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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의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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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투 벌인 금붕어의 비극 


작은 어항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 둘은 서로를 미워하면서 툭하면 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대판 싸웠다.결국 그중에서 많이 다친 금붕어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살아남은 한 마리는 이제 혼자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며칠 뒤 그 금붕어도 죽고 말았다. 죽은 물고기가 악취를 내면서 몸이 썩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이 우화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사람은 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야 한다. 한자의 사람 인(人)을 생각해보라.서로가 서로를 받치고 있는 형상이 아닌가?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믿어야 한다.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고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작이 떨어져 있으면 화력을 낼 수 없지만 함께 포개지면 큰 화력을 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우리들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더욱 배려해주자. 
/박상훈 목사(국민일보) 

▣ 세 마리의 개구리 

무지개 연못 한가운데 작은 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연못가에는 조약돌들이 깔려 있고 잡풀들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그 섬에는 툭하면 싸우는 개구리 세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이 샐 때부터 공연히 옥신각신 말다툼을 했습니다. "연못에 들어오지 마. 이 물은 내 거야." "그 섬에서 나가 그 땅은 내 거야!" "공중은 내 거야." 그런 식으로 계속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서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가 쳤습니다. 섬은 순식간에 물줄기에 휩싸이게 되었고 빗줄기가 하늘을 메우더니 연못은 흙탕물이 되었습니다. 물이 불어나서 섬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개구리들은 춥고 겁이 나서 덜덜 떨었습니다. 그들은 거세게 출렁이는 시커먼 물 위에, 아직 솟아 있는 몇 개 안되는 미끄러운 바위 위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바위들도 곧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못에는 바위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개구리들은 모두 그 위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셋이 그렇게 붙어 있으니까 점점 무서움은 덜해지고 함께 희망을 나누게 되자 마음이 든든해졌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자 연못의 물이 조금씩 빠지더니 다시 연못은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은 이제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생명의 삶 

▣ 네 마리의 황소 

이솝 우화 중 네 마리의 황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들판에 네 마리의 황소가 한가롭게 뛰놀고 있었다. 황소는 풀을 뜯을 때나 잠을 잘 때도 늘 함께 할 정도로 친했다. 위험이 닥치면 서로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다. 그런데 사자 한 마리가 황소들을 호시탐탐 노렸으나 네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힘에 겨웠다. 어느 날 사자는 약간 뒤쳐져 풀을 뜯는 황소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보더라.” 
사자는 다른 소들에게도 차례로 거짓말을 했다. 그때부터 네 마리의 황소는 서로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황소들은 서로 세 친구가 자신을 왕따시킨다고 생각했다. 결국 황소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사자는 황소를 공격해 네 번의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사자는 황소의 마음에 불신의 씨앗을 던져 공격을 가한 것이다. 사탄의 전략도 마찬가지다. 사탄은 가정(혹은 교회)을 허물기 위해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신의 씨앗'을 던진 후 무너뜨린다. '사랑'과 '믿음'은 가정과 사회를 지키는 굳건한 방패다. 

▣ 일어나기도 전에 끝난 분쟁 

두 수도승이 오랫동안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들의 생활이 단조롭다고 느낀 한 수도승이 말하였다. 
"매일 매일의 따분한 이 생활을 한번 다르게 바꿔 봅시다.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 보는 게 어떨까요?" 
너무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다른 수도승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데요?" 
"그들이 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수도승은 거룩한 사랑의 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기 때문에 싸움을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데요?" 
수도승이 말하였다 
"저 돌을 보십시오. 그것을 우리 사이에 두고 '이 돌은 내 것이야'라고 서로 우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안을 했던 수도승이 잠시 생각하고 나더니 자신들의 오랜 우정에 위험을 느끼고는 이렇게 결정하였다. 
"형제님, 이 돌을 당신 것이라고 하시고 가지십시오." 
분쟁은 일어나기도 전에 끝났다.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 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 17:14) 

▣ 다툼(분쟁)을 멀리하라 

성경: 잠20:3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고양이 두 마리가 고기 한 덩이를 얻어 가지고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원숭이가 자기가 재판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고양이들은 쾌히 승낙하고 고깃덩이를 원숭이 앞에 놓았습니다. 원숭이는 고깃덩이를 둘로 잘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작은 것을 받은 고양이가 "내 것이 더 작다."고 하자 원숭이는 큰 것을 한 입 잘라먹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고양이가 자기 것이 작다고 하였습니다. 원숭이는 또 다른 고기를 한 입 잘라먹었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계속하니 고기가 양쪽 다 아주 작아졌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들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므로 원숭이는 고기를 다 먹고는 줄행랑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고양이들은 자기들의 싸움을 후회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소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싸우지 말고, 사랑으로써 화평케 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즐기리로다"(시37:11)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툼을 피하고 어느 곳에든지 온유와 사랑의 씨를 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묵상: 혹 작은 이익 때문에 다툼으로 큰 손해를 입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봅시다. 

