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중세는 크게 세 시대로 나눌수 있다.
초기시대는 592년 교황 그레고리 1세로 시작하는 교황권의 확대로부터 80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중세교회의 선교와 수도원제도가 확립되었다. 이기간 동안에는 어거스틴 신학을 정리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반-어거스틴 신학의 정립으로 중세 전반에 걸쳐서 어거스틴을 이해하는 구체적인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중세교회가 외부적인 침입을 받아서 기독교권의 침체와 축소를 맞이하였던 기간이다.
중기 시대는 교황권의 확립을 이루었다. 교회의 세력확보는 내부적인 부패를 의미한다. 중세교회는 정치적인 결탁에서 오는 재력의 확보를 인한 시몬주의, 교황권을 둘러싼 음란주의가 부패하는 개혁으로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오토 대제의 개혁운동, 수도원의 개혁운동 등이 이루어졌었다. 이러한 제도권내에서의 개혁운동은 한계가 있었으며, 이 시기 동안에 제도권 교회에 대한 각종 반항운동이 있었다. 첫째, 제도권에 도전하는 개혁운동으로서 영국과 폴란드에서 일어난 운동, 둘째, 제도권을 떠나서 도피적인 입장을 취하는 수도원적 공동체운동, 셋째, 각종 이단운동, 그리고 넷째, 신비적인 미신신앙의 유행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운동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서 중세 교인들의 반발을 해외로 돌림으로써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중세 후기 교회는 십자군전쟁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교황권이 둘로 나누임으로 인해서 교권의 실추가 가속화되었다. 중세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회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유명론 신학 이론을 들여옴으로써 교회의 타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중세교회는 신학적으로 인간의 힘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회가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부담 없이 판매하기 시작하였으며, 소위 말하는 문예부흥 교황들은 앞을 다투어서 화려한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이것이
곧바로 중세의 패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중세는 여기에 덧붙여서 스콜라신학의 흐름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스콜라신학의 흐름을 시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중세를 이론적으로 개괄하려고 한다.
Ⅱ. 본론
제1장 어거스틴의 신학적 이론과 중세
1. 어거스틴의 생애와 저서
어거스틴은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마다우라 지방의 학교로 공부하러 갔다. 그렇지만 학비의 부족으로 어거스틴은 더이상의 공부를 진행하지 못하고 고향에 되돌아 와서 일없이 지내야 했다. 어거스틴은 사춘기적 반항을 표시하기도 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학비 마련을 위해 노동을 한다. 이 학비로 어거스틴은 카르타고로 유학간다. 어거스틴은 수사학 학교를 졸업한뒤 수사학 학교를 설립한다.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저서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진리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한다. 키케로의 권면에 따라 어거스틴이 찾아간 곳은 마니교의 교회당이었다. 악의 출처에 대해서 자신있게 대답 못해주는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여 마니교의 이원론에 심취한다. 어머니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빠진것을 알고 걱정하며 카톨릭 정통신앙으로 되돌아오길 권면하나, 카르타고의 총독으로 부임한 심마쿠스의 도움으로 로마로 가게 된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에서 한가지 풀수없는 문제를 발견하는데 악의 기원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해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다투는 가운데서 악한 물질이 생겼다는 것은 복음과 같았으나, 그 선과 악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아무도 대답해 주지 못했다. 그 때에 밀라노에 있는 황제의 궁전에서 황제의 문서작성관과 국립수사학 학교의 선생직을 겸한 공개 채용 시험에 합격한다. 마니교에 회의를 느낀 그는 신플라톤 철학자 플로티누스의 <에네아데스>를 읽음으로써 이원론관에서 일원론적 세계관으로 옮겨간다. 그러던 중 <롬13:11-14>의 음성을 듣고 친구들과 어머니에게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암브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세속적인 의미의 출세를 버리기로 학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어머니와 사별 한뒤 로마에 머물다가 기독교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부모들의 재산을 정리해 빈곤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수도원적 공동체를 만든다. 기독교적 수도원을 잘 알기위해 히포의 수도원을 방문했다가 발레리우스 대신 히포의 감독으로 봉직된다.
