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림교인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인 쿠니야 목사에 대한 정리.
아래의 두 편의 기사는 황야를 개척하는 사람의 원 저자인 아마모토 나오이치가 자신의 스승인 쿠니야 목사에 대하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산 증거의 말씀이며 또 하나는 김재신 목사께서 말세의 복음 이라는 기사에서 쿠니야 목사 자신이 자신의 선교의 행적을 기술한 내용들을 필자가 다시 개요식으로 엮어 나간 것이다. 필자는 이 나라에 복음을 증거한 4인방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이미 선을 보였으나 이곳에서는 두 편의 기사를 실린 것 이외에 민병진 교수가 번역한 황야를 개척하는 사람이란 쿠니야 히데 목사의 자서전의 내용을 A - 4 용지 20쪽에 실린 것을 첨부 파일에 올렸다. 돈 들이지 않고 볼 수 있는 인터넷을 많이 이용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첨부 파일 중에는 위의 내용도 함께 실렸습니다.
1. 투쟁의 사람
위의 제목은 쿠니야 히데 목사의 자서전을 집필한 야마모토 나오이치가 쿠니야 목사의 생애에 대하여 관찰한 바의 모든 것들을 간단 명료하게 서술한 내용들인바 필자는 더욱 간소하게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야마모토 씨는 쿠니야 목사가 83세 되던 때의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었다.
년세가 비록 83세였으나 장정을 능가하는 기개를 가진 분으로서 올해엗 규슈의 시코쿠와 중국으로 전도여행을 다닐 정도로 건강하셨다. 쿠니야 씨는 나의 어머니로부터 택정하심을 얻어 부르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소명을 간직한 분으로 개척자로서의 남다른 각오를 지닌 분이셨다. 아마모토 씨는 어려서부터 그로부터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시며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암송하였다. 자신은 무서운 얼굴을 지녔으면서도 온화한 마음을 지닌 선생님 앞에서 공부하면서 늘 진리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자라났다. 선생님께서 자신이 초등학교 일학년 때에 친구들과 대화한 말 중에 장차 커서 무엇이 되겠는가 라는 물음에 한 친구는 “나는 공부 같은 것은 싫다, 내가 크면 땅을 많이 가진 지주가 되겠다”고 하였는가 하면, 다른 친구는 “나는 세상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미인과 단 둘이서 살겠다”고 하였으나 쿠니야는 “어른이 되면 약한 자나 고통 받는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결심을 지녔다고 한다.
이바라키 현 신지 군 카와라카이 무라 사큐에 있는 작은 소학교에서 쿠니야는 꼴지의 성적을 갖고 있었으나 분한 마음에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의 일등을 하였던 소노코보다 좋은 성적을 지닌 자가 되어 그가 무섭게 성장하는 모습을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그가 졸업식 때에는 표창을 받아 부상으로 18사략이라는 책을 받아 그 책에서 깊은 감화를 받아 자신은 섬나라보다는 중국에 가겠다는 포부를 지녔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비록 부자는 아니었으나 삼남인 그에게는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장남은 한학과 시가를, 차남은 도쿄에 보내 학업을 이수하게 하였으나 삼남인 쿠니야에게는 가업을 이어 농사를 하게 하였으므로 늘 마음에 불만을 지녔다.
쿠니야는 자신의 선조들이 한 때는 대지주였으나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몰락하여 가진 것 모두를 박탈당하고 평민으로 전락하고 오래 동안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조상에 대하여 마음에 분함을 가지면서 자신의 신분이 평민이 된 것에 대하여 개탄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큰 형과 함께 큰 무덤에 갔다가 큰 고목의 밑기둥에서 구리로 만든 土佐長會我部國谷行俊이라고 쓴 음각을 발견하고 자신의 원래의 이름인 기노스케에서 후한의 이름을 따서 유수를 떠올려 히이스라는 말로 호적상의 이름을 개명하였다. 장회아부란 시코쿠 도사라는 지역의 영주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 그가 진나라 시황제의 막내 손자로 일본에 망명한 사실을 알게 되어 대륙으로 건너가 활동해 보겠다는 웅지를 품은 쿠니야였다. 이렇게 하여 쿠니야는 농사일을 하면서 열심히 한문서적을 보면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쿠니야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열심히 일을 하여 동네에서 데릴사위를 삼겠다는 분도 있을 정도로 매우 성실한 삶을 살아왔었으나 그의 마음은 큰 뜻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간직하고 교사 지망을 위하여 부친 몰래 미토로 가서 입학시험을 치루었다. 그러나 입학하게 되면 의무연한이 따른다는 속박을 전하여 듣고는 도쿄로 행방을 감추었다. 형이 사는 곳을 찾으려고 애를 섰으나 번지를 알지 못하여 인력거에 내려진 곳은 바다 위에 작은 배가 버려진 곳이라 몸을 의지할 곳을 발견하지 못하여 군고구마 파는 집에 들어가서 고구마를 훔쳐먹다가 들통이 나 쫓겨나 우에노 공원으로 와서 배회하다가 큰 나무 밑에서 하루 밤을 유숙하고 풀이 죽어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께 사죄를 하였다.