▣ 다툼 장소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이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은 버스 문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세상에서의 큰 다툼은 작게 인식되지만 교회에서의 작은 다툼은 세상에서 큰 다툼으로 인식됩니다. 교회는 작은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권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다툼이 있는 곳에 화평이 되어야 합니다. 
/이성희 목사 

▣ 정원사와 달팽이 

한 정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무지와 같던 마당을 잘 가꾸어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정원에는 철따라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벌과 나비가 날아왔습니다. 
어느 날 달팽이 다섯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정원에 있는 꽃잎을 갉아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원사는 급히 큰 배추 다섯 포기를 사 와서 정원 한 구석에 심고 달팽이들이 배추를 맘껏 먹을 수 있도록 옮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달팽이들이 한 배추에 모두 달라붙어서 서로 차지겠다고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달팽이들아, 배추는 충분하지 않느냐. 어째 거기에만 달라붙어서 그렇게 싸우느냐, 싸우지덜 말고 각자 한 포기씩 가지면 되지 않겠느냐..." 정원사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달팽이들은 더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하였습니다. 
"아이고... 내가 달팽이였다면 그렇게 싸우지 않아도 배추는 충분하다고 말해 줄 수 있을텐데... 답답하다 답답해" 
한 군데 모여 복작대며 땅따먹기를 하는 인간들이 바로 어리석은 달팽이입니다. 지구의 정원사인 하나님은 달팽이들이 먹을 것을 이미 충분하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달팽이가 되어 우리에게 오셔서 그것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니다. 
아아, 하지만 어리석은 달팽이들은 자기들을 위해 오신 정원사 달팽이의 말을 믿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죽여 버렸네. 
ⓒ최용우 

▣ 오른발 교회 

형제교회라는 교단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성찬식 대신 세족식을 합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성직자가 성도의 발을 씻어주는 예식입니다. 
어느 형제교회 교단의 세족식에서 목사님이 습관적으로 교인의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서로 마주앉아 있기 때문에 목사님이 오른쪽을 잡으면 교인의 왼발이었던 것입니다. 세족식이 끝난 다음 그 교회의 선임 집사님이 용기를 내어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왼발을 먼저 씻습니까? 오른발을 먼저 씻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도 없는 사실을 가지고 목사님께 따지는 것을 목사님은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님은 ‘다음 세족식 때는 설마 오른발을 먼저 씻어주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족식에도 목사님은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화가 난 집사님은 교인을 선동하여 교회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새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는 지금도 미국에 있습니다.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닫힌 마음은 작은 차이를 큰 분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권합니다. 

▣ 싸움의 결과 

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두 집 다 무난한 매상을 올리고 있었지만 같은 종류의 음식점으로서 늘 상대를 견제하는 눈치였다. 하루는 앞집에서 간판을 바꾸어 달았는데 ‘원조 닭갈비’하고 써 붙였다. 간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손님이 늘어 재미를 보았다. 그러자 맞은편 식당에서는 다음날로 ‘진짜 원조 닭갈비’라는 간판을 더 커다란 글씨로 달아 놓았다. 조마조마하게 두 집 사이에 맴돌던 전운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폭발한 모양이다. 양쪽 집의 싸움은 감정 싸움이 되어 이성으로는 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전투 양상은 점점 치열해질 수밖에. 간판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치울라면 비용만 해도 엄청날 텐데 이제는 그런 손익계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상대를 누르고 말겠다는 자존심과 오기만 발동해서.... 
“우리가 진짜 원조 닭갈비”하면 “원조 특허 받은 진짜진짜 닭갈비”라고 응수하고 뒤에다 ‘주의! 유사닭갈비!’하고는 경고문까지 내달았다. 다음날엔 ‘원조라고 다 원조냐?’를 선봉에 세웠다. 주인들은 물론이고 종업원까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와서 멱살잡이하고 욕설에다 온갖 모함을 다 퍼부어댄다. 구경 중에 제일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더라. 흥미있게 싸움구경하던 사람들도 험악해져가는 분위기에 질려 도망질했다. 입맛을 잃은 단골들은 혀를 차며 다른 먹자골목으로 옮겨갔다. 이젠 손님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이래저래 양쪽 식당 모두 단골을 잃어버리고 아예 재기 불능, 텅 빈 거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상처뿐인 전투! 이젠 그만둡시다.’ 
그때서야 제정신을 찾았지만 이미 때늦은 뒤였다. 

