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사 1
※ 차 례 ※ 1
1. 서 론 2
2. 본 론 2
1. 영지주의 개관 3
1) 영지주의 3
2) 영지주의의 성격 3
3) 영지주의 자료 3
4) 영지주의의 기원 4
2. 영지주의의 종류 5
1)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자 5
(1) 사투르니누스 5
(2) 카르포크라테스 5
(3) 바실리데스 5
2) 시리안계의 영지주의자 7
3) 팔레스타인계 영지주의자 7
(1) 에비온파 7
(2) 케린투스파 8
4) 로마의 영지주의 9
3. 영지주의의 사상 11
1) 영지주의의 구원론 11
2) 영지주의의 우주론 12
3) 영지주의의 윤리론 12
4) 영지주의의 기독론 12
3. 결 론 13
※ 참 고 문 헌 ※ 15
1. 서 론
교회는 “하나님의 몸”으로써 신자의 공동체의 장이다. 성서 백과 대사전. 민 영진 (서울: 성서 교재 간행사. 1981). p. 625.
이러한 교회의 초대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단들이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했던 대표적인 이단들은 영지주의와 마르시온 그리고 몬타니즘(Montanism)이다. 영지주의는 처음에 완전히 이교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혼합했다. 마르시온은 신·구약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영지주의 이원론을 기독교 가르침속에 융합시켰으며, 몬타니즘은 임박한 새예루살렘의 도래를 예언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마르시온(Marcion)과 몬타누스(Montanus)는 교회의 자식들(sons of church)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이 기독교와 유사한 데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교회내에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앞에 언급된 세 개의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통파 기독교와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가로 놓여 있었다.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은 전통적인 복음을 곡해하였고, 몬타니즘은 복음의 한 면만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영지주의에 대하여서면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영지주의의 전체적인 개관을 하여서 영지주의의 특성과 성격, 그리고 그들에 대한 자료 등을 살펴봄으로써 영지주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가능케 하고, 그들의 종류와 사상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마지막 결론으로는 영지주의가 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교부들의 이단 논박에 대하여서는 별도의 조사를 하지 않았다.
2. 본 론
1. 영지주의(Gnosticism) 지식(knowledge)을 의미하는 헬라의 단어(gnosis)에서 비롯되었다.
초대 교회사. 유스토 L. 곤잘레스. 서 영일 역. p. 100.
개관
1) 영지주의
2세기 중엽은 영지주의의 시대이다. 135년 예루살렘의 2차 함락과 193년 세베르 왕조의 즉위로 구별되는 두 세대 동안에 교회는 점진적은 헬라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영지주의 운동이다. 130년에서 180년 사이에 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교사들이 기독교의 지적 생활을 지배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로마, 소아시아, 심지어 론 벨리(Rhone Valley)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실재에 대한 이원론적 해석과 금욕주의적 윤리, 그리스도에 대한 색다른 이해, 죽음의 망각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능력으로서 지식의 강조 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영지주의는 초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3)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 177.
2) 영지주의의 성격
영지주의라는 일반적인 호칭은 2세기에 성행했던 각종 종교적 이론을 총망라해 버린 이단을 말한다. 그 특징은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이론이 가치있다고 판단되면,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예로 초대 기독교를 알게 되었을 때, 기독교가 매력이 있음을 보자 기독교를 자기네들 사상 체계에다 적용해 버렸다. 즉 페르시아의 이원론과 마술, 바벨론의 점성술, 동양의 각종 신비주의 종교, 헬라의 철학, 유대교의 율법, 기독교의 구원론 등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골격으로 하면서도 헬라의 철학을 논리적인 근간으로 혼합하였던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 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 구전(a secret oral tradition)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비밀 구전은 전승되어 내려왔고, 이 비밀의 구전을 소유한 이들이 곧 자신들이라고 한다.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 178.
3) 영지주의 자료
영지주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들로는 피스티스 소피아, 교부들의 작품들, 그리고 나그 하마디 문서들이다.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에는 발렌티누스에 대한 문헌이 담겨져 있으며, 이레니우스(Irenaeus)5) 리용의 주교로 있었던 그는 2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180년경에 이단반박을 써서 영지주의 를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지주의의 교리를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저작활동을 통해 성서의 정경, 신조, 주교직의 권위를 한단계더 높게 끌어올렸다. ‘이단반박’은 5권으로 쓰여졌으 며, 원래를 그리스어로 쓰여졌으나 지금은 라틴의 번역본만 알려져 있다.
, 히폴리투스(Hippolytus), 오리겐(Origen) 초기 교부시대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이며, 성서학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구약성서]의 6가지 판본(그리스어역, 히브리어판, 70인역, 아킬라역, 심마쿠스역, 테오도티온판)을 병기해 놓은 헥사 플라(Hexapla)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브리태니커 16권 147페이지를 참조.
