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미리보기 II. 노예의 개념 1. 노예는 누구인가? 2. 노예의 특징 3. 노예, 노예제, 노예제 사회 4. 노예제의 여러 형태 III. 로마 이전의 노예제 1. 미케네 시대의 노예제2. 그리스 시대의 노예제 IV. 로마노예제도의 발달 1. 노예제에 대한 학습 2.초기 로마사회의 노예제 3. 노예제의 확산 4. 노예경제시대 (노예제 사회로의 진입) V. 로마노예들의 생활 1. 노예의 공급 2. 노예입법의 정비 3. 노예와 주인의 관계 4. 노예졔 사회에서의 일과 처우 VI. 맺는 글 <각주> <참고문헌>
I . 미리보기
노예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이유를 가지던 사회가 성립되면서 존재하기 시작했다. 고대사회는 그러한 인식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공인되면서 노예제가 본격화되었고, 특히 로마는 그러한 노예의 생산성이 사회구조 전체의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른 고도의 '노예제 사회'였다 따라서 노예가 없는 로마는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로마에서 노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게된, 그리고 상상하고 있는 로마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로마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로마를 가능하게 한 고대 노예, 노예제, 그리고 노예제사회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고대세계에서 노예가 어떤 의미와 형태로 존재했는지, 그리고 로마에서의 노예제의 발달과정과 그 속에서의 노예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그 이전의 고대세계에서의 노예제와의 비교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II. 노예의 개념
1. 노예는 누구인가?
1) 고대의 노예관1)
노예제가 전형적으로 발달한 고대에서 노예의 인격은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노예는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일종의 살아 있는 재산'(아리스토텔레스),또는 '살아 있는 도구'로써 '생명이 없는 노예'인 도구와 대비되었다. 노예를 이렇게 정의할 경우 가축과 구별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 로마에서는 도구가 세가지로 나누어진다. 본래 의미의 도구는 '말하지 못하는 도구', 가축은 '반쯤 말하는 도구', 그리고 노예는 말하는 도구'였다. 로마법은 노예를 소유의 객체인 物로 하여 노예신분을 '자연에 반하여 한사람의 인간이 타인의 소유권 하에 예속되는 만인법상의 규정'이라고 하였다.
2) 근대의 노예관2)
노예를 도구나 동산의 일종으로써 다른 동산처럼 소유의 객체로 간주하는 이 노예개념은 고전적인 노예규정으로써 기본적으로는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철저한 인격부정은 다른 인간에게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노예만이 유일하게 '物'인 인간이었다. 이것은 인간차별의 극한으로서 모든 차별의원형이었다. 노예란 육체, 인격과 몸까지 몽땅 타인의 소유물이 된 인간이었다.
아메리카의 흑인노예에 대하여 레스터(Julius Lest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예란 자동차, 집, 책상 등이 소유되는 것처럼 다른 인간에 의해 소유되고 팔려 갈 수 있는 재산의 일부로써 살아간다.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팔려 가는 자식, 남편과 떨어져서 팔려 가는 아내) 인간으로서 생각되지 않으며 '物'로써 생각된다. 이 '物'은 밭을 갈고, 나무를 베고, 음식을 요리하며, 타인의 아이들을 양육한다. ' 로마법의 노예개념이 근대 아메리카의 남부 여러 주에서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3) 로마의 노예관
로마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인 자유인과 명백히 구별되는 노예의 지위를 법적으로 규정하였다. 로마법상의 다음 규정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3)
자유(libertas)란 어떤 사람이, 만약 무력이나 법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이다. ① 노예상태는 만민법상의 제도로써 한 인간이 자연적 질서에 반하여 타인의 소유권에 들어간 상태이다. ② 군사령관들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매각하므로 포로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살려주기(servare : 목숨을 살려주다) 때문에 노예들(servii)이라고 불린다. ③ 재산으로서의 노예들을 지칭하는 단어(mancipia)는 노예들이 적으로부터 무력(손)에 의해 사로잡힌(manucapiantur) 사실로부터 나왔다.
2. 노예의 특징4)
1) 노예는 출생집단으로부터 뿌리뽑히고 개별화된, 그래서 주인에 대해 무력한 자이다.