2 어거스틴의 목회와 신학적 논쟁
어거스틴의 신학과 이론은 책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목회현장에서 부딪치는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1)도나투스 이단과 교회론
도나투스 교회들은 도회지의 큰 교회에서 세력을 확보하기 보다는 농촌과 산악지역에서 우세하였고 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환영을 받았다. 광활한 토지의 소유자들은 로마인들이고 소작자와 경작자는 원주민들이었다. 여기에서 발생한 불만이 도나투스 교회에 속한 과격한 성격의 원주민들과 결합해서 과격한 전투적 반항 단체로 발전한다. 교회는 도나투스 논쟁이 시작될 무렵 하나님의 성례전의 효력은 성례전을 집행하는 사람의 신앙적, 도덕적 순수성에 있기 보다는 성례전 그자체에 있다고 결정했었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결정에 호소하면서 교회의 순수성은 모인 교인들이 다 같이 양이어서가 아니라 양과 이리가 섞여서 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을'섞여 있는 교회'라 한다. 교회 안에는 양과 이리가, 알곡과 가라지가 모여있으며, 이를 구별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 한분이라고 주장했다.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여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의 교회를 보살피시며 어느 한 교회 만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교회는 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의 통일된 지체로써 통일성을 같는다.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일치 한다.
(2) 마니교와 신론
마니교는 본래 페르시아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환상적인 계시를 받고서 자칭 최후의 예언자로 등장한 마니의 가르침을 근거한 사이비 기독교이다. 마니교가 로마사회에서 크게 번질 수 있었던 이유는 외래적인 신비주의적 내세구원종교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당시 로마의 도덕적 타락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마니교의 도덕적인 삶이 고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며, 또한 악의 기원과 존재에 대해 나름대로의 자신 있는 대답을 주었다는 점과, 마지막으로 마니교는 기성교회에 버금가는 조직을 운영하였다는 점이다. 맨 먼저 악이란 무엇인가 아니면 실체의 궁극적인 구성요인인가? 악의 진정한 성질은 무엇이며, 악의 지위는 무엇인가 등을 질문한다. 두 번째로 어거스틴은 악이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질문한다. 세번째로 어거스틴은 자기 시대에는 중요한 논란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후대에 '형이상학적 악'이라고 일컫는 유한성, 존재의 제한성, 가변성,그리고 불완전성 등에 관해서 질문한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적인 '완전한 원리' 를 도입해서 풍요롭고 무한한 가치를 지닌 우주는 저급한것과 고급한것, 미운것과 아름다운것, 불안전한 것과 완전한 것을 다같이 포함 할 수 있는 원형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틴은 신정론의 '심미적인 주제'를 다룬다. 신정론을 전개함으로써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이원론적인 신관을 물리쳤으며, 고대사회와 교회의 가장 주된 관심거리였던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3)펠라기우스와 은총론
펠라기우스는 아이랜드 출신의 수도자로서 어거스틴과 비슷한 시기에 로마사회와 교회의 도덕률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퇴폐적이며, 무엇보다도 운명론적인 결정론에 빠져서 인간으로서의 의지적인 결단이나 책임감이 극히 결여되어 있었다. 여기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느끼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기 시작 하였던 펠라기우스는 많은 추종자를 불러모았으며, 그 가운데에는 점잖은 귀족들과 그 부인들, 사회의 지식인들-이 부류의 대표자로서는 변호사로 활동하였던 카일레스티우스를 말할수 있다.-그리고 심지어는 기독교 사제들까지 있었다. 카일레스티우스는 규정에 따라서 신앙고백서를 제출하였다가 이단으로 정죄당하였으며, 곧바로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는 페라기우스에 대한 재판까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의 책임자였던 예루살렘의 감독 요한은 펠리기우스에 대한 이단 혐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무죄를 선포하였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은 검토하면서 펠라기우스의 이단성을 정리하였다. 펠리기우스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볼 때에 지금까지 유아세례를 부정 한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무죄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았다. 펠라기우스는 사람이 무죄한 상태로 태어나지만 부모들과 사회로부터 죄를 배운다는 모방설을 가르침으로써 어떻게 보면 교회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원죄의 유전설을 부인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유아세례를 부인함으로서 사람이 선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으며, 출생으로부터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의를 은총이 아닌 율법에 따라서 선하게 활용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펠라기우스의 이론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킴으로써 인간의 몫을 주장하게 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신인협동론적인 구원을 말