두 번째 다시 기회를 노려 도쿄로 도망쳐 나와 당시 니혼 지역의 국회의원인 후지타 시게키치 라는 사람의 집안서생 일을 하면서 인정을 받아 나중에 의원과 함께 유럽 여행까지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냈으나 그만 의원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졸지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죽어도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갖고 청소부이며 고리대금 강제 징수 업무 등 온갖 궂은일을 하였으나 빚진 자들을 찾아다니며 이자와 돈을 징수받는 일이 자신의 본성에 맞을 것이 아닌지라 그 일도 온당치 못하여 그만 두게 된다. 쿠니야는 그러던 중 친구의 호의로 하숙비를 얻어 하숙 생활을 하게 되면서 야학을 하게 되었고 친구가 아는 분의 일을 도와주면서 지내다가 쿠니야는 정치가와 변호사들을 알게 되어 경호원으로 일을 하면서 유명 인사들을 모시고 인력거를 타고 이곳 저곳을 다녔다. 그러다가 군에 징집이 되어 근위 포병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군대에서의 생활이 맞을 리가 없었다. 졸병으로 궂은 일을 하여야만 하고 시키는 대로 하여야 하는 굴욕적인 일을 하면서 어떨 때는 고참들에게 얻어 맞어 고막이 터질 정도가 되어 한 번 때려 눕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중국 고사에서 보았던 한신의 몸을 굽혀 상대의 가랑이 아래로 지나갔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참았다. 그가 나중에 계급이 높아지면서부터는 하급자를 돕는 편에 섰다. 그가 위병 사령을 설 때에는 폐문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부하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덜 기압을 받도록 5분 정도 시계 바늘을 돌려 병사를 빨리 문을 들여보낸 후에 나팔을 불게 하여 구제하였고 근무 중 조는 자에게도 상관에게 처벌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술에 취한 병사도 쿠니야에게는 순종하였다.
3년의 군대 기간이 끝나기를 학수고대하던 일도 보람없디 1895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다시 출정 동원 훈령을 받아 만주 대련에 상륙하여 북경으로 진군하였다. 금주성에 도달하였을 때에는 삼국간섭에 의하여 휴전이 되어다가 다시 평화 조약이 깨어져 대만은 일본의 영토가 되어 키타시라 카와미야가 사령관으로 되었을 때에 대만 정벌을 위하여 여순에서 승선을 하게 된다. 대만으로 상륙한 뒤에는 포병으로 대포를 등에 지고 전투에 참여하면서 죽을 고비를 아홉 번이나 가지면서 10월 말이나 되어서야 내지로 귀환하게 되었다. 내지로 귀환하여 제대할 꿈을 꾸어보지도 못한 채로 보직을 회계 서기로 임하여 참모 본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정직한 사람에게 회계란 직무는 별반 달가운 직임이 아니다.
쿠니야는 갑자기 위해위 진주군 공병대의 회계로 파견 발령을 받았을 때에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국곡수로 바꾸면서 중국으로 귀화를 서두르게 된다. 그래서 중국어 공부에 열을 내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와 거리를 지나다가 영국인이 수십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유창하게 중국말을 하고 있어 마음이 끌려 회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연설의 내용은 예수교에 대한 설교였다. 동료인 간호장교는 예수교 설교로군 하면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쿠니야 씨는 나는 에수교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 중국어를 하는 것을 듣는 것이라고 댓구하면서 수십 분간을 경청하였다.