노예는 포로로 잡히거나 기타의 방식으로 노예화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혹은 공동체로부터 보호와 도움도 받을 수가 없게 된 사람이다. 특히 고대세계에서는 전쟁에서 패배한 자에 대한 모든 권리가 승리자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생명조차 타인에게 맡겨진 셈이 된다. 이처럼 포로로서 주인에 대해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절연되어 주인의 자비 이외에는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예화는 '유보된 죽음'과도 흡사한 인간운명의 극적인 전환이었던 것이다. 원초적으로 볼 때 그가 노예로 전락한 것은 이처럼 자기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개별화됨으로써 상대에 대해 무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 노예는 전형적으로 외부인(outsider)이다.
주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애초부터 외부인이요 적대자이지만 노예화된 뒤에도 변함없이 그 상태가 지속된다. 그는 해방이 되지 않는 한 결코 주인의 공동체의 성원이 될 수 없었다. 많은 고대국가들의 인구구성은 내부인(공동체의 공식 성원)과 외부인으로 대별되거니와 노예는 내부의 외부인이요 잠재적인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노예가 대부분 외국인이라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내부인 출신이 노예화되는경우도 있었지만 그 경우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3) 노예는 재산이다.
노예가 인간인 동시에 소유물이요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눈에는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나 고대인들에게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른바 家財노예는 다른 가축이나 도구처럼 재산으로 인식되고 상품으로서 매매의 대상이 된다. 始原적으로 노예는 전쟁포로로서 살해되는 대신 잡혀온 사람이었을 것이지만, 그리스의 경우 기원전 8세기말에서 7세기초에 해당하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대에 이미 노예는 일정한 값을 주고 구입된 인간상품이었다 주인은 자기가 소유한 노예에 대해 배타적인 권리를 소유하였다.
3. 노예, 노예제, 노예제 사회
1)구분의 기준5)
노예들은 그들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노예제는 무엇보다 하나의 사회제도이며, 단적으로 말해서 주인과 노예간의 물리적, 법적, 제도적 관계를 일컫는 개념으로 똘 수가 있다. 이 같은 관계가 공동체나 국가의 관습 혹은 법에 의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때,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으로서의 노예제(slave system, institution of stately)가 되는 것이다.
사실상 노예제는 인류의 문명사회와 함께 나타난 오랜 유래를 갖는 까닭에, 이를테면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이전의 아프리카 사회나 호메로스 시의 세계와 같은 상당히 초보적인 사회에서도 이미 노예제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초기 왕국들과 고대이집트, 구약성경에 나오는 초기 히브리 사회에서도 이미 법률적, 사회적으로 규정된 노예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회에서는 노예가 전체 사회구조 내에서 노예가 차지한 역할이나 기능이 단지 부수적인 중요성을 지녔을 뿐이기 때문에 그냥 '노예를 보유한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노예제 사회(slave socity)'는 단지 노예를 보유하였을 뿐인 사회와 구별하기 위하여 근래에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 역사상 노예제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르러 그 사회경제기반이 될 만큼 질적으로 고도화되고, 양적으로 팽창하였다.
시민단의 지배체제가 강화되어감에 따라 그들의 삶을 됫받침 하는 노예들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시민과 노예, 내부인과 외부인, 자유인과 예속민으로 나눠지는 구조적 이분화와 그에 따른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노예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경제적 측면이다. 노예들이 담당하는 경제적인 역할과 기능이 그 사회에서 근본적인 의미를 갖게될 때, 우리는 그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대사회의 지배계급은 무엇보다 노예소유자들이었으며, 그들의 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노예노동에 있었다.
또한 고전고대의 전형적인 문화가 발전한 곳이 노예제가 발전한 지역과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는 노예제와 고대문화의 불가분의 연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고대세계에서 노예제를 제거한다면 사회 전체를 붕괴시켰을 것이라는 점에서 고대사회는 노예제 사회였다.