, 터툴리안(Tertulluan),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이단의 신조에 맞서 싸운 주교, 주로 동방교회의 대신학자 오리겐의 가르침에 항의했다. 오리겐 을 그리스도보다 그리스철학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심하게 비판함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던 원칙 의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주요 저작으로는 그리스 철학파들, 유대교 종파들, 사마리아 종파를 포 함하여 800여개의 이단설을 다른 뒤 정통 신앙 교리를 진술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Panarion(374
-377)과 교회의 가르침들에 관한 해설집 Ancoratustua(374)가 있다.
같은 교부들의 작품에는 영지주의에 관한 상당한 문서들이 담겨져 있다. 금세기 중엽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 하마디(Nag Hammadi) 상 이집트 지방 나일강 서편에 있는 카나주의 도시이다. 주변의 농경지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을 판매하는 상업도시이다. 1945년에 영지주의의 문서인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2-3 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노시스파의 성서 사본 13부와 그 성서를 해석한 주석이다.
가 발견되기까지 노스틱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겐, 터툴리안 그리고 에피파니우스 같은 초대 교부들에의 저작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왔다. 이집트 상부에서 농부에 의해 1946년에 발견된 나그 하마디 본문(Nag Hammadi Texts)은 주후 400년 매장된 것으로보이며 이 사본들은 약 50개의 작품들의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새롭게 조명해 준다. <진리의 복음>(The Gospel of Truth)은 무지가 인간의 상실된 상태임을, <레기노스 서(書)>(The Letter of Rheginos)는 부활이 육체적 사건이 아님을, <도마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은 예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114개의 어록을 수집한 것, <빌립보서>(The Gospel according Philip)은 성례전에 대하여, <요한묵시>(The Apocrypha of John)는 우주의 기원에 관하여, <아담 계시록>(The Revelation Adam)은 아담이 노아가 홍수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셋에게 알려준다. 나그 하마디의 문서는 기독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은 있지만 직접적인 언급은 없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기독교 이전의 영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 180.→, Edwin M. Yamauchi. "Gnosticism." in
Eerdmans' Handbook to the History of Christanity. 98-9.
4) 영지주의의 기원
영지주의의 원형은 기독교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영지주의의 형태를 갖춘 하나의 사상 체계는 기독교 이후에 형성된 신학의 조류하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같은 교부들은 영지주의가 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등의 헬라철학과 상당히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 자도자들 대부분이 마술사 시몬(Simon Magus)을 모든 이단의 원천으로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그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암시적이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며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사도행전. 8:9-11.
시몬의 사상은 그의 제자 메난더에게 계승되었다. 1세기 말경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영지주의를 가르쳤던 메난더는 시몬의 추종자로서 시몬과 같은 사마리아 출신이었다. 메난더는 자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죽음으로 “시몬 못지 않게 사악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그는 “자기 스승 못지 않게 마술에 능숙하게 된 뒤 한층 오만하게 기적을 행하는 체”하여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에 대한 교부들의 기록을 보면 “사마리아의 카파라태아 마을 출신으로서 시몬의 제자가 되어 역시 마귀의 선동을 받고 있었던 메난더가 안디옥으로 와서 마술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했다는 것을 우리는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지금도 그의 몇몇 추종자들은 같은 것을 믿고 있다. 이러한 사기꾼들은 기독교인라는 이름으로 악한 술책을 사용하여 위대한 경건의 비밀을 마술에 의해 손상시키려 했고, 영혼의 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리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래서 이들을 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은 견고한 소망을 잃게 되었다.”라고 기록한다. 결국 메난더는 거짓 선지자임이 입증된 셈이다. 이들 외에도 2세기 초의 영지주의자 새투르니누스(Saturninus)가 안디옥에서 그리스도는 구속자이지만 육체를 입으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사도 요한 당시 영지주의자 케린투스(Cerinthus)가 소아시아에서 영지주의 사상을 가르쳤다.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교 출판부. pp. 181-182.
2. 영지주의의 종류
1)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
(1)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메난더의 제자였던 사투르니누스는 이 세상을 일곱 천사가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유대의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했다. 천사들이 실패로 끝낸 인간들을 하나님이 자비로서 영원한 본질을 부어 주셨으나 인간들이 물질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으면 성욕을 절제함으로써 완전한 상태에 이른다고 하였다.
(2)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
카르포크라테스는 주후 13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면서 신플라톤적 흐름에다 기독교의 구원론을 접합시켜서 상당한 호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보다도 저급한 신들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출생 이전부터 존재한 인간의 혼은 선재적 상태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영혼은 수없는 재생의 저주를 받는다. 예수는 인간으로서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나 완전한 인간이었으므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였으며 잊어버렸던 영원한 실재를 찾아서 선포하였다. 그는 구원받은 자들의 자유를 언급하면서 쾌락주의에 빠져서 윤리적인 면을 흐리게 하는 장본인이었다.