그때에 선교사는 여러분은 거울 없이는 얼굴을 알 수가 없지요 하면서 마치 여러분은 성경이 없이는 자신의 마음을 볼 수가 없다는 설교에 감복하여 그후부터 성경을 보게 되면서 금주를 하게 되었다. 쿠니야의 상관인 오카 사다타도 예수교 신자로서 쿠니야를 호감을 갖고 대하였다. 쿠니야는 회개를 함으로서 자신이 중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진정한 교인으로 살아가면서 동족을 구원하겠다는 일념을 불태웠다. 자신이 부족한 것이 무엇임을 철저하게 깨달은 그는 다시 영어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 부대 근방에 있던 낡고 허술한 SDA의 영어 성서 교습 간판을 보고 그레인저 교수를 만나게 된 것이 그가 일본에서 최초에 재림교회의 회심자가 된 배경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하나님의 일군을 찾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 길임을 보게 된다. 83세의 노구를 이끌고서도 전도의 일을 다한 쿠니야 히데 목사는 참으로 귀한 분으로 일본 역사의 기록에 남는 분이다. 동족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바친 분이기에 그의 이름은 반드시 하늘 책에 실리어 그가 이 땅에서 이루려다가 이루지 못하였던 중국인이 되는 소망을 하늘로 그의 국적이 옮겨져야 할 것이 아닌가! 일본에서 최초의 재림교회 신자가 되어 안수 번호 1번의 목사가 된 쿠니야 히데 목사와 한국에서의 초대 목사인 임기반 씨나 이응현 씨와 손흥조 씨와 비교를 하여 보게 된다. 쿠니야 히데 씨는 그의 생애를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주하여 신앙생활의 진수인 면을 보여주신 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의 삶은 쿠니야 히데 씨가 걸을 수 있었던 환경과 처지가 못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결코 그와 비교하여 손색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필자는 저들 삼인을 하늘나라에서 만나보고 싶어하는 간절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 저들이 심어 놓은 한국 땅에 복음의 씨앗은 계속 발아되어야만 할 것이다.
2. 조선에서의 말세 복음
아래의 기사는 쿠니야 히데 목사가 쓴 기록으로 김재신 목사의 북한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는 글로서 긴 작문의 글을 대략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김 목사께서는 1982년 8월에 일본에서 개최한 교육 행정자 협의회에 참석하여 일본 복음사에 들려서 복사하여 갖고 오신 내용이다. 20여 장으로 서술된 것으로 우리들이 이전에 아는 내용들을 생략하고 강조할 부분들을 따로 정리하여 보았다.
1. 이응현 씨와 손흥조 양인이 일본 하와이 이민을 떠나기 위하여 왔던 시대 상황을 소개할 때에 러시아인들이 많이 침범하여 가축과 재산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들을 욕보이는 온갖 만행으로 안심하고 살 수가 없어 북쪽에 사는 이들이 많이 도망을 오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이응현 씨에게는 해당될 수 있는 말이나 손흥조 씨는 아래 지방 부산 동래 사람인 고로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손흥조 씨의 경우는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시는 구한말 시기로 극도의 국가의 기강이 해이하여졌고 연이은 흉년이 있어 민초들이 살기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따라서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풍문과 광고로 인하여 손 씨는 이민을 신청하였다고 본다. 이응현 씨는 5인의 가족으로 이민을 신청하였다.
2. 이응현 씨가 다소 시간이 있어 거리를 지나다가 수많은 교회 간판들이 많이 있었으나 제칠일안식일기독예수강림교회의 간판을 보고 자신의 교회를 찾아오게 된 것이 천사의 인도라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같은 언어로 설명하여도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이 씨는 마음에 진리를 갈망하였는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필담으로 성경의 각종 진리를 이해하였다. 그는 깨달은 바의 진리를 마음속에 확신하고 이민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다. 그러면서도 회사에서 허락하여 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승선을 하게 되었고, 한 동안은 눈병으로 승선이 거절당하여 연일 성경 연구를 하러 왔다. 그러던 어느날 또 다른 동료 한 분인 손흥조 씨를 데리고 왔다. 이곳에서는 손 씨가 얼마 동안 함께 쿠니야 씨와 필담을 함께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날 밤 폭풍우를 무릅쓰고 침례를 받고 그날 밤은 거의 잠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다고 한다.