2) 로마는 어느 단계였는가? 6)
로마는 노예제 사회였는가?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노예의 인구수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노예인구의 추정은 사료의 부족과 방법론의 차이로 인해 쉽게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우나, 논의를 통해 최소한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기원전 220년경에는 노예인구가 30만에서 60만 정도이고, 기원전 43~42년경에는 200만 내지 400만으로 급증하여 노예/총인구 비율도 33%이상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예제 사회에 대한 정의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로마사가들이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준, 즉 '노예가 전체 인구의 최소한 20%이상에 달하고, 노예노동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회'에 기원전 2세기의 로마가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로마노예제 사회의 등장 배경7)
기원전 2세기이래 로마의 지속적인 정복전쟁은 농민의 장기 군복무에 따른 농지의 황폐화, 잇따른 농민의 토지상실 및 도시빈민화를 초래한다. 그러나 정쟁의 승리와 정복 및 지배는 주로 로마지배층의 수중에 거대한 지배의 산물(전리품, 부당착취에 의한 화폐)을 집중시킨다. 지배층은 이렇게 형성된 거대한 자본을 고대적 부의 일반적 관념에 따라 이탈리아의 토지에 투자하여 토지소유의 점진적 집중을 초래한다.
이렇게 형성된 대농장의 직접 생산자로는 소작농이 밑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하에서 전쟁포로가 도입되어 핵심적인 노동력을 구성한다. 이로써 증가한 농산물은 기원전 1세기말에 이르러 100만(또는 80만)의 인구규모를 가진 로마시의 빈곤시민으로 형성된 대규모 소비시장에서 거의 소화되고, 그 밖의 잉여생산물은 속주 지역으로 퍼져나가, '지중해 시장'을 발전시킨다.
한편 지배층은 수중에 축적한 거대한 부를 정치적 지지와 교환하여 로마시에서 낭비하고, 그것이 일시적으로 도시빈민의 생활을 지탱하지만, 부의 불균형과 실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결국 농지를 떠난 시민에게 고용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군복무와 퇴역후의 토지할당 뿐이며, 이것은 마침내 이탈리아내의 토지할당내의 토지몰수, 즉 내란을 초래하고, 이후에는 해외속주에서 해결책을 추구하게 되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를 정점으로 한 해외식민지 건설에서 그 활로를 찾게 된다. 그리고 내란 동안 싸운 장군 역시 자기의 정치적 세력과 그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정복전쟁에 힘을 쏟게 되고 이것이 로마 지배의 확대와 강화를 초래한다.
한편 이 와중에서 급증한 이탈리아의 200만 또는 300만이라는 노예수는 당시의 로마제국의 추정 총인구 5,000만의 4~6%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바로 이탈리아에 집중되어 농업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에, 결국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노예제사회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4. 노예제의 여러 형태8)
1) 가부장제의 노예제
노예소유는 동산소유의 한 형태로써 이미 원시사회 내부에서 발생했다고 추측된다. 그리고 그 소유의 주체는 아주 옛날은 씨족 또는 종족 등 씨족제적 공동체였을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다른 공동체 성원을 포로로써 집단적으로 사역하는 형태를 지녔음에 틀림없다. 씨족제의 분해과정에서 가부장제 대가족 내지 복합가족이 되었다.
계급사회 발생으로 인한 국가가 형성된 과정에서의 지배적인 가족형태는 바로 이것이었는데, 이 가족의 내부에 부의 일부인 노예가 도입될 수 있었던 노예제를 가부장제적 노예제라고 부른다. 즉 원시사회로부터 계급적 사회구성에로의 이행기에 성립하여 동산적 부의 한 구성요소로서 이 발전의 촉진제로 기능한 것이 바로 가부장제적 노예제였던 것이다.