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은총과 율법의 상관 관계를 "율법은 은총을 추구하게 되기 위해서, 그리고 은총은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하고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인간의 자기구원 가능성을 반박하면서 원죄의 유전을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면서 선행적 은총과 후속적 은총을 구별하였다.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사람은 죄를 미워하게 되고 교회로 이끌림을 받으며, 후속적 은총으로 말미암아서 죄의 사면을 받게 되며 성도로서의 거룩한 생활을 이끌어 간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죄가 있는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원죄가 엮었으며, 현세상에서 계속적으로 짓는 현세욕이 있다.
하나님은 강압적인 방법이 아니라 부드러운 폭력으로써 구원받을 사람의 의지를 작동시켜서 교회로 발걸음이 옮겨지게 하신다. 그리고 누가 이렇게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므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으며, 또한 알아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3. 로마의 멸망과 역사론
로마가 멸망당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옛 로마의 전통적인 신을 버리고 기독교를 381년 국교화하였기 때문에 신들이 노한 결과라는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비난을 듣고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역사관을 전개해 나간다,. 이세상에는 두 종류의 도성이 있는데, 하나는 땅의 도성,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늘의 도성이다. 땅의 도성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멸하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온갖 힘을 쏟는다. 이 도성은 세상의 군주들과 국가가 다스리면서 백성들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반대로 하늘의 도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경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한다. 이도성에서는 군주와 국가들이 백성을 섬기고 봉사하며,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통치하는 나라이다. 로마가 멸망당한 것은 옛 로마의 신들의 저주가 아니라, 로마의 죄악과 우상숭배로 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4. 연옥
어거스틴은 죄 사면에 관한 이론을 확립시키는 과정에서 중죄와 경죄를 구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죄 사면에 이르는 회개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회개를 3종류로 보았는데 1)세례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한 회개, 특히 어린아이 시절에 지은 죄는 자신의 신앙을 이끌어 준 사람에 따라서 좌우된다. 2)경죄는 주의 기도, 구제. 그리고 금식으로 사면된다. 3)중죄는 성찬에서 제외시키고 감독에게 고백한 다음에 적당한 '만족'을 부여받았다. 어거스틴은 연옥을 무엇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다만 세상에서 세속적인 것을 어느정도 사랑했느냐에 따라서 연옥의 불을 거치며, 어떠한 사람은 느리게 혹은 빠르게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어거스틴의 연옥 이론은 그레고리 대왕에게서 확정되었으며, 중세 후반에 들어서면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에 함당한 회개를 할수 없으므로 연옥에 가서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해서 중세는 면죄부의 발매를 정당화하였으며, 죽은 자를 위한 개인 미사의 당위성을 확립시킴으로써 중세교회의 타락과 멸망을 동시에 토래 하였다.
어거스틴의 사상 가운데 많은 반대를 받았던 이론은 은총론이었다. 중세가 전반적으로 이해하였던 어거스틴의 은총론이란 바로 이 오렌지대회회에서 결정한 어거스틴의 은총론으로서 실질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는 후반에 이르러서 인간의 노력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유명론 신학으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발전하였다.
