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와 예배의 차이점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사도 예배의 한 형식(형태)입니다. 그러니까 제사 예배, 곧 제사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이 제사 예배는 의식(儀式) 예배 입니다. 의식 예배인 제사 예배는 구약적 예배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와 구분하여서 말하고 있는 예배는 신약적 예배 입니다. 이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표현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제사와 예배라고 간단히 말하여서 구약 시대에서 존재하였던 제사와 신약 시대에서부터 존재해오는 예배로 말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제사가 무엇이며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래야 이 둘의 비교에서 그 차이점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니깐요.
1. 제사
제사(祭祀)의 시작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인류의 시조요 대표가 되는 아담에게서부터 이미 시작되어 온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따라서 이를 바라보는 믿음에 있었으며, 이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가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에서 비로소 언급되며 다루어지고 있지만, 이는 아담과의 연계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에게서 비로소 제사가 행해져 그 시작이 되었다고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대한 아담의 가르침 속에서 아담과 함께 드려온 제사(교육)에 의해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에 쓰인 제물은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요 땅의 소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사에 쓰일 제물의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실체를 가리켜오는 것으로 존재하는, 그래서 실체를 말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체의 현시(顯示; 나타내어 보임)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래서 예표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사가 율법으로 규정되어 지켜져 온 것은 모세 때입니다. 모세의 율법(율법의 언약)으로 제사가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제사는 의식(儀式)으로 제도화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이 3개월이 되었을 시점에 시내산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언약식을 준비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인시키십니다(출19:4-6). 그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불러내신 하나님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이스라엘과 언약식을 맺는 것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시내산 언약이라고 불려지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두시고서 그 언약에 의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지키게 합니다. 그에 따라서 이스라엘은 언약을 통해서 약속으로 주어진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불순종하면 언약을 통해서 약속으로 주어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언약적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온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언약적 율법에는 십계명의 율법과 민.형사상의 법적 보호의 기능을 하는 사회적인 율법과 함께 제사의 율법 및 이와 관련한 성전과 절기에 관한 율법이 주어져 있습니다.
제사의 율법에는 제사의 종류가 등장합니다. 이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에서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의 5대 제사에 의한 제사 제도가 정결 의식의 규례와 함께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 이스라엘의 부정과 하나님의 거룩케 하시는 은혜를 다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으로 맺어진 이스라엘의 관계성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를 말해나가십니다.
제사에는 여기에 쓰여 질 제물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제사의 종류에 따라 여기에 바쳐질 제물의 종류도 다릅니다.
(1)죄의 속죄로, 또는 제사장의 헌신 의식으로 바치는는 번제에서는 생활 형편에 따라서 바치게 하였는데 흠 없는 수소, 수염소, 수양, 산비둘기, 비둘기 새끼로 제물 삼게 하였습니다.
(2)번제로 바칠 경우에는 소제도 함께 드리게 하였는데,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 기름, 유향, 또는 번철이나 화덕에서 기름 섞어 구운 무교병, 무교전병, 또는 볶아 찧은 첫 이삭으로 제물 삼게 하였습니다.
(3)평화를 기원하는 제사를 드리는 화목제에서는 생활 형편에 따라 흠 없는 암소, 수소나 수양, 암양, 또는 염소로 제물 삼게 하였습니다.
(4)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지중(무의식 중)에 지은 죄, 곧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부지중에 지키지 않고 어김으로써 그 벌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미치게 되었을 경우에 그 죄를 속죄받기 위해 바치는 제사인 속죄제는 제사장의 경우는 수송아지, 이스라엘 회중 전체의 경우는 수송아지, 족장의 경우는 수염소, 평민의 경우는 암염소 혹은 어린양의 암컷, 가난한 자의 경우는 고운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제물로 삼게 하였습니다.