2) 가내노예제
가내노예제는 가부장제적 노예제의 분해로부터 생겨난 것이므로 거기에 본질적 차이는 없는 것 같지만, 노예의 취급방법은 일반적으로 가부장제적 노예제 쪽이 온정적이며 가족성원과 그다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양자를 구별하는 이유는 가부장제 대가족 또는 복합가족이 지배적인 시대는 사회구성사적으로 보아 가내노예제가 일반화된 시대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에 속했던 것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내노예제가 가장 광범위하게 발생했던 것은 고전고대 폴리스 국가의 번영시대였으므로, 보다 광범위한 국가형성과정에서 가족형태와 노예제의 존재방식을 고려한다면, 가부장제적 노예제를 가내노예제와 구별하는 것이 보다 혼란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적 노예제와 가내노예제 모두 애완용 여자노예나 가사, 유가, 가내수공업용 여자노예 외에 농업, 목축 등에 쓰여지는 남녀노예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가부장제적 노예나 가내노예는 노동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3) 노동노예제
다수의 노예를 오로지 생산노동을 위해 모아놓은 수공업 제작소나 대농장에서 일하게 되어 있는 노예제를 노동노예제라고 부른다. 광산업자 등에게 대여하기 위해 다수의 노예를 양육하는 노예대출업자의 노예제를 포함하여 기업노예제라고도 부를 수 있다. 노예제의 발전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서는 이상의 세 가지 형태를 구별하는 것이 유효하다. 왜냐하면 이들 세 가지 형태는 사회구성사적 의미에서 각각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III. 로마 이전의 노예제
1. 미케네 시대의 노예제
노예들과 관련된 최초의 문헌적 기록은 기원전 13세기 이전 미케네 왕국의 궁정들에서 사용된 線문자 B서판들에 나온다. 거기서 도에로(doero, 여성형은 doera)로 기록된 사람들의 부류는 궁정이나 신전, 그리고 개인에 속한 노예들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들이 어떻게 노예화되었으며, 그 숫자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리고 그들의 신분적인 지위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의 내용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파악이 어렵다.
아무튼 크레타의 유서 깊은 크노소스(Knossos)와 호메로스 시에서 네스토르(Nestor)의 왕국으로 이름난 필로스(Pylos) 등지에서는 노예들로 보이는 노동자들이 모직물 작업장과 대장간 따위에 수십 명씩 집단적으로 사역되었음을 보여 준다.9)
1) 선문자 B문서의 증거로 보면 미케네 시대의 왕국들에서 최대의 노예제는 왕궁노예제로써 거기에는 가사, 육아, 가내수공업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전업집단으로 나누어지는데 여자와 소년, 소녀가 가장 많았다. 이들 집단 중에는 '밀라토스 여인들', '키오스 여인들', 처럼 지명에서 유래한 총칭(그들 지역에서 약탈되었거나 구입된 것으로 보인다. )외에 '포획된 여인들'이라는 명칭도 보이는데 지명에서 유래한 여자 노예는 그 지역에서 매입된(화폐는 출토되지 않았으므로 무언가 특산물로써 교환되었을 것이다) 것임을 시사한다.이 왕궁노예제는 호메로스에게서 보이는 왕궁노예보다도 규모가 크고 노동편성도 정비되어 있으나 그 본질은 마찬가지로 가부장제적 노예제라고 할 수 있다.
2) 미케네 시대 노예제의 중요한 제2의 형태는 필로스 출토의 토지문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신의 남자노예', '신의 여자노예'로 불리는 일군의 남녀 농업생산자다. 그들은 일종의 종교적 단체의 구성원의 일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적 사적 토지보유가 극히 영세한 것과, 남녀를 나란히 토지보유자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농민이 아니라 다소 자연발생적인 자기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인위적으로 종교집단의 농업생산으로 결집된 노예로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형태의 노예제도 왕궁노예제처럼 특수한 제도여서 공납촌락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신의 노예'의 존재방식은 언뜻 보면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와 유사하지만 헤일로타이가 예속농민의 한 형태임에 대해 '신의 노예'는 노예였다는 점에서 헤일로타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3) 왕을 제외한 지배층의 노예소유도 약간의 증거로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데 필로스왕국의 가축징수관 같이 현저한 활동을 보이는 자들 중에서 안피메데스라는 자의 노예가 공동체의 공유지로부터 한 조각의 토지를 빌리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가축징수관인 웨다네우스라는 자의 노예는 얼마간의 토지보유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로써 공납촌락의 수장층에게도 어느 정도 노예소유가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4) 이들 외에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수공업자가 한두 명의 노예소유자로서 보이는 것이다. 필로스 출토의 구리 배급문서에 나타난 촌락의 대장장이 중에는 그때 배급을 받은자 외에 배급을 받지 못한 자가 있는데 후자 중에는 종종 '누구의 노예'라고 쓰여져 있다.5)