(3) 바실리데스(Basilides)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영지주의자는 바실리데스(Basilides)이다. 120년-130년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은 하드리안과 안토니우스 파이우스 황제의 통치기간(125-155)에 쓰여졌다. 바실리데스는 시몬의 사상을 그대로 전수하기 보다는 일대 수정을 가하여 새로운 영지주의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왜 그의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바실리데스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나지 않으신 아버지가 마음을 처음 낳고, 마음은 이성을, 이성은 중용을, 중용은 지혜와 권세를, 지혜와 권세는 미덕, 프린스 그리고 천사를 낳았다. 그들에 의하여 첫 하늘이 만들어졌고, 그후에 다른 하늘들이 만들어졌고 이들 하늘들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하늘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모두 365개의 하늘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바실리데스의 가르침은 심연과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 사이에서 낳은 33개의 에온을 통하여 설명하는 발렌티누스의 가르침과 상당히 흡사하다. 바실리데스는 인간의 육체는 본성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구원을 단지 인간의 영혼에 국한시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선지자들을 포섭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때문에 바실리데스는 복음서에 관한 책을 24권 저술하였으며 또 바르카바스와 바르코프 및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박해때에 어쩔수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변절하여 신앙을 버리는 것은 그대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가르침을 임의대로 수정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을 쉽게 변절하게 만들어 버렸다.
① 기독론 :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나중의 하늘을 지배하는 천사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을 지었으며, 그것들 가운데 지상과 민족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관자는 유대인의 하나님이라고 보았다. 그는 모든 다른 민족들을 자신의 백성, 즉 유대민족 아래 복종시키기를 소원했기 때문에 모든 다른 주관자들이 그에게 저항하고 그들 대적할 수단을 취하였다. ··· 그런 후 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가 ··· 자신이 낳은 첫 마음(First-begoten Mind-이는 그들이 그리스도라 부르는 자이다)을 보내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만든 이들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민족들에게 이 지상에서 한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도덕적인 행동들을 수행하였다. 그가 고난을 받지 않으셨는데 그것을 구레네인이라는 어떤 시몬이 그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시몬이 예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무지와 잘못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사람들은 시몬이 예수의 모습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구레네 시몬을 예수로 잘못 생각한 것이다. ···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고 인정한다면 그는 아직 종이며, 우리의 육체를 만든 그들(천사들)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들로부터 자유로우며, 나지 않은 아버지의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다.
② 구원론 : 구원이 단지 영혼에만 관여하는데 그것은 육체가 본성상 부패하였기 때문이며, 예언들 자체가 이 세상을 만든 권세자(Princes)들로부터 나왔고 특별히 율법은 그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출애굽시킨 그들의 권세자에게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상에 드린 제물을 경시하고 상관하지 말며,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용하고, 다른 풍습과 온갖 종류의 방종의 도덕을 상관 해서는 인될 문제로 다루었다.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p. 184-185. →, Irenaeus. Adv. haer. I xxiv. 3-5.
바실리데스의 사상은 발렌티누스에 의하여 좀더 시적이고 대중적인 형태로 체계화되었다.
2) 시리안계의 영지주의
두 번째 영지주의의 형태는 시리안계이다. 120년경에 활동했던 안디옥 출신의 새투르니우스(Saturnius)가 시리안 형태를 대표하는 영지주의자이다.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 메난더와 같이 새투르니우스는 천사들과 천사장들과 덕을 만든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아버지가 존재하며 세계와 모든 만물들이 이떤 천사 즉 7명의 천사들에 의하여 지음 받았다고 가르쳤다. 새투르니우스가 선포한 구주는 모양과 육체가 없으며 단지 안간처럼 보일뿐이다. 그는 유대인의 하나님이 그 천사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확신하였다. 모든 프린스들이 그의 아버지를 파괴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하나님을 파멸시키고 그를 믿는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는 두종류의 인간들, 즉 선인과 악인이 천사들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 최초의 인물이다. 마귀들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구주가 악인들과 마귀들을 파멸하고 선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것이며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초대 교회사. 박 용규. 총신대학 출판부, p. 187. →, Irenaeus. Adv. haer. I. xxiv. 1.2
시리안 형태의 영지주의는 다음 세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 첫째 자유 방임주의 삶을 대표하며, 둘째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구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셋째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3) 유대주의계(Judaizing Type) 영지주의자
1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유대주의계 형태의 영지주의 가운데 대표적인 분파로는 에비온파(Ebionites)와 케린투스파(Cerinthus)가 있다.
(1) 에비온파
유대주의 영지주의 형태 가운데 에비온파는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초대교회의 주요 이단 가운데 하나이다. 에비온주의는 구약성경의 “가난한 자”란 뜻의 evionim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예루살렘의 신자들에 대한 경칭이었다. 에비온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유대주의와 기독교 요소들을 자신들의 사상속에 혼합”시킨 점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낮고 천박한 견해를 품은 사람들이라고 유세비우스가 일축했던 에비온파는 단지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다. 마르시온 이단이 반유대주의인 것에 비하여 유대주의 형태의 영지주의는 친유대주의를 특색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4복음 중에서 유대주의 색채가 강한 마태복음만을 인정하고 바울서신은 부정한다. 왜냐하면 바울을 배도자로 보기 때문이다.
