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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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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제막식

“나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건강이 회복되어서
제발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나는 지금 조선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곳이 내가 사랑하고 수고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것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정복되지 않았고, 장엄하고, 자유로운 곳. 미국….

하지만 나로서는 동쪽 해안에서 먼 곳 조선. 경산 지역, 
나의 선택받은 백성이 있으며 그곳은 채워야 할 나의 장소입니다.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의 생애와 힘의 마지막을 소비해야 할 곳입니다.
나로 돌아가게 하소서.”

위의 글은 왕아시(미국명: Rufus Conrad Wangerin) 선교사가 경산(그 당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선교 본부)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폐결핵에 걸려 미국에 돌아가서 치료 중에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이다.

어제 왕아시와 그의 부인 왕대아(미국명: Theodora Scharffenberg) 선교사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이들 부부는 1911년 조선의 경상북도 경산읍 성암산 자락에 선교 본부를 정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건물이 없어서 우선 천막을 쳤고, 그 천막을 두 개로 분리한 다음에 한 곳은 숙소로 사용하고, 다른 한 곳은 예배 장소로 사용했다. 

그 당시 경산 사람들은 서양의 백인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궁금함보다는 파란 눈의 백인을 구경하기 위해서 많이 모였다고 한다. 특히 왕아시 선교사의 갓난 여자 아기의 모습이 신기해서 서로 보기 위해서 줄을 설 정도였고, 하루에 천명이 서양 아기를 보러 오기도 했다고 한다.

왕아시, 왕대아 선교사의 기념비 제막식을 통해 나는 누구보다도 깊은 감동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들이 조선의 땅, 그것도 경산이란 지역에서 선교 본부를 두고 활동했기 때문에 내가 재림 교인이 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따라 예수교장로회 경산중앙교회에 다녔다. 그러다가 우연히(하나님의 섭리로) 영남삼육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6개월 넘게 교리 토론과 투쟁 끝에 1974년 9월에 재림 교인이 되어 지금까지 50년 동안 재림 교인으로, 40년 동안 재림교회의 목사로 살고 있다.

경산의 성암산 자락에 왕아시, 왕대아 선교사가 남조선 지방(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선교 본부를 세웠고, 나중에는 그 성암산 자락에 영남삼육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나는 그 학교를 통해 재림 교인이 되었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1911년에 왕아시 선교사가 경산에서 선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영남삼육학교가 경산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나는 재림 교인이 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왕아시, 왕대아 선교사의 활동에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들을 통해 섭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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