이 같은 미케네 노예들의 특징은 대부분 궁정경제, 그 가운데서도 궁정에 딸린 제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과, 노예와 자유인의 신분적 차이가 그다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왕국의 경제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농업부문은 다모(damo)라고 하는 일반백성들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자유민이었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법률적 지위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노예노동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생산의 작은 부분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볼 때 이 사회가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10)
더욱이 미케네의 노예제의 후대의 그리스에 의해 직접적으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미케네 문명의 불가사의한 몰락과 더불어 노예제의 흔적도 거의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 노예제는 미케네의 노예제와는 별도로 기원전 8세기 이후 새로운 사회경제 내에서 발달하였다.11)
2. 그리스 시대의 노예제
가장 폭넓은 사각에서 볼 때 노예제는 그리스 문명의 기본적인 요소였다. 왜냐하면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폐지하고 자유노동으로 대체하려는 생각을 갖고 그렇게 시도했다면, 전체 사회가 와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상층계급이 누린 여가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12)
1) 그리스 노예제의 발전
①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드모에스, 암피폴로스, 오이케에스, 둘레 등 다양한 명칭의 예속자들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들은 모종의 신분적 차이를 나타낸다기 보다는 직능상의 차이나 출신(내부인 혹은 외부인), 또는 단지 문맥상의 필요에 따라 시인의 임의로 사용된 용어일 뿐이다.
이들은 전쟁포로, 약탈, 유괴 등을 통한 예속화의 과정을 거쳤으며, 갖가지 노동에 종사하였던 점에서 그 후의 고전기 노예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존재한 사회경제적인 맥락과 의미는 판이하였다. 이를테면 그것은 '가부장적 노예제'였던 것이다.
호메로스 시의 세계는 국가가 발달하기 이전에 유력한 가문 오이코스의 우두머리들이 각 지역에서 할거하던 시기였는데, 노예들은 유력한 가문에 소속되어 가장의 보호와 권위 하에서 그 구성원의 일부로서 간주되었다. 그들이 신분상으로 노예였음은 분명하지만 주인의 가솔이었으며, 기실 가장과 가솔간의 온정적인 결속이 그 중요한 특징이 되고 있다. 이들 노예들은 부유한 가정, 특히 바실레우스(vasileus)라 불린 귀족층에 집중되어 있었다.
2. 그러나 유력한 가문에 국한된 좁은 가정적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 같은 '가부장적 노예제'는 기원전 7~6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폴리스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노예제가 가정적 제도로부터 사회적 내지 국가적 제도로 이행하게 된 것이다. 사실 노예제의 발달은 시민단이 지배하는 폴리스의 성장, 시민의식과 시민들간의 결속을 바탕으로 하는 중장보병전법의 대두, 식민활동과 상공업의 바다 등으로 대표되는 고졸기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발달과 궤를 같이하 일련의 혁신들 가운데 하나였다.
③ 기원전 594년 솔론의 개혁에 대한 사료는 노예제 사회로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현재 남아있는 솔론의 시문들에서 보이는 그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부자들에게 예속화된 토지와 노동을 해방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예속화된 토지라 하는 것은, 이를테면 공한지의 선점에 따른 권리주장이나 저당권 설정 등으로 인해 실제 경작 농민의 토지 소유권이 제약받고 있는 토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예속화된 노동이란 소작료나 지대로1/6을 바쳐야 하는 자들, 즉 헥테모로이(hectemoroi)와 펠라타이(pelatai), 그리고 인신을 담보로 빛을 진 아테네인들의 노동을 일컫는다. 이들을 예속상태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함은 종전에 부자들이 그들을 모종의 형태로 예속아래 묶어두고서 그 노동력을 이용하던 방식을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부자들이 이들 내부적 예속민들의 도움 없이 어떻게 그들의 넓은 토지를 경작하고 많은 가축들을 사육할 수 있었을 것인가? 노예제야말로 바로 그 적절한 대안이었다.