제 2 장 .중세 초기의 신학
후대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으로 테오도릭 아래서 집정관과 궁정 자문관을 지냈던 보에티우스와 두사람이 세운 신학의 학문적 전통은 중세 초기의 신학적 전통을 확립시켰으며, 더 나아가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신학의 두 흐름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보에티우스
보에티우스 는 로마의 안키라 출신으로서 로마의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한 오스트로고트의 테오도릭 황제 아래에서 집정관과 궁정 자문관까지 지냈던 고위직 관리였으나, 말년에 이르러서 반란의 혐의를 받아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철학의 위안]을 기술해서 어떻게 영혼이 철학적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는가를 밝혔다. 즉 그는 후대로 하여금 학문적인 방법을 통해서 신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주지주의적 신앙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기독교 신학에 관한 저서로는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관하여]과 [그리스도의 위격과 두 본성에 관하여]등을 고전적인 옹어로 기술함으로써 중세 초반의 신학적 흐름을 정립시켰다., 보에티우스의 학문적 역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써 중세의 학문적 기초를 세운 점이며, 동시에 보편 논쟁을 일으킴으로써 중세 전반에 걸쳐서 학문적 연속이 이어지게 하였다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위- 디오니시우스
사도 바울의 제자로서 사도행전 17:34에 등장하는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으로 알려진[하늘의 계층구조에 관하여],[교회의 계층구조에 관하여], 그리고 [신비신학에 관하여]등의 책들이 중세 초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중세에서는 세 가지의 신학의 길이 있었다. 첫 번째는 긍정신학이다. 두 번째는 긍정신학의 부족을 부정신학으로써 끊임없이 시정한다. 마지막으로 신비신학이 완성한다. 신비주의적 신학이 언제나 밑받침을 이루었으나 너무나도 지나치게 흐를 때에는 광신적인 열광주의로 흘러서 종말을 예언하는 등 사이비적인 면을 지니기도 한 반면에, 논리적 신학은 언제나 지배층의 이론신학이 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타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제 3 장. 중세 초기의 선교
중세는 3가지 방면으로부터 침입을 받아서 기독교권의 축소를 초래하였다.
1. 영국의 선교 : 켄트족의 개종 율리우스 시저가 기원전에 정복하기 시작하였던 영국은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 기독교 국가로 성장하다가 410년 로마의 멸망과 함께 로마군이 철수하자 색슨족, 앵글족, 쥬느족등의 침입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선교를 본격적으로 일으킨 사람은 교황 그레고리 1세 였다.
영국의 선교와 개종은 아직까지는 완전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성직자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개혁을 가져왔으며, 로마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충성스러운 위성국이 되었다.
2. 아일랜드와 북유럽의 선교
아일랜드는 431년 교황 카일레스틴이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나 실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성패트릭의 선교로 기독교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아일랜드는 또 다른 선교의 거점이 되었으며, 중세 수도원에 성경복사, 학문적 전통, 그리고 선교의 정열을 심어 주는 좋은 전통을 수립하였다.
제 4 장.중세초기의 신학존쟁;기독론 논쟁의 계속
451년 니케아회의의 결정은 제국에서 원하는 대로 온전한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칼케돈신조의 신학적 흐름은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쪽에 더욱 유리하였기 때문에 안디옥 계열에서는 자연적으로 안디옥 신학적 흐름에 서서 반대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특히 칼케돈신조를 전체적으로 반대하면 제국의 통일을 반대하는 위험스러운 인물이 된다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신도의 내용 가운데에서 '두본성으로 된'이라는 부분을 싫어 하였다. 이들은 정통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유티케스를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공존체라고 고백하였다. 황제 찬탈자 바실리스쿠스는 엠사아클론]을 출간해서 칼케돈신조를 무효화시키려 하였으나, 그가 쫓아 낸 황제 제노가 다시 복위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황제 제노는 제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칼케돈신조를 드러내 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통일칙령] 혹은 [헤노티콘]을482년에 발령하였다. 헤노티곤은 실제적으로는 말씀 - 단성론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었으나 칼케돈신조와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언어적 의미의 장벽을 제대로 밝혀 내지 못하였다. 헤노티콘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칼케돈신조를 옹호하기보다는 오히려 단성론을 보호하였다.