이들이 갖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자설이다.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탄생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의, 신중성 그리고 지혜등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 보통 안간들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고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한다. 또한 세례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 형태로 예수에게 임하여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다가 예수 생애의 말년, 십자가상에서 예수에게서 떠나갔다고 하였다.
에비온파가 교리에 있어서 통일성이 었었던 것은 아니다. 에비온파의 어떤 부류는 “그리스도는 보통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덕의 진보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자연 생식에 의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다른 에비온파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부인했다.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상과 부활과는 상관이없었고, 오히려 그들의 기대한 바에 따르면, 지상의 천년왕국이 이땅에서 실현되며, 예수의 재림시에 최초로 이땅에서 구원이 가시적인 실재로 나타난다는 생각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들에 기초해서 에비온파는 그리스도를 순수한 인간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예수가 그의 세례시 혹은 부활한 때와 같은 시기에 양자로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기독론의 원형이 되었다.
유대주의 전통을 철저히 따르는 이들은 “율법의 준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믿었으며, 율법에 따르는 의식적인 예배를 열심히 준수하였다. 사도들의 모든 서신을 부인하고 심지어 “주님을 율법에 대한 배교자”로 이해하였다. 모세의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에비온파는 율법적인 삶을 그대로 계승하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례를 강조했고 율법에 따르는 관습을 지켰으며, 심지어 유대인의 생활 양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고대했다.
(2) 케린투스(Cerinthus)
유대주의계 영지주의 이단 가운데 더 위험했던 것은 케린투스였다. 에비온파와 비교한다면 케린투스는 좀더 원색적인 이단 지도자였다. 카이우스는 자신의 논쟁(The Disputation)에서 케린투스는 “사도가 기록한 것처럼 꾸민 계시록을 사용”하고 “거짓으로 이적을 행하는 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약속’(On Promises) 제 2권에서 케린투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표방한 이단을 창시한 케린투스는 고의적으로 자신이 날조한 문서에 요한의 이름을 써넣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가 가르친 교리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교리도 있다. 그는 주색에 빠져 있었고 지극히 호색적인 사람이었으므로 먹고 마시고 결혼하며 또 그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관능적 쾌락들을 보다 우아하게 표현하는 것, 즉 축제와 희생 제사 그리고 희생물을 살해함으로서 식욕과 정욕을 만족시켰다”. 이레니우스는 자신의 저서 [이단반박(Against Heresies)]에서 폴리캅에게 받은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사도요한이 한 번은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그 안에 케린투스가 있는 것을 알고서 그곳을 뛰쳐나와 도망쳤다고 한다. 그는 그와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것조차 참지 못했으며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기처럼 행하기를 권면하며 ‘자 도망칩시다. 진리의 원수인 케린투스가 목욕탕 안에 있는한 그 목욕탕은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승은 당대 케린투스의 위치를 말해 준다. 케린투스의 가르침은 발렌티누스와 유사한 면이 많았다.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
아시아에는 케린투스라는 사람이 세상은 첫째 하나님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만물보다 위이신 주권자(the Principality)와는 동떨어지고 거리가 먼 어떤 덕(a certain Virtue)에 의하여 지어졌다고 가르쳤다. 그는 더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요셉에게서 나온 아들이지만 정의(justice), 중용(prudence) 그리고 지혜(wisdom)에 있어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다. 그리고 세례 후 만물보다 위이신 주권자에게로부터 그리스도가 비둘기 모양으로 그에게 강립하였다. 따라서 그는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계시하시고 도덕적 행동을 행하였으나 말년에 그리스도가 달아나셔서 그에게 인간 예수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가 고난을 받고 부활하였으나 본성상 영적인 존재인 그리스도는 단지 무감각하게 남았을 뿐이다.
