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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할머니가 상점에 가서 외투를 한 벌 샀습니다. 집에 와서 입어보니 주머니 안에 보석이 들어 있었습니다.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사온 옷 주머니에 들어있으면 내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갖자니 왠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이 할머니가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할머니가 묻자 랍비가 말합니다. ‘당신은 옷을 샀지, 보석을 산 것이 아니니 상점에 가서 돌려주시오, 돌려 줄 대는 반드시 당신의 아들을 데리고 가시오, 그러면 보석을 내 놓은 것은 아까울지 모르나 그 보석보다 몇 배 귀중한 것을 아들에게 주는 것이 될 것이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보석이 문제가 아니고, 자녀에게 정직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정직하다는 것,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해보고, 때로는 외로움도 느낄 수 있고,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직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든 분들은 요즘의 찬양이 과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냐? 하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너무 혼탁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듯 하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이 부르는 찬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수준차이가 난다고 말합니다. 만 가지 악기와 뛰어난 연주로 뛰어놀 듯 찬양하는 젊은 세대와 무거우면서도 정중하며 깊은 영적인 느낌을 주는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찬양을 하는 것, 어느 것이 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님의 마음은 변함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자녀를 둔 아버지라면 똑 같습니다. 내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잘 못하든 아니면 뛰어나게 잘 하든 아버지의 마음은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는 건 악기가 아닙니다. 비싼 것으로 장식된 도구가 아닙니다. 언어를 잘 사용하는 아들이 부르는 노래건, 아직 성장하지 못한 2살짜리 딸이 부르는 노래건 상관없이 받으시는 분이 아버지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자녀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음정, 박자 심지어 가사까지도 잘 까먹어도 나쁜 언어로 부르는 노래만 아니면 다 받으시는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마음을 보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 내가 드리는 찬양, 이미 다른 사람들이 듣기도 전에 내가 부르는 노래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그런 글이 나오더라고요. 찬양대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더군요,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음악 전공자들은 박자가 틀렸다느니, 피치가 떨어진다느니 하면서 자꾸 인상을 찌푸리고 잘잘못을 따집니다. 그래서 종종 찬양대의 화합을 깨트리고 있답니다. 만약 그들이 바라는 대로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 찬양을 듣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얘깁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양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마음을 담아 부르는 정직한 찬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정직한 찬양은 “마음을 담아 부르는 찬양”입니다. |
칼럼
정직한 찬양. 부제:찬양 부르기 가장 힘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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