제 5 장. 회교의 발달과 기독교권의 축소
570년 메카에서 출생한 모하메드는 부모를 잃고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622년 7월15일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동하였는에, 이 날을 회교도에서는 헤지라라고 부르며 또한 회교도의 기원 원년으로 삼는다. 이렇게 출발한 회교도는 한 손에는 코란을, 한손에는 칼을 들고서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아라비아 전역을 점령하였으며, 칼리프 오마르는 635년 다마스커스를, 638년에는 예루살렘을 각각 점령하였다. 동시에 또 다른 회교도들은 이집트를 침공해서 오늘날 카이로로 알려진 도시를 건설하고 642년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으며, 647년에는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따라서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51년에는 페르시아까지 완전히 점령하였다.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기 시작한 회교도들은 695년 카르타고를 점령하고서 그때까지 존속하였던 모타누스 교회, 도나투스 교회, 아리우스파 교회, 그리고 단성론파 교회들은 모조리 회교도화 시켰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스페인을 점령하기 시작하였으며, 732년에는 피에네 산맥을 넘어서 프랑스까지 침공하다가 투르에서 프랑스의 망치왕 찰스를 만나서 퇴격당한 이후로 스페인의 코르도바에 독립적인 칼리프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들 칼리프제국은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에게 회교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하였으며, 이렇게 스페인에서 회교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하였으며, 이렇게 스페인에서 회교도 밑에서 잔존하였던 기독교도들을 '모자람이라고 부른다.
기독교권은 회교도들을 맞이해서 유럽의 동쪽과 남쪽에서 축소 되었다.
제 6장. 신성로마제국의 건설
신성로마제국의 건설은 게르만족의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는 첫출발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지금까지 로마의 통치 아래서 야만인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당하여 왔던 게르만족들의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이러한 학문적 부흥의 기간을 카롤링 문예부흥이라고 부르며, 이 기간동안에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사건은 성찬 논쟁, 예정론 논쟁, 사고백제도의 도입과 발전, 그리고 필리오케 논쟁 등이다.
1. 성찬 논쟁
성찬 논쟁은 프랑스의 코르지 수도원의 원장을 다같이 역임하였으며, [주님의 몸과 피에 관하여]라는 동일한 제목의 책을 저술하였던 두 사람의 견해에 얽힌 사건이다.
중세는 라드베르투스의 견해를 추종하고 라트람누스의 견해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거의 잊혀져 있었다가 쯔빙글리리 추종자들에 의해서 다시금 거론됨으로써 트렌트회의에서 금서목록에 삽입되고 알았다.
2. 예정론 논쟁
중세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대로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예정론을 어거스틴이 말하였던 원모습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렌지회의에서 결정된대로 방아들임으로써 순수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배격하기에 이르렀다.
3. 사 고백제도의 발달
고대로부터 교회는 공적인 참회제도를 유지 했었다. 그러다가 박해로 인한 배교자들의 재입교 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하면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서 대립을 벌이다가 온건파가 승리하게 되었다. 314년 안키라회의는 참회자의 사면에 이르기까지를 이렇게 규정하였다.
제 1 단계 : 우는 자의 단계.
제 2 단계 : 청문자의 단계.
제 3 단계 : 무릎 꿇는 자의 단계.
제 4 단계 : 서 있는자의 단계.
참회기간은 통상적으로 3-4년이 소요되었으나 정상에 따라서 단축되기도 하고 연장되기도 하였다.