(5) 허물이 되는 4가지 규정을 지키지 않고 어겼을 경우에는 그 범과를 속죄받기 위하여 암양이나 암염소, 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데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치게 하였으며, 그조차도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 무엇이든 바칠 때 실수로 잘못 바쳤을 경우, 곧 하나님의 성물과 관련해서와, 하나님께서 금지한 명령을 지키지 않고 어김으로써 범죄하였을 경우에는 그 죄를 속죄받기 위하여 흠 없는 수양이나 수염소를 제물로 삼아 바치는데, 이때는 그 제물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한 액수를 배상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이 5대 제사 외에도 화제, 요제, 거제, 전제가 더 말해지고 있습니다만 이들 제사는 5대 제사에 어느 것에 각각 해당되는 것에서 드려지는 제사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통상 5대 제사로 말해집니다. 이 5대 제사에서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이고, 속죄제와 소건제는 의무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모든 제사에는 제물을 바치는 자의 생활 형편도 배려가 되고 있으면서 제사의 성격에 따라 짐승과 곡물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제사에 바쳐질 제물의 실체는 짐승이나 곡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은 다만 실체의 예표적인 성격을 띠고서 모세의 율법 언약 아래 있는 시대에서 현시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이를 알 수 있게 한 그 첫 번째는 모세 이전인 아브라함이 바친 제물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치게 하면서 이를 통해서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또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그에게 주신 언약의 성격과 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 믿음으로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를 입은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제물로 바치게 하실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22:1)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어떤 자인 줄을 하나님께서 알고자 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의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의를 입고 있는지를 그러한 방식으로 표현하여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한 것은 짐승이나 곡물이 아닌 당시 이방인들에게서 볼 수 있던 ‘인신제사’를 원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이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론적 이해의 믿음에 있게 하시고자 해서 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와 맺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는 ‘주’가 되심을 확인하며 그 믿음을 확증케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심 믿는 믿음에 있게 하였습니다(롬4:17).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 당시에는 장래에 되어질 것에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그를 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게 하실 것을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데, 이는 온 세상의 사람들을, 곧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의에 있게 하신 것처럼 그들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안에서 복있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인데, 이 약속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장래에 될 일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처럼 확실성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주실 것이며, 그 아들에게서 많은 자손이 나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모리아의 한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하면서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심’을 바라보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장래에 준비하신 제물은 짐승이나 곡물이 아닌 동서의 많은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는 ‘한 아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때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으로 주어졌으며,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여 이스라엘을 등장시키게 되지만, 그 이삭이 아브라함의 육정으로나 혈통으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들로 인해서 되어진 것처럼 장차 되어질 일인 ‘한 아들’에 의한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이런 까닭에 제사에 쓰여질 제물의 실체는 짐승이나 곡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준비하심으로 되어질 하나님의 아들로 되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제사의 율법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하실 일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그것은 말이죠.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이 희생됨으로써 흘려지는 ‘피’에 의한 약속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피 흘림에 의한 죄 사함’ 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일을 ‘피 흘림’으로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죄가 있는 한에는 계속해서 짐승이 희생되어야 하고, 피가 흘려져야 합니다. 율법에 의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 정죄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죄가 없는 때가 없으니 짐승이 죽어 피 흘리는 일은 결코 그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죄와 더불어 짐승의 희생적 피가 같이 존재합니다. 짐승이 희생되어 흘리는 피는 죄 있는 자가 당할 것의 대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짐승의 희생적 피는 죄에 대한 심판인 죽음의 형벌입니다. 그런데 그 짐승의 희생적 피는 대속의 성격을 띱니다. 그래서 그 피에 의해서 죄를 대신 담당하며 죄값을 치름으로써 죄인을 속죄하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啓示)하시는 것으로 모세의 율법 하에서 제사가 시행되었습니다. 이 제사는 실체가 아닌 다만 그림자요 모형이었으므로 실체인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자신의 몸으로 영단번에 제물로 바쳐질 때가 되는 때까지인 한시적이고 이스라엘에게만의 한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구약의 제사를 ‘제사(의식) 예배’라고 말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의식의 진행을 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경외(경배; 예배)하는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라는 말은 경외, 경배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왔습니다. 제사 제도는 율법(律法)이요 이것에 의한 의식(儀式)이기 때문에 제사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여 왔습니다. 이 제사 의식에 의한 하나님의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하시는 구속 사역에 대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살아계신 참된 신으로 섬기며 그분의 백성으로 있다는 것의 관계성이요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제사 의식에 의한 하나님의 예배는 이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의무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출생하는 자는 누구이든지간에 모두다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제사 의식에 의한 예배는 더 이상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림으로서 구약의 제사가 지닌 모형적 의미를 온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5장 5-6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신 것은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하셨고, 또한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멜기세데과 같은 위치에 서는 대제사장으로 세우셔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히5:10).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같은 지위의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히7:11, 15).
그런데 예수님이 이처럼 멜기세덱과 같은 지위의 새로운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신 것은 멜기세덱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혈통도 없고, 그래서 시작(출생)도 없고 끝(사망)도 없는 그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영원한 제사장 일을 맡아 수행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의 수행이 혈통과 전통을 따르는 옛언약인 모세의 율법은 완전히 폐지되고 그보다 더나은 새언약으로 행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므로 그의 대제사장직도 영원토록 맡아 수행하시는 것이어서 그 자신의 몸으로 단번에 드려져 희생하여 헌신제물이 됨으로 흘리신 피의 속죄의 공효는 영원히 미쳐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히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제사장의 등장이 필요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제물이 바쳐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제사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제사에서와 같이 날마다 제물로 바쳐질 짐승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단 한 번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구약 제사에서 날마다 바쳐져 희생되어서 피를 흘려야 했던 그 모든 일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히7장).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으시는 새언약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한정된 것이 아닌, 온 세상의 모든 사람, 곧 각 사람과 체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은 그의 언약을 돌판에 써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마음에 새겨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서 주가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옛언약 하에서 행해졌던 제사는 없어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구약에서 존재하였던 의문(儀文)에 속한 법일 뿐으로 그 누구에게도 구속력(拘束力)을 갖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드려졌던 제사 제도는 폐지가 되었습니다(히8장). 그러므로 제사의 행함 여부로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참조, 골2:16). 이것은 다만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골2L17).