4. 그러나 노예제 사회가 솔론의 개혁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갑작스레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을 뿐, 그 자체가 노예제 사회로의 이행을 낳은 추진력은 아니었다. 솔론 이전에도 노예노동은 흔하였으며 그 숫자도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을 것이다. 당시 부자들이 지배하던 예속노동자들은 내부인(즉 아테네인)출신과 외부인 출신 등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헥테모로이나 펠라타이 같은 내부인 출신자들은 자신들이 외부인 출신의 가재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였음을 알게 되자 더욱 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중들이 가장 비통해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그들의 노예상태였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이점을 시사한다. 이들이 유혈사태 없이 부자들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노예노동이라고 하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5. 정치적인 면에서도 노예제의 비전을 추론할 수 있는 변화가 있었다. 그 당시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참주정을 거쳐 민주정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추세에 있었는데, 이 같은 시민단 내부의 민주화는 솔론 개혁의 예에서 보듯이 부자들의 손에 예속화되었던 하층 주민들의 신분적 해방과 상승, 그리고 무거운 노동으로부터 벗어남을 조건으로 했다. 이 두 가지 조건은 노예제의 발전에 의해 충족될 수가 있었다. 구조적으로 민주정의 발전을 위한 시민단의 민주화는 노예제의 확대와 함께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 타당성을 갖는다.
6. 한편 기원전 5세기초에 일어나 페르시아 전쟁은 솔론 이래 전개되어온 노예제 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여러 모로 완결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 전쟁이 파생시킨 노예는 그리스 노예제의 양적 팽창에 기여했다. 한편 공포의 대상이었던 페르시아인들과 싸워 이긴 결과 그리스인들의 민족적자부심과 함께 이민족(barbaroi)에 대한 우월의식이 확고하게 되었다. 아테네인들의 문화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과 페르시아 고위관리인 태수조차 왕의 노예로 일컫는 페르시아의 그 전제적 체제와 관습이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노예화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7. 페리클레스에 이르러서 전성기에 도달한 아테네 민주정과 그 문화적 성취는 동맹국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탈로부터 기인한 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노예제의 발전이 그 밑바탕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시민들의 정치 ·군사적 활동과 문화적 업적은 무엇보다 노예제가 제공한 경제적 잉여와 여가 덕분이었다는 점에서 고전기 그리스 문명은 노예제에 기초하였다고 할 수 있다. 13)
2) 노예의 공급방식 14)
고전기의 그리스인은 전쟁에서 포로가 될 경우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 또한 남자들은 살해당하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노예가 된 도시들의 예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전리품만으로는 필요한 노예의 숫자를 채울 수가 없었다. 노예들은 주로 노예상인들을 통해 외부세계(동방의 노예시장)에서 공급되거나, 또는 비(키)그리스인들의 전쟁에서 승리자들이 팔아치우는 포로들이 주요공급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는 실제로 헤로도토스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트라케의 부모들처럼 주저 없이 자기 자식을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미숙련 노동력의 상당수가 북방의 트라케나 프뤼기아로부터 공급되었으며, 보다 숙련된 노동력은 주로 시리아와 동방에서 공급되었다. 노예공급이 풍부하고 가격도 비교적 쌌다는 점은 고전기 아테네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실이었다. 보통의 노예 한 명의 값이 일년간의 노예부양비를 크게 넘지 않았다.
3) 노예의 효용성 15)
그리스의 노예 대부분은 가사노동에 투입되었다. 보통 작은 토지를 경작하는 가족조차 노예를 소유했다. 이러한 전형적인 소경영 단위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함께 일했으며, 가사노동이나 농업노동의 구별 없이 모든 일에 노예들의 손길이 미쳤다. 그래서 공공건물의 건축공사장에서는 시민과 거류외인, 그리고 그들의 노예들도 모두 작은 작업단위를 이루어 함께 일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작업에서는 모두가 같은 임금을 받고 같은 종류의 일을 했지만 노예의 임금은 주인에게 돌아갔으며, 이러한 임금과 노예부양비의 차액이 주인의 이윤이었다.
소득을 얻는 또 다른 일상적인 방식은 노예에게 나름대로 사업을 하여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되 일정액을 주인에게 바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특히 아테네에서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거기에서는 이러한 조건으로 잃는 노예들에게 '別居)'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눈에 띄게 성공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방식은 자유민 고용주에게 노예를 빌려주어 노예부양비를 그에게 책임지게 하고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일정액을 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작은 규모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들은 대규모로 투자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대규모의 노동력을 고용하는 청부업자도 존재했다. 즉 그것은 노예노동이 광범위하게 이용된 리루리온의 은광산 같은 곳이었다.
