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갑질사회
갑질의 본질은 약자를 괴롭히기이다. 어린아이들이 잔인하게 곤충들을 괴롭히듯, 사회의 강자들이 사회의 약자들을 몰아세우는 행태이다. 성서에서 그토록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아보라고 강조하는데 갑질은 바로 그 말씀을 정면으로 뒤엎는 행동이다. 왜 ‘갑’들은 ‘을’들을 그렇게 괴롭히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논리가 ‘갑’의 머리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게다. ‘을’들은 게으르거나, 뒤떨어지거나, 못나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능하고 뛰어난 ‘갑’들이 그나마 먹고 살 수 있게 일자리를 주었으니까 ‘갑’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데, 모자라고 감사한 줄 몰라서 그렇게 한다고 ‘갑’은 확신하며, 그 분노를 ‘을’에게 융단폭격처럼 쏟아 붓는다. ‘을’은 ‘갑’에게 반려견이 아닌 애완견처럼 행동해야 하는데, 사람인 줄 착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을’은 오래 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말처럼, “사람이 아니므니다.”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갑질은 존재해왔다. 그래도 이전에는 덕이 있었다. 덕이 있었기 때문에 신분제가 있다고 해도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었고, 이웃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갑질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속한 사회가 관계마저도 소비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상품, 물품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도 소비된다. VIP도 모자라서 VVIP 서비스를 해야 한다. 손님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VIP는 특별 대접을 받고, VVIP는 황제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세상이다. 서비스는 관계이다.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펼쳐지는 상호작용인데, 누구나 존중을 받고 대하는 것이 오랜 인륜이다. 그러나 그것이 돈에 의해 왜곡되면 최고급의 서비스는 위로부터 소비되고, 남는 것은 깡통 서비스이다. 모든 웃음과 감정은 강자들에게 다 헤프게 나눠줘야 하고 남는 것은 신경질과 분풀이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돈 없는 사람은 소비에 뼈다귀만 앙상해진 서비스를 누리다가 영혼 없는 관계를 맺으며 외톨이로 살다가 돌아가셔야 한다. 고독사 하는 분들이 그런 것 아닌가? 갑질은 관계의 소비화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한 신부님이 안식년을 맞아서 휴게소 미화원으로 취직하고 경험한 이야기가 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주변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고달팠지만 견딜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멸시는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한 여성이 커피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시켰는데, 걸쭉한 커피가 나와서 구시렁거렸다고 한다. 그 신부는 휴게소 직원으로 자신의 동전을 넣고 제대로 된 커피를 뽑아주었는데, 그 여성이 하는 말이, “고마워요. 저건(걸쭉한 커피) 아저씨 드시면 되겠네”하면서 가더라는 말이다. 입고 있는 차림 때문에 멸시당해야 하는 사회의 한 단면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갑질 사회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분명하고,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지고,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갑질에 온 몸과 마음이 다 멍들고 찢어진다.
교회는 갑질에서 자유로운가? 교회는 함께 더불어 이루어가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을 배려하며 돌보고 있는가? 사회보다는 나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교회도 갑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목사들과 스태프들은 존중받고 있는가? 가난한 교인은 존중받고 있는가? 우리가 심각하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교회는 사회의 희망이다. 희망으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이 갑질 사회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가진 사람이 더 나누고, 높은 사람이 더 겸손하고, 존중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 존중할 수 있는 낮은 역할들을 감당해야 한다.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은 교회에 경종을 울린다. 사회가 돈을 섬기며 살아가는 방향에 목매달고 있다. 교회는 거기서 벗어나야 하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교회는 갑질 사회를 역전시키는 곳이어야 한다. 약자들이 수용되고 존중받는 곳, 그곳이 교회여야 하며, 교회는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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