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교회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다.
그 대신 죄인들의 공동체만 있을 뿐이다.
전세계 모든 마을과 도시에 주말마다 하나님앞에 모이는 공동체가 있다.
성령님께서는 그들을 모으고 그들속에서 자신의 사역을 행하신다.
이러한 죄인들의 공동체 속에서,
여러 죄인들 가운데 한사람을 목회자라고 부르고, 정해진 책임을 그에게 맡긴다.
목회자의 책임은 공동체가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도록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은 극도로 외면당하고 유기당하고 있다.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시 119:53)
이런 분노를 얼마나 많은 목회자가 공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몇몇 목회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들을 모두 합해도 그리 많은 수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명의 사람들은 과연 있을까?
소수 집단으로 분류 할 수있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을 까? 아마 있을 것이다.
가끔씩 그런 부류에 속한 이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또한 무수한 일 들이
소수 집단에 의해 성취되었다.
일시적인 이익을 얻기위해 목회자로써 얻는 영원한 유익을 팔아버리고
세상것에 연연하는 상점주인들 중에도 자신들의 소명을 회복하고픈
마음을 키워가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그들의 엄청난 잘못을 태워 버릴 만큼 완전히 불붙는 석탄이 되어,
다시금 하나님의말씀이 그들의 입에서 불이되게 할 수 있을까?
나의 분노가 그들이 지닌 석탄에 불을 붙이는 풀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목회 사역가운데 세가지 행동은 기초적이고 중요하며 모든 목회 사역의 모양을
결정한다. 세 가지 행동이란 기도,성경읽기,영적지도다.
이러한 행동들은 목회사역의 기초이지만 아주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 진다.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아 종종 무시 되기도 한다.
목회행정이 실행되는 소란한 현장에서 그런 행동에 몰두 하라고 목회자들을 향해
소리지르는 사람도 없다. 다른 사역에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목회 사역을 수행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교인들은 신앙적으로 근면하지 않고 누군가를 판단할 능력이 없으면서 목회자를
판단하고 사례를 지불하기도 한다. 목회자들이 그런한 행동을 하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런일에 힘을 쏟느냐고 묻는 경우도 거의 없기때문에, 위에서
말한 목회의 세가지 중요한 행동은 광범위하게 무시 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의 행동이다.
성경읽기는 2천년동안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활동에 대한 관심의 행동이다.
영적지도는 어느 주어진 시간에 내 앞에 있는 특정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관심을 쏟는 행동이다.
..
세가지 행동가운데 공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말은 어는 누구도 목회자가 그런 행동들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수 없다는 의미다. 교인들은 목회자가 예배중에 드리는 기도를 듣고,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내용을 들으며,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들은 목회자가 그런 행동들 가운데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는지 결코 알수 없다.
하나님에 대해 겉으로만 표현하는 공적인 관심이상의 헌신된 마음을 품지 않은
상태로 상당히 고상한 목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목회세계에 들어서서
그리 오랜시간이 흐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목회자들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면서 그런 관심의 행동들을 게을리 할수 있다.
또한 각각의 행동들은 엄청난 엄격함을 수반 한다. 따라서 목회자들이 그런 관심의
행동들을 소홀히 여기는 현상은 별 어려움 없이 보편화 되었다.
[유진 피터슨/'균형, 그 조용한 목회혁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