그리스 세계의 다른 광산들처럼 아테네의 광산들도 대체로 국가소유였다. 민주정치하의 아테네정부는 민주적인 정부답게 그것들을 민간사업가들에게 대부분 아주 소규모로 단기간씩 불하했다. 불하 받은 사업가들은 자신들이나 이웃들의 갱외 설비를 이용하여 운에 따라 이익을 취하고 국가에 사용료로 지불했다.
채굴권을 판매한 행정관들의 기록은 기원전 367년과 307년 사이의 것이 부분적으로 돌에 새겨져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많은 아테네 유력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들이 차지하는 이윤의 규모는 계산이 쉽지 않지만, 국가소유의 노예를 광산업자들에게 임대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던 크세노폰은 니키아스와 그 밖의 민간인 노예소유자들이 맺은 계약을 근거로 노예 1인당 1오불로스씩 어김없이 벌어들일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그리하여 6,000명의 노예노동력을 임대해주면 일년에 60탈란트의 소득을 올릴 것이다. (이것은 60척 함대의 노수들의 두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4) 노예제와 고대세계의 기술발전의 정체성의 관련성l6)
왜 고대세계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또는 노예제가 이러한 명백한 기술상의 지체현상과 관련이 있는가 하는 의문들이 종종 제기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의문은 산업혁명 이전의 어떤 문명에 대해서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제가 기술정체의 유일한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노예제는 그 원인의 일부분이었다. 값싸게 수입해온 노예들은 아테네의 상류계급이 생계를 위한 경작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야 할 필요성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찬양해 마지않는 문명의 결실을 거두는데 꼭 필요한 여가를 제공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정신과 취미를 만족스럽게 발휘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다시 한번 그러한 여가의 근원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시킬까 하는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교육받은 아테네인들이 여가를 즐길 수 없는 육체노동을 점점 천하게 여기게 된 것은 그러한 사정과 표리를 이룬다. 경제조직의 수준이 낮았던 까닭에 노예제로 인해 제기될 수 있었던 또 다른 복잡한 문제, 즉 노예노동에 의해 자유민의 임금이 하락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제조업자들이나 지주들 가운데 그러한 임금인하로 실질적인 이익을 거둘 만큼 큰 경영 규모를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로마의 라티푼디움처럼 대규모의 노예집단이 토지를 경작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5) 그리스 노예의 생활17)
① 노예에 관한 법률의 특징
노예제가 발전한 그리스 도시들은 다음 세 가지 목적을 위하여 노예관련 법률들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노예의 자유인간의 근본적인 구별을 유지, 강화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로는 주인들에게 노예에 대한 커다란 통제력을 부여하고 노예들이 해로운 행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것이며, 셋째로 그들의 노예들에 대한 주인들의 권한에 얼마간 제한을 둠으로써 노예들에게 약간의 법률적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예제와 관련된 폴리스의 법률조항은 인간 이하의 재산이자 완전한 '외부인'인 동시에, 적어도 얼마간의 '인간성'을 가진 존재라는 이중성을 보여 주고 있다.
