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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누구를 위한 땅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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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누구를 위한 땅이었나? ‘자유의 여신상’과 ‘헤이마켓 사건’

뉴욕항 리버티 섬에 위치한 자유의 여신상. 공식 명칭은 ‘세계를 밝혀주는 자유의 상(Statue of 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다.

“나에게 다오.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숨쉬기를 갈망하는 무리들을. 부둣가에 몰려든 가엾은 난민들을. 거처도 없이 폭풍에 시달린 이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나는 황금빛 문 옆에 서서 그대들을 위해 횃불을 들어올리리라.”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받침대에 새겨진 19세기 미국 시인 에마 래저러스(Emma Lazarus, 1849~1887)의 시(詩)다1). ‘자유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옮겨져 1886년 10월 28일 뉴욕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신상의 공식 명칭은 ‘세계를 밝혀주는 자유의 상(Statue of 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었다. 고대 의상 차림에 횃불을 높이 든 여신상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에서 기증한 것으로 무게는 225t, 지면에서 횃불까지의 높이는 93.5m에 이르렀다.

자유의 여신상, 자유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베들로 섬(Bedloe's island, 1956년에 리버티 섬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열리는 자유의 여신상 제막식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때에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물 창에서 색종이를 뿌려댔는데, 이후 퍼레이드에 색종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섬이 너무 좁아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자 섬 주변에는 수백 척의 배 위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1837~1908) 대통령이 축하 연설을 했다.

1886년 10월 28일 뉴욕항에 모습을 드러낸 자유의 여신상. 제막식에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참석해 축하 연설을 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 정치인 에두아르 르네 드 라불라예(Édouard René de Laboulaye, 1811~1883)의 주도로 만들어졌고, 설계는 프랑스의 유명 조각가프레데릭 바르톨디(Frederic A. Bartholdi, 1834~1904)가 맡았다. 바르톨디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Ferdinand-Marie de Lesseps, 1805∼1894)과 친해서 이집트를 자주 방문했는데, 이집트와 로마의 고대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대 이집트의 사라진 유적 ‘알렉산드리아 등대’와 로마제국의 리베르타스(자유의 여신)상 같은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어했다.

그런 그의 꿈을 이뤄준 것이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입상은 1884년 완성됐으며,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파리에 서 있었다. 여신상을 분해해 배에 싣는 데만도 엄청난 기술과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해체와 분해, 재조립을 맡은 사람은 5년 후 에펠탑을 건축할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데엔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1911)의 <뉴욕 월드>가 큰 역할을 했다. 라이벌인 <뉴욕 헤럴드>의 제임스 고든 베넷(James Gordon Bennett, Jr., 1841~1918)은 그 조각상을 그냥 프랑스에 남겨두고 대신 미국독립전쟁에서 식민지 주민들과 함께 영국에 맞서 싸웠던 프랑스 귀족 라파예트(La Fayette, 1757~1834)의 조각상을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뉴욕타임스>는 이 ‘청동 여자’가 지금 우리의 재정 상태로는 진정한 애국자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퓰리처의 승리로 끝났다.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항에 들어왔을 때부터 1902년까지 항구의 등대로 쓰였다. 당시 여신상 꼭대기의 불빛은 40㎞ 밖 바다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미국 최초로 ‘전기를 사용한 등대’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롱아일랜드 항공학교 졸업생인 파일럿 후안 파블로 알다소로는 1913년 졸업비행 삼아 여신상의 머리 위를 날았다. 이후 이 학교 졸업생들에게는 여신상 위를 나는 것이 관행이 되었고, 훗날 ‘얼리 버드 비행쇼’로 굳어졌다. 여신상은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2).

미국은 과연 지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땅이었나?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것처럼, 미국은 과연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땅이었던가? 1880년대엔 550만의 이민자들이, 1890년대에는 400만의 이민자들이 미국 내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모든 이민자들이 자유의 여신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유의 여신상 좌대 건축을 위한 모금 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유를 받은 한 중국인은 “우리에게 기부금을 요구하는 것은 모독 행위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횃불을 든 여신상, 그것은 자유를 상징한다. ……중국인들은 다른 유럽계 이민자들처럼 자유를 누리며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가? 중국인들이 이 사회에서 과연 모독과 학대, 폭력과 차별 그리고 린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이 나라에서 중국인들은 시민이 될 자격이 없으며 따라서 변호사도 될 수 없다. 미국은 중국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만이 자유로운 땅일 뿐이다3).”

그렇다면 당시 중국인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었던가? 중국인이 1880년경 30만 명으로 증가해 캘리포니아 인구의 10분의 1을 차지하자, 미 의회는 1882년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을 만들어 중국으로부터의 노동이민을 금지했다. 이 법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선 “중국인들은 자율 정부 구성에 필요한 동기를 제공할 두뇌의 용적이 부족하다”와 같은 중국인 비하 발언들이 쏟아져나왔다.