4. 필리오케 논쟁
필리오케 논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가 서방교회가 전반적으로 받아들인 내용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가 성령에 관해서 "아버지로 부터 발출하신다." 라고 단순하게 언급한 데 있었다
결론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설립 자체가 다분히 교회와 정치 양쪽 측에게 정치적인 속셈이 있었다. 로마는 410년 이래로 위축되었던 옛 로마 교회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마음에서 정치적인 힘이 더 요구되었다. 또한 게르만족 출신이었던 살리안 프랑크 왕조는 자신들의 야만성을 은폐시키려면 기독교라는 문화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 이익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였던 신성로마제국은 샬레만뉴가 죽은 이후로 왕권이 축소된 반면에, 교권은 교황들의 재치 빠른 활동으로 더욱 확고히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황권의 증대가 가속화되었으나 반면에 교회의 부패가 또한 초래되기도 하였다.
제 7 장. 교황권의 증대와 교회의 부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 본장에서는 교황권의 증대와 부패,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1. 교황권 증대를 위한 문서들
1) 콘스탄틴 증여문서
이문서의 목적은 교황권이 샬레만뉴의 황제권보다도 최소한 5세기 앞에서부터 세속권까지 보유 하고 있었음을 밝혀 보자는 데 있었다.
2) 이시도르의 거짓 교령집
이 교령집은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디오니시우스의 모음집에서 발췌한 50개의 사도적 교회법을 정리한 다음에,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로부터 멜키아데스에 이르기까지 발표되었다고 여겨지는 60개의 거짓교령을 싣고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콘스탄틴 증여문서'를 싣고 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교황 실베스터로부터 그레고리 2세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교령을 싣고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35개가 거짓이었다. 이 거짓 교령집의 목적은 교황 중심적인 신정통치를 밝히려는 데 있었음이 분명하다.
2. 교회의 부패
중세교회의 부패의 두 가지 요인을 일반적으로 니콜라주의와 시몬주의라고 부른다.
니콜라주의는 교회의 음란을 말하는데, 중세의 성직자들이 고백해야 할 부끄러운 면모였으며, 시몬주의는 교회가 치장과 사치에 빠져서 재정적인 필요를 메꾸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도입한 추문이었다.
1) 니콜라주의
1139년 제2차 라테란회의에서 성직자의 결혼은 불법이며, 또한 무효라고 선언함으로써 트렌트회의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효한 교회법이 되었다.
2) 평신도 서임권 논쟁과 시몬주의
문제의 핵심은 중세는 샬레만뉴 이후로 토지를 근간으로 한 봉건 영주제도에 의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토지를 경작하는 시민들과 이들을 지키고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봉건군주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유럽을 지탱시켜 주는 기반이었다.
서임권 논쟁은 결과적으로 교황청의 승리라고 할 수 있으나, 교황청은 이 승리로 인해서 내부적인 부패에 빠져서 결국은 중세교회의 멸망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제 8 장. 수도원의 부패와 개혁
중세 수도원 제도는 성베네딕트에 의해서 기초가 잡힌 이래로 경건과 학문, 그리고 선교와 사회봉사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었다. 바로 이 장점이 또한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수도원이 내부적으로 부패할 수 있었던 원인은 크게 볼 때에 금전과 권력에 관한 부분이었다.
수도원 세속화에서 생긴 자금으로 학교를 건설하였는데, 이러한 사례로서 우리는 영국의 월시 추기경이 설립하였던 그리스도 대학을 거론할 수 있다.
개혁은 새로운 제도를 창설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도가 개선되어야 할 사항도 있겠지만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개혁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제 9 장. 중세의 이단들
1.카타리파
이단들의 출현은 제도권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제도권으로 하여금 제 길을 가도록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한다. 이들의 이론은 마니교와 매우 비슷한 이원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은 육적이며 물질적인 창조를 악의 창조로 보았다.
그들은 성례전을 부인하였고 지옥, 연옥, 몸의 부활 등도 부인하였다. 1208년에는 교황청 특사 카스텔나우의 피터가 살해되자 십자군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십자군은 1218년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학살과 전투 등으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알비파들의 영토를 프랑스에 귀속시키려는 영토 분쟁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하였다.