▣ 힘 겨루기 

어느 여름날 더위에 지친 사자와 멧돼지가 물을 마시기 위해 작은 샘물가로 왔습니다. 서로 먼저 마시려고 하던 그들의 다툼은 결국 목숨을 건 싸움으로 커져 버렸습니다. 싸움을 하다말고 숨을 가다듬기 위해서 잠시 쉬던 이들은 자신들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미운 감정을 접어두고 말했습니다. 
“서로 싸우다 시체가 되어서 까마귀와 독수리의 먹이가 되느니 차라리 사이좋은 친구가 되는 편이 낫겠네.” 
경기 침체와 북핵 문제의 영향으로 문닫는 회사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또 ‘실직자 증가’와 ‘카드빚으로 인한 범죄와 자살’‘신용불량자 양산’ 등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용어들은 한결같이 어둡고 우울합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이익집단들과 정부간에,정당의 파벌간에 힘겨루기와 갈등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진정 누구를 위한 싸움이며 누구를 이롭게 하는 일일까요? 
/이영무 목사(영신교회) 

▣ 다 같은 형제 자매 

피아노를 사서 오른편에 놓자, 왼편에 놓자 싸우다가 갈라진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없다로 싸우다 갈라진 교회도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둥글둥글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울 총각과 경상도 처녀가 결혼하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우리 국수 끓여 먹자”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국시지 국수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둘이는 국수라는 둥 국시라는 둥 말다툼하다가 이장에게 어느 것이 옳은지 묻기로 하였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국수와 국시는 재료가 다릅니다.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이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부가 물었습니다. “밀가루와 밀가리는 어떻게 다릅니까?”“밀가루는 봉투에 넣어져 있는 것이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 있습니다” 또 이 말을 들은 부부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봉투와 봉다리는 어떻게 다릅니까?”“봉투는 기계로 찍은 것이고 봉다리는 손으로 붙여서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세세히 따질 필요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그게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두 한 형제요 자매요 가족입니다. 
/강문호 목사(갈보리선교교회) 

▣ 어떤 싸움 

어느 날 목공소에서 목공소 연장들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 "망치야, 너는 소리를 크게 내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망치는 "내가 떠나면 톱도 떠나야 한다. 톱은 이것저것 무엇이든지 사정없이 잘라내니까"라고 대꾸했다. 그 말을 들은 톱은 "내가 떠나면 대패도 떠나야지. 대패는 항상 남의 깊은 속도 모르고 자꾸만 깍아내니까 말이야." 그러자 대패도 한마디 했다. "내가 꼭 떠나야 한다면 자도 떠나야 하다. 자는 항상 자기 것만 옳다고 하며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해서 크고 작다 평하기 때문이야"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렇게 목공소 연장들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나사렛 목수가 들어와서 작업복을 갈아입으시더니 강대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사렛 목수는 강대상을 만들 때에 대패, 망치, 톱, 자 등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사용했다. 
'저 사람만 우리 모임에서 빠져 주었으면...', '저 형제만 우리 집안에 없었더라면.....', '우리 회사에 저 사람은 무용지물이야.'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그 사람을 치워달라는 기도소리조차 묵과하시면서 또 하나의 천국의 가구를 만들고 계신다 

▣ 갈등 해결의 방법 

어느 날 한 도시에서 대형 트럭이 지하로의 입구에 꽉 끼이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차는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술자들이 차를 빼내기 위해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소년이 트럭 운전기사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아저씨 제가 차를 빼낼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됐다 꼬마야. 어른들이 알아서 할 거다. 다친다 저리 가라” “타이어에서 공기만 조금 빼면 돼요” 정말 어른들은 그 아이의 말을 듣고 타이어의 공기를 조금 뺐습니다. 그러자 트럭은 쉽게 빠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대치하는 인간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대치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우리 자신이 조금만 바람을 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꽉 끼이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와 끼이지 않습니다. 너무 바람이 많이 들어있어 부딪히고 끼이고 갈등을 유발합니다. 조금만 바람을 빼고 낮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 욕심과 다툼 