3. 침례를 받은 다음날에 발생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침례를 받은 다음날은 일요일이라 이민을 주선한 곳에서는 선상에 모여 있는 이들을 상대로 예배를 드리려던 때에 침례를 받은 두 사람이 불참하매 이를 보고 교회 목사는 저들의 경건치 못한 행위에 나무랐으나 이 씨와 손 씨는 당당하게 예배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바람에 저들에게 무어라 항변할 말이 없어 우리교회로 따지러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말은 쿠니야 목사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 목사는 하는 수없이 선교사의 도움을 빌려 그 반박에 대하여 해명할 도움을 얻고자 하였으나 선교사 역시 아는 바가 없어 답을 못하면서 성경에는 일요일이 안식일이라는 글귀가 없다고 하면서 일곱째인 토요일이 안식일에 해당되는 것은 아마도 일본과 미국과의 밤과 낮의 시간이 다른 때문일 것이라는 답에 목사는 넋이 빠져 자기 여관으로 돌아가서 친구에게 의견을 구하였으나 친구는 웃기만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웃은 친구는 임기반 씨인 것으로 생각된다.
4. 손흥조 씨가 월요일에 승선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승선 수속에 미비한 것이 발견되어 도로 귀국할 수밖에 없는 돌발 상황이 발생된다. 손흥조 씨는 한편 놀라기는 하였으나 곧 이내 마음을 평정하고 고베에서 침례를 받아 하늘의 은총을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자신이 잠잠할 수가 없어 선상에서 설교를 하였다. 이때에 임기반 씨가 그의 하는 설교의 말씀을 경청하여 마음에 감동을 받고 결심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빠졌으나 임기반 씨가 배로 돌아오기까지 선상에서 10여일을 함께 지나면서 많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임기반 씨는 고베에서 배가 출항한 후에 쿠니야 히데 씨에게 시모노세끼에서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서한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소개는 없으나 자신이 고국에 도착하게 되면 차후에 만나볼 필요성을 지닌 계획을 통보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것이 후에 임 씨가 귀국하여 우리를 도와달라는 글을 보내게 된 것이다.
5. 쿠니야 목사가 한국을 찾는 과정을 술회한다. 자신은 한국어도 모르고 여비도 없고 몸도 연약하여 갈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그러나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기도하고 나서 가기로 결정하여 모든 준비를 끝내고 한어독안내 등을 통하여 몇 마디 언어도 익혔다. 출발 전날은 갑자기 병에 걸려 밤새도록 의사의 간호를 받으며 도항을 중지하라는 권유도 받았으나 고통이 다소 덜해지는 것 같아 승선을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두려워말라 내가 도우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였다. 8월 4일에 부산항에 입항하여 8월 9일에 진남포에 상륙하였으나 자신을 마중 나온 이는 아무도 없어 당황할 때에 어떤 짐꾼이 나타나 자신의 짐을 싣고 여인숙으로 갔다. 그곳에 있는 곳이 더럽고 분위기가 사나워 날이 새자 마자 뛰어나와 조선인 하나를 만나 임기반 씨의 사정을 고하여 어렵게 찾아나서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조선인 한 분은 정원걸 씨로 생각이 된다. 어떤 기록에는 15세 정도로 언급하였으나 고증을 통하여 보면 20세로 생각이 된다. 훗날 한국 기독교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문서전도를 통하여 영혼 구원 사업에 적극 활동하였다.
6. 다소 마음의 안정은 찾았으나 대화가 되지 않아 답답함을 갖던 중에 기도를 하면서 그날 밤은 조선인의 집에서 빈대와 이와 모기와 씨름을 하면서 거적 한 장만을 갖고 거의 뜬 눈으로 새웠으며 자신의 처지 속에서 예수님의 고초를 생각하면서 그래도 감지덕지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다음날 임기반 씨가 찾아와 서로 반가운 해후를 가졌다. 이미 서한을 나눈 적도 있었던 지라 대번에 알아보았으며 방 하나를 얻어 만난 즉시 성경을 강의하여 임기반 씨가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강의할 때에 많은 이들이 듣고 놀라면서 자기네들 고향으로 돌아가 저들이 느낀 은혜들을 전하였다. 쿠니야 씨가 처음으로 간 곳이 용동이었다고 술회한다.