종교재판의 결과로서 평신도들은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할 수 없었으며, 더 나아가서 모국어로 된 성경을 휴대하거나 읽을 수도 없었다.
2.왈도파
왈도파는 프랑스의 리용에 거주하였던 피터 발데스에 의해서 12세기에 형성된 '리용의 가난한 자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왈도파들은 사회의 저급층에서 급속도로 번졌다.
제 10 장. 중세교회의 대처
1.교권의 강화
교회의 위상과 교권을 세운 사람은 우리가 흔히 개혁자라고 부르는 추기경 훔버트, 교황 레오 9세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 7세에 이르는 세 사람이다.
그레고리 7세가 주장하였던 교황권은 중세 전반에 흐르는 교권 옹호의 원천이었다. 그레고리7세의 주장은 중세 전반에 흐르는 교권의 우위를 다지는 이론으로서 인노센트 3세에 의해서 반포된 '우남쌍탐'의 기초 이론이었다.
2. 신학의 발전
중세신학은 카롤링 문예부흥 시대에 영국 계열의 신학자들을 -예를들면 알쿠인, 라바누스 마우루스, 에리게나-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11세기 이후로는 대륙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발전하였다.
(1) 란프랑과 베렝가
란프랑과 투르의 베렝가에 의해서 재현된 성찬 논쟁이 중기 신학의 서곡이었다. 화체설을 확립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켄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은 롬바르드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1060년에 노르만디에 있는 벡 수도원에서 수도사 서약을 하였다. 안셀름은 신학적 명제를 제시하고서 교부들이나 여타의 교권적 권위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서 오히려 이성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안셀름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분'이 곧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안셀름의 속죄론은 지금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안셀름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성을 사용하면서도 정통적인 교회의 이론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더욱 높여 주었으며, 스콜라신학의 발전을 크게 도모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3) 피터 롬바르드
피터 롬바르드의 문장론은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는 중요한 사실과 더불어서 성례전 이론의 확립에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개혁은 시작한다.
사제와 교회의 억압으로부터 중세인들에게 자유를! 바로 이 과업을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이루었다.
3. 새로운 교단의 창설
(1) 어거스틴파
어거스틴파의 규범은 재산의 공유화에 있었다.
(2)카르투스파
이들은 특히 자아 학대를 통한 수도에 전념하였다.
(3)카르멜파
(4)걸식교단
중세교회의 권위를 회복시켜 준 종단이 바로 걸식교단으로서 프란테스코파와 도미니크파였다. 프란체스코는 가장 섬세하고,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수도원출신의 성인이었다면, 도미니크는 냉철하고 조직적이며 근엄한 성격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인격으로 종단을 이끌어 갔다고 한다면, 도미니크는 훈련의 대가로서 종단을 엄격한 규범으로써 이끌었다. 프란체스코는 사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도미니크는 교회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프란체스코의 필생의 사업은 개인의 영혼 구원에 있다면, 도미니크는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겸손의 표상으로서 존경을 받는다면, 도미니크는 이단을 물리치는 망치와 같았다.
① 프란체스코파
㈎ 성프란체스코
성프란체스코의 본명은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도네로서 1182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아나서 1226년에 죽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보면 창피를 느꼈다. 이렇게 해서 프란체스코는 가난과 결혼하였다.
프란체스코파는 창설자 프란체스코의 지시를 끝까지 따르려는 순수파 혹은 엄격파와, 교황 그레고리 9세가 된 추기경 우골리노가 세운 규범과 재산소유를 인정하는 완화된 온건파로 나누었다.
㈏ 보나벤투라
보나벤투라의 본래 이름은 지오반니 디피단자였다. 그는 아시시의 성자를 따르는 데 있어서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는 위기상황에서 중도 노선를 취함으로써 위대한 신학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교회 행정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교단의 제2의 창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나벤투라의 신학적 업적은 그의[롬바르드의 문장론 주석]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그의 신비주의적 경향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순례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피조된 우주가 창조자에게 이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한 관조에 있다.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는 또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관조하는 데 있다.