이런 까닭에 구약의 제사에 의한 예배, 그러니까 제사 의식으로 드려오던 예배는 신약 시대에서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제사를 드리는 일 따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2. 예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흔히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는 것은 구약적 제사 개념에 의한 예배가 아닙니다. 신약 시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신 이 시대에서는 새로운 예배로 드려집니다.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교회의 모임을 가질 때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정해진 일정한 순서에 따라서 갖는 의식(儀式)을 예배라고 알고 있으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 의식에 의한 순서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 곧 예배드리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과연 이런 예배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교회에 대한 개념부터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교회를 처음 언급하신 것은 마태복음 16장 15-19절에서 인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알고 있느냐?’라는 물음에서 대답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알게 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신앙고백하게 하신 그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 ’내 교회‘를 너희에게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 주로 믿고 따르는 주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교회란, 주님의 교회여야 합니다.
이 교회는 음부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또한 이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여기서 음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이기지 못하는 권세이니까 교회는, 죽음을 이기는 권세가 있습니다. 교회가 죽음을 이기는 권세인 것은 교회가 다름 아닌 죽음을 이기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죽음을 이기는 근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신 후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그들의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교회인 참된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권세가 행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죽음에로 이끌고 가는 죄를 멸하시는 주님의 권세가 나타나지고 보여지는 곳이 믿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또한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가진 것과 연관해서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릴 것’(땅에서 잠가 둔 문은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인데, 이것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이다”(마10:32-33) 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며(요56:40), 이는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어집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말입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29). 그가 구원받은 것은 육체의 행위에 있지 않고 그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서 입니다(엡2:8). 따라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에는, 곧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주님의 권세가 있는 교회에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믿음도 함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교회, 곧 믿음의 공동체 입니다.
이 교회는 말입니다.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총체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여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적인 수’입니다. 이들은 하늘에 있든지 땅에 있든지 사방에서 모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신 자들입니다(엡1:10). 그런 까닭에 이 교회의 형태는 전혀 지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혀 땅의 속성을 띠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교회는 창세 전에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주신 자들이기 때문에(엡1:4-5) 신적인 기원을 가지며 지극히 천상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체적인 수’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된 몸이 된 교회의 본질이며, 정체입니다. 따라서 이 교회는 땅에서 생겨지지 않습니다. 이 교회는 하늘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르시는 일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 예배는 의식적(儀式的)인 것을 전혀 배제합니다. 구약적 제사 개념에서의 의식화된 예배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서 예배(경배)를 받으시는 것은 교회(의 모임)에서 의식에 의하여 드리는 예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배에 온갖 애를 씁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시킵니다. 무엇으로인지 아십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와 다릅니다.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 그리니까 의식을 좇아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교회(의 모임)에서 예배 의식에 의하여 드리는 의식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예배를 교회의 머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그가 받은 경배(예배)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만이 받으셔야 하는 것이기에 그 경배를 다시 하나님께 돌리는 일을 결코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의식을 좇아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알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이런 것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이렇게 예배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계신 사실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신령으로’는 ‘(하나님의)영’을 의미하며, ‘진정으로’는 ‘진리로’를 의미합니다. 이 ‘신령과 진정으로’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갖는 것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니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영)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예배를 원하신다. 이 예배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할 수 있게 되는데, 그 그리스도가 곧 너와 말하고 있는 나(예수)이다”(요4:23-26)에서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곧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배하는 형태란 예배 의식을 좇아서 하는 것이 전부인데요? 그러니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는 다른 무엇이 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의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이 있게 되며, 그래서 믿는 자들 안에 임재해 계신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져다 준 죄 사함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인 진리가 그들과 함께 하게 하며, 그래서 그들이 그 진리를 인하여 기뻐하며, 그 진리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로마서 12장 1-2절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진정한 얘배, 참된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은, 영과 진리로 하나된 세계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과는 다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말입니다. 매주일 교회로 연합하여 모임을 갖고서 예배 의식에 의해서 드리는 예배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두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며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믿는 자들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서 이렇게 할 필요성을 갖는 것 아닙니까? 만일 이 예배를 부정하며,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조심하며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참된 예배라고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고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의식의 순서에 의한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 의식을 좇아서 예배하는 행위 여부를 우리가 갖는 것으로 인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며 받으시는 것은 ‘영과 진리’인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서 아무리 예배 모임을 위하여 애쓰고 힘쓰며 열심을 가질지라도 이것으로서는 바리새인의 의를 이룰지언정 결코 천국의 의를 이루지는 못하는데,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인 영적 예배로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에서 우리가 한 예배의 모든 행위도 함께 받으시는 것으로 삼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임으로써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고 연보를 한 예배의 모든 행위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예배’ 속에서 함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다”(창4:4)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는데,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라고 아벨과 그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된 것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벨의 제물이 열납된 것은 그가 드린 제물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벨의 제물은 ‘그 믿음으로의 안에서’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예배’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진 예배의 모든 행위도 함께 받으십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쁨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즉 이것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로 보시며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지 못하는 그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또한 그분의 백성된 (죄인된)우리도 거룩한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된 자의 안에서 가져지는 예배의 모든 행위도 함께 하나님께서는 거룩으로 다루시면서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을 거룩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성에서 예배의 모든 행위를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찌어다! 라고 기도하며,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