7. 용동에서는 김범준 이라는 감리교 신자의 부호의 집에 초대를 받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마치 신부라도 보듯이 모여들어 자기의 행동을 주시하며 시계와 지갑까지 끄집어 내어 바라보며 구두와 우산을 갖고 장난을 쳤다. 자신은 이날 따라 수 시간 밤늦게까지 강연하느라고 지쳐 실신할 정도까지 되었으나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들을 보면서 용기를 내었고 자기의 가르치는 말씀에 따라 청년들이 죄를 인정하고 침례를 받아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하면서 불과 2, 3명의 신자가 있던 곳에서 일주일의 전도 집회로 교회당이 세워지는 일까지도 생겨났다. 쿠니야 씨는 이런 일을 하는 중에서도 또 다시 병에 걸려 신음을 하며 병을 크게 앓았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기도를 드린 후에 수치료법으로 자신의 고통을 쫓아내고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임씨의 고향인 이화동으로 향하였다.
8. 쿠니야는 용동에서 임씨의 고향인 이화동으로 향하면서 사도 바울이 경험한 고후 11:26-30절의 고난의 진의를 깨달으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악한 이들에 대한 방해와 자시가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당하는 해에 대한 괴로움과 은혜를 모르는 방자함보다 더 무서운 죄악은 없음을 느끼면서 사랑의 하나님과 율법의 참뜻을 깨닫는 일이 어떠한 데에서부터 오는 것이 바로 적대시 당하고 호의에 대하여 무시를 당함에서 오는 것임 알게 된다. 이화동으로 갈 때에는 강창호 씨의 안내를 받아 갔으며 그곳은 임기반 씨가 세운 교회가 있는 곳이며 그곳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회개하여 침례 받기를 열망하였다.
9. 이곳에서 여인들이 침례를 받을 때에는 남자들의 면전에서는 겉옷 없이는 나설 수가 없어 달밤에 침례를 받게 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수명의 복면한 여인들이 침례를 받고자 사전에 결심하여 침례가 있는 날을 택하여 스스로 찾아와 침례를 받는 일이 있었다. 이 당시의 조선의 풍속은 남녀가 같은 방에서 대면할 수가 없어 방에 칸을 치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여 설교를 하였다. 이런 중에서도 서로 얼굴을 구멍난 틈으로 보는 일이 있어 이러한 관습을 없애도록 건의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근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하여 알려는 사람들로 분비되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이렇게 말씀에 대한 호응도 커져 갈 때에 찬동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이 생겨났으나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생겨나매 일대 소동이 일어나 다른 교회의 선교사들과 전도사들이 반대하면서 일본인 목사의 설교를 듣지 말도록 경고하였다.
10. 덤불처럼 뻗어나는 전도의 열기에 인간적인 제어가 아무런 효험이 미치지 못하는 중에 선돌 감리교회의 신자 과반수는 제칠일안식일이 정당함을 인정하고 또 다른 진리를 알기 위하여 제 2의 마케도니아의 부르짖음이 생겨나 임기반 씨와 몇 사람과 쿠니야 목사가 그곳으로 갔을 때에 비평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으며 도 한편으로는 무엇을 말하나 들어보자는 무리로 나뉘어졌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을 조선 사람을 대할 때에 더럽다고 경원시 하면서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으나 쿠니야 씨는 그렇지 않아 좋은 호감도 가졌었고 또 한편으로는 가난해서 그런 것이라고 빈정되는 무리들도 있었다. 쿠니야 목사는 저들과 함께 멍석을 깔고 대화를 함께 하며 먹는 일로 자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보내면서 마냥 행복함을 가지면서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곳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울 수 있는 은혜를 갖게 되었음을 술회하고 있었다.