어떤 아주머니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자기 앞집에 사는 두 어린 형제가 사이좋게 걸어오고 있었다.아이들도 그를 알아보고서는 다가와서 공손히 인사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기특하게 생각했다. 때마침 그에게는 자두 세 개가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동생인 아이에게 주면서 형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그것들을 받았다.아주머니가 가고 난 뒤 동생은 형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두는 아주머니가 내게 주신 것이니까 형은 한 개만 가져. 내가 두 개를 가질게” 그러나 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야, 내가 형이니까 내가 두 개를 가져야 돼” 
결국 그들 사이에 자두 한 개를 더 차지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욕심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있으며 거기서 불행은 시작된다.욕심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을 삼고 살아가자. 그러면 우리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박상훈 목사<승동교회> 

▣ 기준이 없으면 다툼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삶의 기준을 주시기 위해서다. 기준이 없으면 다툼이 있다. 1905년 3월에 우리나라 최초로 ‘대한 체육 구락부’가 탄생했고, 그해 6월 10일 황성 기독청년회 훈련원에서 최초로 공식 축구 경기가 열렸다고 한다. 그때 선수들은 상투에다 수건을 질끈 동여맸고, 한복 차림에 짚신 축구화를 신고 경기를 치렀다. 그 후에 장안에는 물론 전국 각지에 축구 붐이 일어나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경기를 했다. 경기장이라고는 대부분 마을 텃밭이나 뒷산의 공터였고, 선수는 제한이 없었으니 한 팀이 몇 명이든지 문제 될 게 없었다. 경기 시간 또한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선수 중 가장 연장자격인 한 사람이 입에서 ‘헉, 헉!’ 하는 소리를 내며, “야! 다들 몸살 나겠다. 이제 그만 하자”라고 하면 경기가 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이쯤 되니 동네 감초격인 박 서방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선수가 이렇게 많은디 문지기가 한 명으로 어림도 없는겨! 두 명으로 해야 하는겨!”라고 말하자, 그래도 동네에서 제법 유식하다고 하는 오 서방이 손을 저으며, “시끄러 이 사람아! 문지기는 오로지 한 명뿐인겨!”라고 우긴다. 그래서 동네 축구는 박 서방이 있으면 골키퍼가 둘, 셋도 되었다가 오 서방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한 명이 되었다. 이처럼 기준이 없으면 우왕좌왕하게 되고 쓸데없는 다툼으로 시간과 힘을 낭비하게 된다. 
/ 박영민 

▣ 자랑하지 말라 

유명한 성자가 있었답니다. 그에게는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도 하나님 앞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성자를 넘어뜨리기 위해 마귀들이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돈, 여자, 명예 등으로 유혹했지만 절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귀 대장이 성자에게 가서 딱 한마디 했더니 성자의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네 동생이 교회 주교가 되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왜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다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위선의 죄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있는 것 가지고 경쟁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발돋움해야 하고 결국은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존경받고 칭찬받고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지성인들이 범하기 쉬운 것이 자랑하는 죄입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많이 칭찬받고 존경받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독한 시기와 다툼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누가 더 일을 잘하고 선한 일을 하는지 경쟁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반태효 

▣ 싸움 

어느 화창한 날 오후에 두 아이가 사과와 배로 인하여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사과가 최고야. 사과가 제일 맛있어.” “아니야, 배가 더 맛있어.” 나중에는 주먹질까지 하며 싸우게 되었다. 마침내 두 아이의 부모들이 달려와 똑같이 두 아이를 나무랐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나자 상대 아이를 야단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어른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싸우는 이유는 한 사람은 사과 과수원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배밭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싸운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나왔다. 그들 중에는 사과밭 주인도 있고, 배밭 주인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양분되어 똑같이 싸움을 시작했다. 마침내 싸움에 지친 마을 사람들은 존경하는 한 현자를 찾아가서 묻기로 했다. 현자는 그 사과와 배를 받아들고는 말했다. “복숭아를 가지고 왔구나.” “아닙니다. 이것은 사과이고, 이것은 배입니다." 현자는 사과와 배를 맛있게 먹고 이렇게 말했다. “역시 복숭아가 맛이 있구나.” 
이 이야기는 마치 우리의 신앙생활의 단면과 흡사하다고 생각된다. 안타깝게도 종종 복음의 능력은 맛보지도 못한 채 종교적 형식과 관습, 직분과 부대시설, 교회제도와 정치 등 부수적인 것으로 인하여 싸우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복음의 본성’을 회복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하겠다. 
“역시 복음이 맛이 있구나 .” 