‘중국인 배척법’이 제정되었던 1882년의 정치 만화. “자유의 문”에 입장이 거부된 중국인 남자를 그리며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어딘가에 선을 그어야 합니다(We must draw the line somewhere, you know)”라고 말하고 있다.

이후로도 중국인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1885년 와이오밍의 록스프링스(Rock Springs)에서는 한 무리의 백인들이 500명의 중국인이 모여 사는 부락에 침입해서 단지 그들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28명을 살해하고 수백 명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서부의 법정에서는 중국인들에게 정당 방어권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기회가 전혀 없다(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는 서부 특유의 표현이 생겨날 정도였다4).

1888년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중국인들이 “미국의 평화와 복지를 위협한다”고 선언했으며, 그의 정적인 공화당의 벤자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 1833~1901)도 거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중국인을 비난했다. 즉, 중국인은 완전히 ‘이질적인’ 인종이기 때문에 미국인과의 융화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5).

이런 인종차별은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베들로 섬 근처의 엘리스 섬(Ellis Island)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있는 에인절 섬(Angel Island)과 설리번 섬(Sullivan Island)에 관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 정부가 교과서에서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엘리스 섬에 도착한 유럽계 이민자들은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곧 자유의 도시 뉴욕에 도착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1910년 문을 에인절 섬 검문소는 아시아인 이민을 억제하기 위한 일종의 이민자 수용소였다. 최고 3년까지 이곳에 갇혀 지내야만 했기 때문에 사실상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흑인 노예들은 설리번 섬에 노예로 팔려왔다. 엘리스 섬이 자유를 상징한다면, 에인절 섬과 설리번 섬은 수탈과 압박 그리고 노예제도를 의미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평화, 민주주의 등은 백인만을 위한 것이었다6).

메이데이를 낳게 한 헤이마켓 사건

백인들 중에서도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전국 총파업 사건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에 도착한 1886년은 ‘노동자 대반란의 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노동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남부의 사탕수수 농장들에서도 노동조합이 형성되었고, 이런 기세를 몰아 노동자들은 파업을 일으켰다.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총파업이 전국 1만1,500여 곳에서 약 35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는 당시로선 놀라운 사건이었다. 5월 1일이 메이데이(May Day, 노동절)가 된 이유다7).

시카고에서만 4만여 명이 파업에 동참했는데, 5월 3일 시카고 맥코믹리퍼사의 파업 파괴자들이 노동자들의 공격을 받자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발포하여 6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헤이마켓 광장(Haymarket Square)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출동한 경찰의 한가운데에 폭탄이 떨어져 경관 7명이 사망하고 67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경찰은 군중에 발포해 1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을 당했다. 경찰은 아나키스트 시위 주동자에게 책임을 돌렸고, 아나키스트에 대한 공포가 전국을 휩쓸었다. 수개월 내로 아나키스트 파업 주동자 여러 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선고를 받았다. 4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다른 사람들에겐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1886년 5월 4일, 시카고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벌어진 헤이마켓 사건을 묘사한 판화.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누군가가 던진 폭탄에 경찰과 시위대 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헤이마켓 사건은 유럽 좌파들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주동자들의 사형 집행을 반대하는 대중집회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열렸으며, 런던 집회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A. Kropotkin, 1842~1921) 등이 참여했다. 아나키스트인 크로프토킨은 런던 집회에서 연설을 했으며, 피고에 대한 사형선고를 반대하는 편지를 미국 언론에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헤이마켓 사건의 의미에 대해 역사가 폴 애브리치(Paul Avrich, 1931~2006)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이마켓 사건은 종종 시카고에서의 폭발 사고, 즉 많은 경찰관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네 명의 아나키스트를 교수형시키고 다섯 번째 아나키스트를 감방에서 자살하게 만든 사건, 미국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의 몰락을 촉진했던 사건이라고 얘기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그 반대가 진실이다. 헤이마켓 처형은 이민자와 미국 토박이들 모두에서 아나키즘의 성장을 자극했고, 이후 아나키스트 모임의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8).”

헤이마켓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8명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이후 미국 사회에서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공포와 과격한 노동운동에 대한 비난 여론이 전국을 휩쓸었다.

헤이마켓 사건 이후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모임 중에는 1886년 10월 9일 뉴욕에서 결성된 자유개척단(the Pioneers of Liberty)이 있었다. 미국 최초의 유대인 아나키스트 모임인 자유개척단은 사형 위기에 처한 시카고 동지들을 구해내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887년 11월 11일 4명이 처형된 뒤에도 아나키즘 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1889년 7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설립 대회에서는 미국 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위한 운동 상황을 보고받고,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 단결의 날’로 정해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한 세계적인 시위를 결의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헤이마켓 사건이 ‘메이데이’를 낳게 한 셈이다.