11. 선돌 교회까지 왔다가 다시 진남포로 돌아가 미국 선교사 무어 씨를 만나러 갔다. 무어 선교사는 한국에서 근 40년간 선교사의 직무를 하여 온 분이나 재림교회에 대하여 신자도둑이란 반감을 갖고 있는 분이라서 면화와 대화를 중지한 채로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상대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 찾아오는 이들 중에는 첩자도 있고 흥미를 갖고 진리를 갈망하는 이들도 있어 날마다 회개하는 이들이 늘어나 복음이 널리 확산되었다. 이렇게 되는 동안 진남포의 선교는 주님께 맡기고 쿠니야 목사는 대동강 연안의 강대모루로 출발하였다. 임기반 씨는 집안 일로 도중에서 돌아가고 때가 조의 수확시기여서 전도 여행을 할 수가 없어 강창호 씨만을 데리고 곳곳을 순방하다가 선돌에 도착하여 이성일 이라고 하는 구도자를 얻어 사양가에 도착하였다. 산 위에서 강씨가 중앙 옥상 위에서 기가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곳이 자신이 속하여 있던 장로회라고 하면서 오늘이 예배일인데 그곳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말하면서 먼저 그곳에 가서 나의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지를 먼저 묻고 답을 갖고 오라고 하여 방문하니 일본인 목사를 보고 싶어 한다고 하여 먼저 번처럼 구경거리가 될 것을 알면서도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말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2. 예배를 드리던 중 무슨 말인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예배 끝에 넷째 계명을 암송할 때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고만 말할 뿐 그 이유에 대하여는 빠뜨린 것에 대하여 교회 책임자에게 물으니 아무런 답이 없고 단지 그것은 선교사의 명령이라고 답하면서 단지 우리는 그를 따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할 때에 쿠니야는 마 15장 9절의 말씀을 열어 가르치니 놀라는 무리가 있는 반면에 어떤 이는 비웃자 쿠니야 목사가 설교할 것을 요청하자 설교할 기회를 얻어 얘기를 하자 20분쯤 지나서 돌이 날라왔다. 통역하던 강씨가 밖으로 나갔으나 다시 들어오라고 하여 설교를 계속 하게 하여 무사히 집회를 마쳤다. 이곳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보호로 보호를 받았으나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교훈의 말씀을 새기게 되었다. 이성일 자매의 집에서 훌륭한 대접을 받고 가죽 가방을 짊어지고 대동강변으로 나가서 이안포의 강씨의 엄친의 집에서 쉬고 강대모루에 도착하여 조를 따고 있던 두 명의 형제로부터 반가운 영접을 받고 그곳에서 장로교 신자로 재림교회로 개종한 최대응 씨의 집에서 안내되어 그곳에서 얻었던 환희와 만족과 위안에 대하여 크게 기뻐하였다고 술회하였다.
13. 최대웅 씨가 사는 곳의 자연 경치를 그림처럼 표현하고 있다. 최대웅 노부부에게 수치료법으로 큰 감화를 주었고 수십 년 동안의 끽연을 단호하게 끊고 침례를 받게 한 것에 것에 대하여 잊을 수가 없었고, 침례를 주던 그날 밤에 그 집에서 전도회를 개최하여 회개한 자를 9명이나 내게 되어 삼일 간 머물러 대동강에서 침례를 주고 다시 용동으로 향하였다. 때가 9월 초에 접어들었으나 더위가 기승을 부려 쿠니야 자신의 몸에 심신의 피로가 몰려와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으나 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다가 선착장을 발견하고 작은 강을 건너 길 안내자의 도움으로 용동의 김범제 씨의 문을 두들겨 그곳에서 환대를 받고 먹을 힘도 없이 그대로 쓰러져 아침까지 잠에 골아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예배를 마치자 매추수동이라는 곳에 회개자가 나타나 침례를 받겠다고 하여 자신의 아픈 것을 잊고 5, 6리를 걸어 그곳을 방문하여 저들이 성경 말씀대로 살고 싶은 간증을 받아내어 4명에게 침례를 주고 귀로에 올라 용동에 오는 도중 유동이라는 촌락에서 어떤 부호의 간청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복음을 전하여 두 명의 청년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겠다고 하여 저들의 결심이 거짓이 아님을 보고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침례를 베풀었다. 용동으로 돌아가 예배를 드릴 때에 임기반 씨로부터 필드 목사가 한국으로 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여 들었다.