▣ 부부싸움의 법도 

아무리 행복한 가정이라도 부부싸움이 없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서로 같을 수 없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자기 주장을 좀더 강하게 하다보면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마련이다. 싸움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를 통해 더 좋은 길을 찾기도 하고 서로를 더 알고 이해하다보면 사랑이 더 깊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 불행하게도 사소한 싸움이 깊어져 끝내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발전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부싸움을 이렇게 만들어 갈까? 분노의 감정이다.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좋아지기도,더욱 악화되기도 한다. 그런데 부부싸움에 피해야 할 한 가지 법이 있다. 아무리 분노가 치밀더라도 문제의 사건에 머물러야지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까지 멸시하며 짓밟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잘해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인격까지 짓밟히면 너무 큰 상처를 입게 되고 다시 회복되기 무척 어려워진다. 싸움에도 법도가 있어야 한다. 인격 안에서 싸울 때 그 싸움은 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가 인격을 학대하며 싸우게 되면 그냥 파괴적인 싸움으로 끝날 뿐이다. 
/이성훈 원장(길르앗치유문화원) 

▣ 다툼을 깨끗이 세탁하신 성령님 

불행히도 내게는 누구의 옷이든지 빨면 줄어들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직업상 일주일에 2~3일은 출장을 다녀야 하기에 결국 세탁 일은 남편 몫이 되었다. 얼마 전 나는 순면으로 된 검은 바지 한 벌을 샀다. 그 바지는 줄어들면 절대로 안 되는 옷이었다. 나는 아무도 집에 없고 다른 빨랫감이 없는 날, 그 면바지를 세탁기에 넣었다. 그리고 잠깐 일을 보러 나갔다. 바지는 탈수하지 않고 집에 돌아온 즉시 건조대에 널어서 말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시간 후 귀가했을 때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남편이 집에 들어와 있었다. 검은 면바지는 이미 똘똘 말려 건조기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가족들의 옷을 여러 번 줄여 놓았다. 반면 남편은 그 많은 빨래들을 기꺼이 잘해 왔다. 여기서 내가 남편에게 이 문제로 시비를 건다면, 지난 21년 동안 서로가 저지른 세탁 실수를 다 들이대면서 비난하는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았다. 문득 지난 주일 예배 시간에 들은 설교가 생각났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여보.” 이 말 한마디를 한 순간, 서로 격렬하게 한판 붙어 보려고 머리 속에 준비한 모든 비난거리가 싹 씻겨 버렸다. 내가 남편의 불완전함과 잘못에 부닥쳤을 때 성령의 열매를 묵상하자 성령께서 나의 본성을 뛰어넘는 온유함으로 반응하게 하셨다. 그럼으로써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 3분만 기다려라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는 어떤 부부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노란 물약이 든 큰 통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만약 화가 치솟거든 이 물약을 세 숟가락씩 꼭 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반드시 1분 동안 머금은 후에 삼켜야 합니다. 그러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부부는 의사 말대로 화가 나면 물약을 마셨습니다. 물약을 먹고 3분이 지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약이 떨어지자 부부가 다시 의사를 찾아가서 약을 더 조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 약은 설탕물입니다. 부부가 싸움을 안 하게 된 것은 그 설탕물을 먹고 3분을 기다리는 동안 분노를 삭였기 때문입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분노하지 말고 그 분노를 잘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피영민 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 

▣ 헛된 싸움 

제정 러시아가 쇠퇴해 갈 무렵 정교회의 지도자들은 까운을 어떤 모양으로 입어야 하는가? 까운의 단을 붉은색으로 할 것인가? 황금색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10주야 이상을 격론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볼셰비키 혁명 운동가들은 러시아를 가난과 기아에서 건질 방법을 궁구하며 혁명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혁명이 발발했고 러시아를 호령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남김없이 처형당하고 말았다. 말씀에서 떠나 있는 교회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는 이같이 증언한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가지고 서로 격론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들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공격의 목표 

영국과 프랑스간에 반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 포병이 숲에 잠적한 적을 겨냥하여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쏘았다. 그때 총사령관이 올라와 망원경으로 목표 지점을 보더니 '대위, 잘 조준했다. 하지만 자네가 명중시킨 부대는 우리의 99사단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실책은 그리스도군대에게도 일어난다. 교회라는 거대한 대포로 사탄의 보루를 쳐부수어야 할 텐데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형제를 겨냥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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