헤이마켓 폭동 이후 지도자인 테렌스 파우덜리(Terence V. Powderly, 1849~1924)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업에 참여한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에겐 아나키스트라는 오명이 씌워졌다. 1869년 필라델피아에서 유리아 스티픈스(Uriah S. Stephens, 1821~1882)가 재단사들의 비밀 조직으로 창립한 노동기사단은 1879년 파우덜리의 지도하에 양지로 나온 뒤 전국노동조합 1세대로서 상당한 정치력과 교섭권을 획득함으로써 1884년에는 70만 명 이상의 조합원을 거느리게 되었고, 바로 이 힘 덕분에 철도 재벌 제이 굴드(Jay Gould, 1836~1892)가 노동기사단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기사단은 시카고의 파업에 말려들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늘 노동자의 편을 들어온 조지프 퓰리처의 <뉴욕 월드>마저 아나키스트들을 ‘다이너마이트 악마’라 부르면서 통렬하게 비난했다. 퓰리처는 노동단체들에게 “독을 품은 파충류와의 접촉을 피하듯이” 아나키스트들과 기타 급진주의자들을 피하라고 촉구했다. 과격한 노동운동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면서 1890년 노동기사단 조합원 수는 6년 전의 70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9).

다양한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된 미국 노동운동의 현주소는?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바꾼 새뮤얼 곰퍼스. 급진적 사회주의를 배제하고 온건하고 정책적인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 조건 개선에 주력하였다.

노동기사단이 쇠퇴하면서 그 공백을 메운 인물이 미국 노동계의 대부로 통하는 새뮤얼 곰퍼스(Samuel Gompers, 1850~1924)다. 영국계 유대인으로 담배 제조 노동자 출신인 곰퍼스는 사회 개선이라는 유토피아적 환상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좀 더 좀 더, 바로 지금 당장(More and More, Here and Right Now)”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치적 목적이 아닌 노동시간, 임금, 안전 등과 같은 실리적인 것에 치중했다. 노동기사단의 대중 조합주의에 반대한 그는 헤이마켓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해에 숙련공 노동조합의 연합체로 미국노동총연맹(AFL: 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을 결성했다.

결성된 해에 조합원 수는 15만 명에 이르렀지만, 미국노동총연맹은 “흑인들은 신청할 필요 없음”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곰퍼스는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음에도 “무식한 흑인들에게서는 우리가 사랑이나 존경이라고 배워온 자질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없다, 이 몸집이 집채만한 자들은 무식하고 유해하고, 아주 동물적 근성만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유진 뎁스(Eugene Debs, 1855~1926)가 이끄는 사회당도 흑인들의 문제는 사회주의적 평등이 실현된 후에 저절로 오는 것으로 보고 문제 삼지 않는다.

곰퍼스는 1886년부터 1924년까지 연맹회장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파업을 벌여 8시간 노동, 주 5~6일 근무, 사용자 배상 책임, 탄광의 안전 개선 등과 더불어 단체교섭권을 따내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하여 1901년에는 조합원 수 100만 명을 돌파하게 된다10).

곰퍼스가 노조 조직자로서 이처럼 성공할 수 있게 된 비결은 조직의 범위를 숙련 기술자들에게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 방법이 점차 발전하자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의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엔 곰퍼스의 미국노동총연맹은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를 주입시키는 일을 방해하는 주요한 장애물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다11).

훗날 레닌(Vladimir Illich Lenin, 1870~1924)은 곰퍼스를 ‘부르주아의 첩자’라고 비난하지만12), 미국은 러시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된 이민의 물결은 러시아식 단일 대오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미국 노동운동의 기조를 곰퍼스가 만들었다기보다는 미국의 그런 특성이 곰퍼스를 만든 것이다.

앵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1886년 미국 노동자들의 단결이 어려운 책임의 일부를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회주의자들의 행태에 물었다. 이들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독일에서 나온 강령 등에 교조적으로 매달렸으며, 심지어 이들은 영어조차 배우려 하지 않아 미국의 노동 대중과 유리된 채 살고 있다는 비판이었다13).

헤이마켓은 오늘날 어떻게 기념되고 있을까? 김명환은 2002년 미국 방문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렵사리 찾아간 역사의 현장에는 겨우 몇 년 전에야 시장 명의로 만든 조그만 동판 하나가 보도에 초라하게 박혀 있다. 이처럼 자신의 중요한 역사를 방치하는 노동자들이 헤이마켓 사건 당시 유럽 노동운동이 보내준 관심과 연대 의식을 기억할 수 없고, 결국 오늘날 자신들의 나라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고통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14).”

헤이마켓에 대한 망각이 시사하듯이, 미국 노동운동은 오늘날 거의 사망 일보 직전이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 수는 1430만 명(2012년 기준)에 불과하고, 노조 조직률(근로자 중 노조에 가입한 비율)은 11.3%까지 떨어졌다15). 오늘날 자유의 여신상이 단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관광 상품에 불과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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