14. 쿠니야 일행은 즉시 진남포로 돌아와 진남포에서 삼일을 기다리다가 필드 선교사를 맞이하였다. 서로 반갑게 대면하여 기쁨을 나누면서 숙소를 정할 때에 싸구려 숙소에 대한 제안에 필드 목사는 나도 여러 형제들과 같이 먹고 자는 것이 좋다고 하매 불편한 곳이 염려가 되었으나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형제들의 알선을 거절함으로 같이 베게를 나란히 하면서 모기장을 치고 얼굴을 가리고 첫날 잠을 잤다. 필도 목사의 검소함에 모두가 놀랐다,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어디를 다닐 때에는 시중드는 이들을 데리고 다녔고 식량과 침구를 갖고 다녔으나 필드 목사는 가죽 가방 하나와 모포 한 장만을 덜렁 갖고 다녔다. 쿠니야 목사가 필드 목사를 만난 때는 9월 10월이었다.
15. 쿠니야 목사는 필드 목사가 여독에서 빨리 회복되어지기를 기다린 후에 곧 바로 전도지의 여러 교회들을 조직하고 안수의 계획을 세웠다. 주응동과 이화동을 지나 선돌촌에 도착하고 형제들을 모아 교회를 조직하고 강대모루로 갈 예정이었으나 안식일이 가까워지고 형제들의 요청으로 있던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형제들과 함께 하고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선교사 무어 씨가 들어와 예배의 중지를 요청하였다. 선교사 무어가 나타나 쿠니야와 필드 목사가 이 교회에서 예배드릴 권리가 없다고 항의하여 옴에 따라 분란이 생겨난 일이라 필드 목사는 그리스도인 권리를 갖고 논쟁하는 일이 온당치 못하다고 설득항 교회당을 떠나 따로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결정을 하고 산 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조직하고 교회당 신축을 결의하고 동시에 헌금을 하게 되었다. 교회당을 넘겨주어 억울하고 참페한 것 같으나 그 일로 인하여 회개자 7명을 얻게 되어 그날로 침례를 주고 교회당 신축에 대한 예산도 마련하였다. 다음 일요일 그곳을 떠나려고 할 때에 노부인이 와서 자신은 십 수년을 감리교회에 다녔는데 무어 씨의 설교를 듣던 중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사람은 모두 교회에서 추방하고 떠나라고 하였기에 나는 떠날 수밖에 없다고 호소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에 속하겠다고 하여 저들 모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재회를 약속하고 이별을 고하고 떠났다.
16. 이안포를 거쳐 강대모루에 도착하여 기다리던 형제들의 영접을 받아 긴 여행의 피로를 잊고 이틀을 머문 후에 대동강에 돛단배를 띄워 만조를 이용하여 평양으로 가려다가 예기치 않은 기상 악화로 인한 파고로 인하여 배가 침몰할 위기를 만나 뱃사공이 발을 헛딛어 물 속에 익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뱃사공과 노를 잃어 어려움을 겪던 중 배를 강변에 억지로 대고 한 노인으로부터 노를 가져와 지류를 거슬러 어떤 촌락에 대어 촌장의 집으로 인도를 받아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 그곳에서 뜨거운 죽을 대접받았던 행복함을 맛보았다. 그곳에서 교회를 조직하고 침례를 베풀고 이별을 고한 후에 다시 용동에 이르러 그곳에서 장로와 집사의 안수를 베풀고 진남포로 돌아갔다.
17. 필드 목사와 함께 시가지를 걷던 중에 한 더러운 노인 한 분이 따라오길래 따라 오는 이유를 물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여관에 들어서자 자신도 옆에 앉길래 여기까지 오게 된 연유를 물으매 노인은 지난날 촌에서 일본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듣고 회개하고 침례를 바라고 있었다고 하였다. 쿠니야 목사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의 결심이 허위가 아닌 것을 알고 침례를 베풀면서 전도를 함에 있어서 취할 태도는 사람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님을 교훈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날 약속대로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모여와서 세족 에식과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에 갑자기 대동강 맞은 편에 있는 바매기에서 두 사람의 사자가 와서 자신의 교회에 30여명의 장로회 신자가 있어 모두가 다 회개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침례를 받고 귀교회에 속하겠다고 하매 그곳에 가서 밤을 새우며 얘기를 하고 밝기를 기다렸다가 침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하고 9월 29일 진남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의 석별의 아쉬운 이별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서 항구를 떠나 10월 6일에 귀국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이로서 장장 50일간의 긴 전도의 한국행 전도여행을 마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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