4) 로마의 영지주의
(1) 발렌티누스(Valentinus: 104-165)
로마에서 활동한 발렌티누스(135-160)는 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그는 적대자들에 의해 보다 더 심하게 오해되어진 영지주의자이다. 발렌티누스는 그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으며, 전승에 따르면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143년에 주교로 선출되어 교황 안티세투스(Pope Anticetus: 154-68) 아래서 일했다. 그의 제자들인 프톨레미, 헤라클레온, 마르무스는 1세기 말에 각각 아탈리아, 알렉산드리아와 고올에서 영지주의를 퍼뜨리고 그 가르침을 그곳에 확산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모든 영지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
영지주의는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한다. 이 하나님을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the Unknown Father)이라 부르기도 하고 깊음(abyss)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는 홀로 있지 않고 짝을 이루므로 깊음도 여성 짝인 침묵(silence)과 더불어 있다. 깊음과 침묵이 정신(mind)과 진리(truth)라는 두 에온(Aeons, divine beings)을 낳았다. 이것이 최초의 사조(四祖:tetead)가 된다. 여기에서 정신과 진리는 연합해서 말씀(word)과 생명(life)을 낳았으며, 또다시 연합하여 인간(men)과 교회(church)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팔 조(八祖:ogdoad)를 완성시켰다. 팔조 가운데 나중에 태어난 말씀과 생명에서 10존재, 그리고 인간과 교회에서 12존재가 태어나서 30존재가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약에서 30에 대한 가르침을 찾는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몇은 1시에 다 른 이는 3시에 또 다른 이들은 6시, 9시, 11시에 포도원에 갔다. 이들 수를 합하면 30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30세에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이렇게 30존재가 15쌍으로 짝을 이루면서 있는 모습을 ‘충만’(pleroma)이라고 한다. 이 에온들은 엄격하게 자신의 짝과 더불어서만 교제할 수 있으며, 다른 에온의 짝을 넘볼 때는 ‘한계’(horos)라는 감찰자가 즉각적으로 벌을 내린다. 맨 마지막 짝이 의지(theletos)와 지혜(sophia)인데 여성 에온인 지혜가 남성짝인 의지와 상의도 없이 최고의 에온인 깊음에 대한 열정에 사무쳐서 깊음과 교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위치를 뛰어넘었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지혜의 이러한 행위를 ‘교만’(hybris)이라고 하며, 이러한 실패를 ‘유산’(abortion)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지혜의 행위로 인해서 ‘충만’안에 질서가 파괴되자 에온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에온을 생산하여 ‘충만’을 완성시킨다. 이상과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계속해서 격정을 만들어 내는데, 이러한 격정을 의인화해서 아카모트(ach-
amoth)라고 한다. 아카모트는 십자가와 한계에 의해서 충만 안에는 다시금 들어올 수 없도록 감시를 받으나 30에온들은 지혜의 유산을 방지하게 위해서 새로운 에온인 예수를 생산해 낸다. 예수가 아카모트를 욕정에서 해방시키자 욕정은 물질이 되고 예수는 아카모트를 회개시켰으며, 그 회개로부터 혼이 기원하였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충만으로부터 내려온 영지(靈地:gnosis)를 아카모트에게 수여했으며 이러한 깨달음이 영의 기원이 되었다.
물질의 기원을 에온의 열정이라고 함으로써 발렌티누스는 페르시아적인 이원론에 서서 물질을 악하게 보았다. 지혜는 에온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으므로 혼과 물질에다 형태를 부여하여 데미우르지(demiurge) Demiurge-일군, 특별히 세상을 만든자, 창조자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를 만들어서 이 세상을 창조한다. 그리고 지혜는 데미우르지가 만든 인간 안에 자리잡고서 영의 씨앗으로 지낸다. 따라서 모든 인간 안에는 지혜의 영이 자리잡고 있어서 혹은 갇혀 있으므로 인간은 영의 감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의 씨앗은 본래적인 영들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으므로 성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성장이 준비되자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안에 자신을 나타냄으로써 영을 구원해 준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가 세례받을 때에 그속에 내려와서 존재하면서 인간 속에 갇혀 있는 영의 씨앗들에게 구원의 신비한 지식(gnosis)을 전파하다가 인간 예수가 십자가에 죽을 때에 예수의 몸을 벗어나서 에온의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따라서 사실은 예수가 에온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한 지식을 받은 사람들이 영혼의 자유를 얻고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교회내는 영지를 획득한 영적인 사람들(pneumatikos)과 영지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혼적인 사람들(neumatikos)과 전혀 가능성조차도 없는 육적인 사람들(sar-
kikos)로 3구분되어 있다고 보았다. 기성 교회의 예배는 구원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사교장에 불과하므로 영지를 가진 사람들은 별도의 예배를 가졌다. 이들의 모임에는 형식적으로 직급이 없었으며 처음에는 주사위를 던져서 해당되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다가 나중에는 성령이 임하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성령의 깨우치심을 선언하는 형식으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이런 일련의 가르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발렌티누스의 체계는 어떻게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왜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가? 어디서 선과 악이 나왔는가? 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며, 어떻게 구원이 완성되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발렌티투스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 세상을 악한 물질로 보고 따라서 창조자도 악한 데미우르지라고 함으로써 구약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예수를 이원적으로 구별함으로써 4복음서의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인 것처럼 보인 에온이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한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신론과 기독론에 있어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복음과 반대된다. 또 구원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으심보다는 점성술적인 영지를 획득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며, 그것도 영혼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서 본래의 영혼의 세계로 복귀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원론의 입각해서 구원을 영혼에만 국한시킴으로서 육체로 짓는 죄는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육체적 자유방임주의(carnal libertinism)가 인정되었으며 교회의 윤리적 기초를 흔들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기성교회를 육체적인 자들의 모임으로 규정함으로써 교회의 조직과 체계를 부인하였다.
