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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절실하게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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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과 자비에 대한 같은 점과 차이점에 대해 비교 분석을 원하여 글을 작성해 본다. 송구스럽지만 이런 요청은 엄청난 시간 속에 분석을 해야 하며 많은 양의 글로 비교의 내용을 전달해야 되는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시간과 재정적인 뒷받침 없이는 감당할 수 없음을 먼저 알려드리고 간단하게 글을 전하고자 한다.

 

   자비라는 단어와 긍휼이란 단어는 같은 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져야 하는 관계 속에서 깊이 동정하여 불쌍히 여기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비는 불교용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불교의 전용적인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으며 타 종교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어느 특정단어를 어느 종교의 전용물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다뤄야 할 것이다. 예배라는 단어도 사실은 불교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배례라는 단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사찰에 삼신당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자비라는 단어는 자(慈)를 적극적, 공세적(攻勢的)인 사랑으로서 아버지의 사랑, 비(悲)를 소극적, 수용적(受容的)인 사랑으로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하는 해석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적인 용어로서는 아주 적합할지도 모른다. 원래 불교는 검정색과 흰색이 서로 교차된 회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단어를 선호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라는 단어는 긍휼이란 단어를 기초한 가운데 이뤄지는 언행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자비는 긍휼이란 기초가 없이 이뤄질 수 없는 단어로 자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헤세드’(ds,j)라는 단어는‘힘’이란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파생되는 힘을 자비라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관계 속에서 이뤄진 에너지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명사 [라하민 !ymih}r']도 어근은[라-한 !j'r;(rachan),piel.]으로서, 이것은 태(胎)를 뜻하는 [레헨 !j,r,(rechen)] 의미로 하나님의 속인 자궁 안에 들어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하는 것이 자비를 의미한다.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구절의 의미는 내게 도움과 혜택을 달라고 의미도 되지만 하나님 편과 입장에 설 수 있게 해 달라는 색다른 뜻을 담고 있다.

 

   사람은 자신 스스로 자비를 베풀거나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내 안에 신적인 존재가 절대적인 도움 없이 이뤄질 수 없는 언행을 의미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 자비라는 허울 속에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하다. 자비와 긍휼을 내 안에서 나올 때 그것이 나의 인격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그 분의 속성인 자비와 긍휼이 나타나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풀거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선행을 할 때 나오는 자비와 긍휼은 사람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 할 수 있으며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라는 단어마저도 깨닫는 존재를 의미하고 있다면 내 안에 신적인 속성이 형성되어 나온 상태를 의미한다.

 

    긍휼이란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긍휼이란 단어를 모조리 찾아보면 의미심장하게 표현 구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시편 85:10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산상수훈 내용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표시하고 있음) 119: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으로 즐거움을 찾는 상태119: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많으오니 주의 규례들에 따라 나를 살리소서.(하나님께 매달려 생명의 말씀을 공급받기 원하는 차원)

 

   긍휼이란 단어는 자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라하민 동일한 단어로 헬라어에서는 똑같이 엘로스(e[leo")를 사용하고 있다. 사람 사이에서는 연민과 동경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단어가 사용하는 배경과 언어전달에 있어서는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원어를 접하는 상황이 된다고 할지라도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을 전부 다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원어성경을 접한다고 할지라도 난관에 부딪히는 이유 중 하나는 가다가 연결고리가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지는 것을 경험해 본 분들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이때 중단하고 포기하는 등 계속 연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어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멘토 없이 공부할 때다.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것은 내 처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께 매달려 생명의 말씀을 공급받기를 원하는 상태와 차원을 뜻하고 있다. 한글로 된 성경을 보다가도 끊겨지고 영어로 보다가도 끊겨지고 원어로 보다가도 끊겨지는 장애물을 만나면 난감해질 때가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앞에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혼의 역량의 한계를 인정하고 영적인 진리를 사람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했던 나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신학교 학력으로도 신앙의 연륜으로도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계속 이어서 긍휼은 자비라는 단어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자, 의, 공의, 정의, 그 밖에 여러 단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호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의에 주리고 목마른 존재는 반드시 열매를 얻게 되어있음호 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연합되어 살아가기 원하시는 표현임)

시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별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사상과 생명에 주리고 목마른다면 샘물의 근원으로 인도함을 받는 즉 본질적인 신앙생활에 돌입하는 것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무엇에 긍휼함과 자비함을 얻기를 원하는가? 여러분의 잘못된 언행으로 인해 죄의 용서인가? 도말인가? 용서와 도말은 엄청난 차이가 갖고 있다. 용서는 나의 잘못된 죄를 기억하고 있는 상태이지만도말은 나의 모든 잘못된 언행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고 있다.

롬 11: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주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왜 우리를 죄와 불순종 가운데 두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함)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을 잘 듣는 존재라면 불순종이란 단어가 없었을 것이다. 불순종의 단계에 돌입하지 않았다면 예수가 필요 없고 하나님도 필요 없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도 없을 것이며 교회도 예배당도 필요 없는 것이다. 진정 긍휼을 구하는 교회, 긍휼을 찾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롬 12:8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때로는 우리가 병에 걸려 어려움을 당하고 기업의 실패나 진로의 어려움을 겪게 하는 이유는 내 주위에 이와 흡사한 일들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게 하려는 의도를 발견할 것이다. 그래야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존재하지 않는다. 긍휼함을 맛본 자만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다. 긍휼과 자비로움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긍휼과 자비로운 존재인가? 성찰해 보라. 과거 하나님께로부터 긍휼과 자비로움을 받았다면 받은 대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갚아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한국교회가 가장 절실하게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회개와 개혁이 아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 생명을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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