 강대모루 교회에 다녔다.
원래는 감리교 였으나 전도회 이후에 재림교회로 개종이 되었다.
그러면서 신도들이 교회를 짓기 위하여 초가지붕 4칸짜리 건물을 (짚신을 팔아서) 300원에 지었다고 했다.
월급이 임기반 30원, 강창오 18원, 이봉승 16원, 이성일 11원 받았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주급이 15달러를 받았다고 하는데, 한화와 달러의 가치가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1943년 교회해산 명령을 받았을 당시 (반내현 목사님이 문서전도 할 당시)
1원에 쌀이 1말이었다고 하니, 그때로부터 30 여년전 이야기라고 가정한다면,
그 당시 월급이 30원이면 적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된다.
* 조선 사역자들의 채용시기
1904년 : 임기반, 강창오 초대사역자
1905년: 이봉승, 이성일
1906년: 김승원(일본에서 돌아온 해)
* 사진 설명
사진 = 위 좌측부터 : 강화석(근명), 이봉승, 임기반, 강창오, 한덕현
사진 = 아래 좌측부터 : 강화석 부인, 사엄태, 스미스, 스미스 부인, 이성일, 한덕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