3. 영지주의의 사상
1)영지주의의 구원론
영지주의의 가장 중심적인 사상은 구원론의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영이 물질적인 것들과 연합되어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영을 이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구원이다. 사람의 몸과 동물적 혼은 물질적 세계에 속하며, 오로지 영만 몸에게 생명과 욕망과 열정을 부여해 준다. 영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신적 본질의 한 부분이다. 약간 신비스러운 설명이지만, 영은 이 세상에 떨어져서 물질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므로 영을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지식 혹은 그노시스(gnosis)를 통해서 가능하며, 여기에서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 지식은 단순한 앎을 뜻하지 않고 영원자의 계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신비적인 조명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지식이란 인간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상태에 있었으며,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아는 것이며, 이러한 앎을 통해서 우리를 물질 세계와 묶어 놓는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물질 세계와 그러한 방법으로 결합되어서 노예 상태로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영원한 지리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초월적인 영적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해방의 계시를 전달해 줄 사자(使者)가 와야 한다. 이 사자 개념은 모든 영지주의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으로, 기독교 영지주의에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이 사명을 완수시킨다.
구원 교리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영지주의의 사상 체계는 복잡한 사색적 체계들로 뒤얽혀 있다. 만을 인간의 영이 물질 안에 갇혀 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그 이유들을 갖가지 사색적인 방법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사색에는 2가지의 주된 특징적 흐름이 있다. 즉 파생적인 이원론(deriv-
ative dualism)과 숫자풀이술이다. 영지주의적 사색은 단일한 영원한 원리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른 원리들 혹은 에온들(aeons)이 하향적인 과정을 걸쳐서 생산되며, 마지막에는 가장 낮은 에온의 실수로 말미암아서 물질세계가 생산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물질과 영,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들 사이에 파생적인 이원론이 전개된다. 각종 각층의 에온들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숫자풀이술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데, 그 이유는 에온들이 숫자적 양식을 따라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숫자풀이술은 헬라적 사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향이다. 기독교 사상사(I). 후스토 L. 곤잘레스. 이 형기, 차 종순 역. pp. 161-163.
2)영지주의의 우주론
영지주의적 우주론은 이러한 파생적 이원론과 숫자적 사색의 연합을 통해서 형성된 것으로서 절대자와 물질 세계 사이에 에온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존재들은 가끔 천체적인 것으로 영은 영원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꼭 가로질러 통과해야 할 영역들이다.
3) 영지주의의 윤리론
영지주의의 윤리는 인간학과 우주론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선은 결국 인간의 영 안에서만 찾아 볼 수 있고, 몸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으로서 이렇게 상대적인 힘이 영원한 대결상태로 있다. 그래서 몸을 영에게 복종시켜서 엄격한 훈련과 금욕적 삶을 영위하고, 또는 몸이 무슨일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몸은 영의 순수성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영이 원하는 대로 맡겨야 한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로 크게 구별해 볼 수 있다.
4) 영지주의의 기독론
이들의 메신저는 그리스도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이룩한 업적은 우리들의 원래의 기원을 상기시켜 주기 위하여 지구에 오신 것이며, 또 본래 영적 저택에 귀환하기 위해 필수적인 비밀의 지식을 전달해 주고자하는 것이다. 육체와 물질은 악한것이므로 대부분의 기독교적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메신저였던 그리스도가 우리들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어떤이들은 그의 육체가 단지 유령에 지나지 않으며 기적적으로 진짜 육체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적 “그리스도(Christ)”와 지상적 “예수(Jesus)”를 구분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우리들의 육체와는 다른 “영체(spiritual matter)”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초대 교회사 . 후스토 L. 곤잘레스. 서 영일 역. pp. 102-103.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님의 탄생을 부인하였다. 만일 물질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하나님의 의지로써 생성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적하는 다른 원리에 의해서 생성되었다고 보면 물질과 인간의 육체는 지고하신 하나님이 계시를 나타내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의미의 신체적인 몸이 아니고 다만 몸을 가진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의 고난과 죽음도 참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악과 물질의 파괴적 힘에게 굴복당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가현설(Docetism)이라고 부르는 기독론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3. 결 론
영지주의는 정통주의의 형성에 간접적인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단들의 도전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이단 사상이 등장하면서 정통 기독교 교리가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점에서 이단 사상은 기독교 사상사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단의 등장은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이단이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사도신경과 일련의 신조들이 역사에 등장하였으며, 정경의 발전 역시 이단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단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이단의 판단기준들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니케아 회의 325년 열린 첫 번째 에큐메니칼 공의회이다.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초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 가 소집하여 개회식을 주제하고 논의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때문에 발생한 동방교 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하였다.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성자 성부의 동등함을 나타내 기 위해 성서에 없는 단어인 “호모 우시오스(‘본질상 같다’라는 뜻)”를 니케아 신조에 포함시켰다. 이 공의회에서 여러 가지 교회법을 반포했는데 그중 주교 서품절차, 성직자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에 대한 정죄, 주교와 사제, 부제가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등이다.