② 노예에 관한 법률이 갖는 의미
노예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조치들은 그들을 비록 열등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 간주하는 어떤 관념을 반영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도적인 차원의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노예는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도 노예에 대한 주인의 무제한적인 권리는 국가에 의해 규제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지나친 학대는 사회적으로도 이로울 것이 없었다. 충직하고 헌신적인 노예들에 대해서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두는 것이 그들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데에도 유리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③ 가장 효과적인 노예통제정책 - 개별적인 해방
개별적인 노예해방도 역시 노예제를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보호장치들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재산으로부터 법적인 인격을 갖는 인간이 되는 신분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제도적 장치들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해방이야말로 노예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이었으며 최후의 목표였다. 주인은 봉사에 대한 대가로서, 혹은 인도적인 동기에서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동기는 노예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하는데 있었다. 노예에게 자유의 희망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노예의 효율적인 이용에 관심 있는 사람의 기본원칙이었다. 그것은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게 복종하고 헌신 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요 자극제였다. 노예해방은 주인이 노예를 지배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선택적인 해방은 주인들에게 여러 가지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많은 노예들은 나이가 들어 노동력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해방되었다. 늙거나 병든 노예는 먹여 살리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매매가에 준하는 돈을 받고 해방시키는 것이 오히려 일거양득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점은 로마의 노예관리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④ 해방 후의 생활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일단 해방이 되면 시민단에 통합되는 로마의 경우와는 달리 해방된 뒤에도 시민단에 통합되지 않았다. 그들은 법적으로 거류외인 신분이었으며, 따라서 대개 이전의 주인이었던 아테네인을 그의 법적인 후견인으로 하고 거류외인세 (남자는 연 12드라크마, 여자는 6드라크마)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보통의 거류외인 신분과는 달리 전 주인에 대해 파라모네(paramone)협약이라고 하는 일종의 봉사의무를 지고 있었다. 주인과 맺은 이 불평등한 협약에 따라 노예는 해방된 뒤에도 일정기간, 대개는 전 주인이 사망할 때까지 그 전 주인의 '곁을 지켜야(paramenein)' 했으며, 연중 정해진 날수 동안 그의 전 주인을 위해 일손을 제공해야 했다. 이처럼 해방은 조건부였고 만일 해방노예가 그 조건을 어겼을 경우에는 심하면 해방이 철회될 수 있었다. 그나마 젊은 시절에 이 같은 자유를 살 수 있었던 노예들은 대부분 '별거하는' 상인, 장인, 예능인들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⑤ 저항과 억제 수단
그리스 국가들은 노예제를 유지하고 때로는 강화하기 위해 노예해방을 포함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와 수단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의 저항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노예들이 호소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고의적 손상행위(사보타지), 도망, 반란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직접적 강제에 의존하는 노예노동의 특성상 노예들을 완전히 복종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꾀병, 도구 부수기, 도둑질, 태업, 가축 학대 등 극히 은밀한 것으로부터 방화, 자해, 주인이나 감독에 대한 폭력, 도망 등 보다 심각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저항의 형태는 다양하였다.
이에 대해 주인들은 굶기거나, 가두고, 족쇄를 채우고, 매질로써 대응하였다. 노예들의 도망은 커다란 재산상의 손실을 초래하고 치안상의 문제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도망노예를 숨겨주는 것은 심각한 범죄에 해당했고, 붙잡힌 도망노예는 낙인이 찍히고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주인들은 서로간에 제보를 하는 등의 협력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체포한 노예들은 당연히 원래의 주인들에게 돌려보내졌다. 주인이 개별적으로 돈을 주고 도망노예 사냥꾼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사실 노예들은 도망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긴밀하고 배타적인 공동체들이 지배하는 적대적인 세계에서 숨을 곳이 별로 없었고, 대개 목적지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용케 그 도시를 벗어난다 해도 언제 어디서 또다시 포획될지 모를 일이었다. 도망보다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은 반란이다. 그리스의 경우, 순수한 노예반란은 키오스에서 단 한 차례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규모나 파급효과 면에서 기원전 140에서 70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로마노예의 대반란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로마의 노예반란은 대규모의 정복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노예들의 유입, 노예노동을 사용하는 대농장들(라티푼디움)의 발달, 풍부한 공급에 의해 뒷받침되는 가혹한 착취 등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특수한 사정에 기인하였다. 그리스의 경우, 중소규모의 농장들이 대부분이었고, 대규모 유입의 형태가 아니었으며, 로마처럼 특정장소나 지역에 동일한 출신지의 노예들이 집중적으로 가혹하게 사역된 예가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분산 고립되어 있으며, 출신지역의 상이로 말미암아 서로간에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노예들로서는 반란을 조직화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들의 저항의지를 꺾는데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가장 가혹한 폭력과 쇠사슬로부터 노예들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선별적인 대우에 이르기까지 노예들의 저항을 막고 유순하게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들이었다.
해방에 대한 희망, 노예감독이 되거나 보다 나은 음식에 대한 기대, 여자노예와의 동거 허용 등의 유인책들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의지하는 인간의 내재적 경향은 노예들의 저항의지를 내면으로부터 꺾는 요인이었다.
IV. 로마노에제도의 발달
1. 노예제에 대한 학습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