② 도미니크파
㈎ 도미니크파의 역사적 발전
도미니크 혹은 도밍고는 스페인의 칼라로가에서 1170년에 태어나서 볼로냐에서 1121년에 죽었다. 학문과 영혼구원이 도미니크 교단의 주된 강조점이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프랑스의 왕가와 인척관계에 있는 아퀴노의 랜둘프 백작의 막내아들로서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세의 보편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보편은 "스스로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즉 보편은 사물 안에 구체적인 사물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토마스는 존재유비의 타당성을 말한다. 토마스는 존재론적인 신 증명방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부정할 수 없는 운동을 사실로 삼고 출발한다. 두 번째는 인과율이다. 세 번째는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사이의 구별이다. 네 번째 방법은 존재들이 완성되는 각종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다섯 번째 방법은 우주의 질서로부터 출발하는 전통적인 목적론적 논증이다.
이상과 같은 토마스의 하나님 존재증명 방법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간의 단순한 생득적인 인지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점에서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어 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토마스는 13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1567년 교황 피우스 5세는 '교회의 완전한 박사'라는 칭호를 '천사박사님'께 하사하였다.
제 11 장.회교도에 대한 공격과 유럽교회의 몰락
십자군 전쟁과 스페인의 회교도에 대한 공격은 중세 유럽의 불만의 입김을 아시아로 배출케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함과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세워 보려는 고도의 정치적인 술책이었다.
1. 십자군전쟁
성지 회복을 위한 전쟁의 필요성은 일찍이 그레고리 7세 때부터 제기되어 있었다. 1096년 8월 15일 승천기념일에 출발한 제1차 십자군 원정단은 우르반 2세가 지명한 푸이의 주교인 아드헤마르가 총사령관으로서 이끌었다.
제2차 십자군운동은 제1차 십자군들의 외곽 거점이었던 에뎃사가 터키족에게 재탈환 당하자, 십자군을 지원하자는 운동이 클레르보의 버나드를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퍼지기 시작해서 드디어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가 제2차 십자군 200,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나 곳곳에서 패배를 당하였으며, 예루살렘은 1187년 이집트의 술탄인 살라딘에게 재탈환 당하였다.
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그리고 프랑스의 필립2세 아우구스투스가 제3차 십자군을 동원하였다.
제4차 십자군은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출군을 명령하였다. 제5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왕이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서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을 관할하고 동시에 성지로 잇는 도로들을 양도받음으로써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제7차 십자군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이끌었으나 대실패에 그쳤으며, 제 8차 십자군도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7차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하였으나, 본인이 튜니스에서 열병으로 사망함으로써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2. 스페인 재정복
이때로부터 스페인은 대양탐험과 신대륙 발견, 그리고 무적함대를 이끌고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위성국가로 만들었으며, 특히 교황청을 종이 호랑이로 만들었다.
3. 회교도들에 대한 공격의 결과
정치적인 면에서 유럽의 기독교는 샬레만뉴의 부흥 이래로 내적인 타락을 겪었으며, 일반인들의 불만이 쌓이자 이를 밖으로 터뜨린 해결책이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가진 십자군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회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었는데, 십자군전쟁으로 인해서 회교도들에 대한 전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에 십자군운동의 힘은 하나님이 원하셨다. 이러한 기사단들은 유럽의 기사전통을 수립해 주었으며, 소위 말하는 신사도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유럽인들은 이 시기를 즈음해서 동양인들의 화약, 유리와 안경, 나침반, 종이와 인쇄술, 연금술과 의학을 수입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군운동에 참전한 동기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도 작용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이 발표한 완전 면죄부의 수여가 더욱 매력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곧바로 십자군전쟁의 결과에 의해서 중세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교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개혁으로 끝맺음을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