이후이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신약성경 이외에 정통신앙의 보편적 표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케아 회의 이후 나케아 신조가 이단 판단의 기준이 되었으나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성경과 신앙율, 사도들의 가르침들이 이단의 판단기준이 되었다.
우리가 영지주의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지적해야 할 사실은 초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단을 비판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단들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요소들이 이단들뿐만 아니라 정통주의라고 분류되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에게 상당히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에 사상계를 지배했던 중기 플라톤주의, 스토아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기독교와 융합되어 나타난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다. 영지주의를 비판했던 저스틴의 사상에 영지주의의 핵심 사상인 플라톤사상이, 터툴리안에게는 스토아의 직선적인 사고가,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에는 플라톤주의의 색체가 농후하게 나타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80-200)는 바실리데스와 발렌티누스를 마르시온과 연결시키고, 오리겐의 요한복음 주석은 반세기 저에 쓰여진 해라클레온의 요한복음 주석의 도움을 받아 쓰여졌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자들은 다음 2세기 후에 알렉산드리아 신학파를 형성하는 기초를 놓았다. 기독교 플라톤주의도 영지주의에 상당히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영지주의가 많은 기독교적인 용어들을 차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성육신, 구원, 삼위일체, 성령과 같은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 참 고 문 헌 ※
1. 차 종순. 교회사. 한국 장로교 출판사.1992, 2쇄 발행.
2.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이 형기, 차 종순 역.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4, 8쇄 발행
3. 차 종순. 교리사.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4, 2쇄 발행.
4. 박 용규. 초대 교회사. 총신대학 출판부. 1994.
5. 헨리 채드윅. 초대 교회사. 서 영일 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3.
6. 유스토 L. 곤잘레스. 초대 교회사. 서 영일 역. 은성 출판사. 1992 6판
7. 이형기. 세계 교회사 I. 장신대학 출판부. 1994.
8. 해리 R. 모어. 단편 초대 교회사. 백 성호 역. 1986.
9. 브리태니케 대백과 사전. 3. 4. 15. 16. 17권. 한국 브리태니커,
동아일보 공동출판. 1992.
초대 교회사
1. 사도시대
%% 때가 차매 %%
복음전파를 크게 촉진시킨 몇가지 요인
1) 로마제국의 정치적 통일과 오랜 동안의 평화로 인한 상업도로의 발전
2) 알렉산더에 의한 헬라어의 보급=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주전2세기)
3) 수많은 종족과 종교들이 섞여 사는 범세계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은 신앙을 잃어가
고 있었다.
4) 도덕적 상황의 부패(로마서 1장 참고)
5) 동양의 운명론과 절망적 분위기가 서양으로 파급
이런 우울한 분위기가 어둠속에서 빛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초기 %%
교회사의 시초에 대하여는 신약성경이 가장 중요한 자료다.
오순절에 능력을 받아 복음이 세계도처로 전파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바울의 회심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동방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던 안디옥에서 가장 뛰어
난 이방인의 사도를 파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방인의 개종으로 유대교
의 율법과 의식에 대하여 어느정도까지 준수해야 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되
었다. 이 문제는 주후 49년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바울의 승리를 일단락되었으
나 반대자들은 바울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다.
복음은 유럽으로 옮겨갔으며, 바울은 체포되어 로마로 갔으나 오히려 가이사의 집
사람들도 믿게 되었다.
베드로도 바울 못지 않은 사도로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으며, 바울의 순교즈음에 베
드로도 로마에서 거의 동시대에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거나 교황이 베드로의 교좌를 이어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 사도의 메세지 %%
당시의 메세지에 대하여는 바울이 고전15/1-11에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예수"라
는 이름이 구새주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곧바로 그런 의미를 전달해 주었으며 부활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주장하는 증거가 되었다. 이 가르침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어서
부활후 18년이 되는 해에는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들의 성격이 변화되고 우상숭배를 멀리하게 되었으
며 심지어 노예들도 교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한다.
%% 초기 박해 %%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며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
희도 핍박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최초로 스데반이 순교당한 후 유대인들은 적극적으
로 반대하였으며, 로마인들도 황제숭배를 거절하고 공직을 마다하는 이들에 대해 적
대적이었다. 주후64년 네로황제는 로마의 화재사건의 범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
하였다. 당시 네로를 싫어하던 타키투스라는 저술가도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해로운
미신을 전하는 자들로 인류의 적으로 몰아 죽여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 예루살렘의 멸망 %%
네로의 박해가 끝나기 전 팔레스틴에서 무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로마인들로 부터
자신들의 땅을 되찾아야겠다고 느낀 열심당원들은 로마군 수비대를 학살하기에 이른
다.초기에는 몇 번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은 포위당하
였으며 유대인들은 영웅적인 저항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과 유대
인들로부터 비난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예언하신 재앙의 날로
알고 요단강 건너 펠라로 피신하였다. 수십만 명이 칼에 죽고 기근과 흑사병으로 죽
어갔으며 성전을 불살라지고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 초대교회의 조직과 특별한 은사들 %%
임시직..사도,선지자,전도자
영구직..장로(presbuteros),감독(episcopos),집사(diakonos)
사도라는 단어는 보냄받은 자라는 뜻으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나바나 에바브
로디도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열 두 사도는 특별한 계층에 속하는 자들이다. 하나
님의 능력과 감동을 입은 자들이다.
선지자들은 현재,미래,과거를 막론하고 영감받은 진리의 보도자들이었다. 사도 다음
계층에 속하였으며 2세기 중반이후로 점차 사라졌다.
전도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사도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디모데나 빌립은 전형적인 전도자의 모습이다.
장로와감독은 동일 직분임이 여러 증거를 통하여 드러났다.
집사는 종 혹은 사역자라는 의미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부금이나 재산등을 관리하
는 사람을 의미한다.
처음 두 세기 동안에는 교회조직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삶 및 예배의 본질이 단순했
다. 즉, 형식주의나 허식이 전혀없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가정이나
두란노 서원등의 공적인 장소에서 할 수만 있으면 예배를 드렸다. 예배는 성령의 인
도로 자유스럽게 이루어졌으며 예배서를 통한 형식의 틀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교
회는 매우 활동적이어서 동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파르디아로, 서로는 골과 스페인
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2. 제 2 세기
제 2세기의 초반 70년은 교회 역사상 가장 모호한 시대이다. 주후96년 도미티안 황
제가 죽음으로 박해는 점차 줄어들었다. 도미티안은 말년에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
져서 그를 가리켜 제 2의 네로라고 하였다.
%% 초대교회의 문서들 %%
* 로마의 클레멘트 서신.. 이레니우스의 글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로마의 제 2대 감
독이었다고 한다. 그의 편지 내용에는 자신의 교회 이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 같이 전 세계의 교회를 관할하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
는 점이 특이하다.
* 열두 사도의 교훈집=디다케.. 유대적 관점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비영적이며 육체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적 관습과 금식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시대부터는 선지자들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선지자를 사
칭하는 사기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 그가 보낸 7교회의 편지에는 가현설이라고 불리우
는 초대교회의 이단과 관련하여 반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현설에 의하면 세상에 사실 때의 그리스도는 참 육신이 아니라 환상적인 육신을
가졌으며 그러므로 그의 고난도 환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그나티우스는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감독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그나티우스는 여러 감독들의 대표격인 장로를 감독(bishop)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감독은 한 사람의 장로이지만 영구적인 목회자의 성격을 가
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 서머나의 폴리갑.. 2세기에 알려진 최고 성자요 순교자이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
한 사람이었으며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때에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인내와 유명한 말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
한 지방총독에게 한 그의 답변이다.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왔으나 그 분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
* 져스틴 마터.. 그는 초기 변증가라고 한다. 그의 변증서에는 철학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사상체계는 아주 독특
하였다. 그의 글을 통한 예배의 형식을 보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경낭독,사회자의 강론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의한" 즉석기도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장관 쥬니우스 루스티쿠스에 의하여 사형성고를 받았는데 "너희들은 다시 살아
나서 영원히 살 줄로 상상하느냐?"라는 질문에 져스틴은 "나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
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 초기 이단들 %%
2세기에는 여러 이단들이 일어났다.
* 나사렛파.. 이들은 바울을 몹시도 괴롭히던 초기 유대주의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다. 이들은 예루살렘 멸망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관습을 버린 후에도 끝까지 집착
하던 자들이다. 약 4세가경 까지 존재하였다.
* 에비온파.. 나사렛파와 유사하나 훨씬 더 급진적인 사람들이다. 유대의 율법을 강
조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세례시에만 성령이 함께하였으며 십자가상에서는 성령이
떠났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 영지주의.. 이들의 영향력은 광범위하여서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이 퍼
졌다. "영지"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헤라어 그노시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비의적
이고 신비한 영적인 사람들만이 이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물질을
악으로 여겼다. 이들의 도덕적인 생활은 처음에는 엄격하였으나 종종 방종과 방탕으
로 빠져들곤 하였다. 이들중에 유명한 이들로는 발렌티누스와 바실리데스가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는 시노페의 말시온이다.
그는 열심있는 사람이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
니라고 하였다. 구약의 신은 비토스라고 하는 말로 다 할수 없는 거룩한 존재로 부
터 유출되어지는 30개의 유출물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마지막에 해당되는 물질의 창
조의 신 데미우르지라고 한다.
* 몬타누스 주의.. 몬타누스 주의가 나타날 때의 교회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없었고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몬타누스는 성
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열광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천년왕
국시대는 감각적인 쾌락이라고 말하여 교회의 재림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다. 점차로
감정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사색과 감정에 치우
치게 되었다.
3. 초기 교부들
2세기의 교회는 영지주의에 의한 환상적인 사변과 다른 편으로는 반지성적인 환상적
극단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시기를 이끌고 나간 여러 교부들이 등장하게 되
는데 이들에게는 세 가지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었다.
1) 신약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